

째깍- 째깍-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저택의 아침은 항상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잠시 뒤부터는 그 고요도 산산히 부서질 것이였다.
“으아아악!”
“지각이다 지각! 아가씨한테 혼나겠어!!”
저택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새내기 사용인들이 숙소에서 뛰어나왔다. 2분 정도 늦는 게 뭐 그리 큰일이냐 묻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곳은 다르다. 신화에 등장하는 시간의 신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가문명처럼 이 저택 사람들은 시간 약속에 무척 예민하다. 1분이라도 늦으면 진절머리를 떨 정도니 말 다했다.
“아가씨! 아침 식사 시간입니다!!”
하얀 바탕에 금으로 섬세하게 테두리가 더해진 방의 문을 두드리니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사용인들이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간 방 안에는 성인 2명이 동시에 누워 뒹굴거려도 좋을 만큼 커다란 침대가 한쪽에 놓여있고 그 침대 위에는 끝으로 갈수록 진해지는 하늘색 머리와 깊은 바다를 연상시키는 짙은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막 소녀 티를 벗은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크로논 가문의 외동딸, 시라 S. 크로논이었다. 머리카락이 다소 헝클어졌지만 개의치 않고 조용히 사용인들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2분 13초 지각이네요?”
침대 옆 협탁에 놓인 고풍스러워 보이는 작은 괘종시계를 들여다보며 시라가 말했다.
“ㅈ...죄송합니다......”
새내기 사용인들이 한껏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소리와 함께 몸도 쪼그라드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자 시라는 한결 순해진 얼굴로 너무 무서워하지 말라며 다독였다. 사용인들은 무척이나 감동한 얼굴로 방 안에 놓여있는 테이블에 아침을 가져다 놓고 후다닥, 사라졌다.
“아빠나 할아버지라면 많이 혼내셨겠죠... 전 괜찮답니다. 후후.”
침대에서 빠져나와 보드라운 하얀색 슬리퍼에 작은 발을 넣고 테이블로 가 앉았다. 오늘의 아침은 설탕을 곁들인 프렌치토스트와 소시지, 유리병에 담긴 우유였다. 미소 지으며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토스트를 입에 넣으려는 순간,
“접니다. 아가씨,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무척이나 잔잔한 목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왔다. 필시 그녀의 전담 경호원 제논의 목소리일 것이었다.
“네, 들어오세요.”
끼익,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와 앉았다. 흑단같이 새카만 머리카락은 단정히 정돈되어 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눈동자는 날카로운 눈매 덕에 무척 차가워 보이면서도 어딘가 슬퍼보이는 인상이었다.
“식사 중이셨군요. 맛있게 드시고 계셨나요?”
“물론이죠~ 저희 집 요리사들 실력이 어디 가겠어요?”
아가씨와 경호원, 상하관계가 명확했지만 둘 사이의 대화에는 격식이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제논은 저택에 들어온지 상당히 오래됐고 시라가 아주 어리던 시절부터 그녀의 경호를 맡아왔던 만큼 그 신뢰는 무척이나 두꺼웠기 때문이다. 시라의 부모이자 크로논 가의 현 가주 부부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입 드셔보실래요? 달걀이랑 우유 조합이 아주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아가씨만을 위한 식사인데 제가 먹는 건 예의가 아니죠.”
제논이 정중히 거절하자 시라는 짐짓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엔 제논 거도 만들어 달라고 할게요, 후후...”
마저 남은 토스트를 입안으로 밀어 넣고 몸을 일으켰다.
“이제 무얼 하실 생각이십니까? 참고로 부모님은 지금 출장 중이십니다.”
제논의 물음에 시라는 어린애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놀러 나갈거에요. 오늘 오랜만에 날씨도 좋은데 집에만 있어서 뭐 해요? 나가서 재밌는 것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러려고요.”
부유한 집안의 외동딸로서 저택 바깥으로 나간 적이 별로 없지만 아직 세상에 궁금한 게 많은 20살이다. 게다가 오늘은 며칠째 내리던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 드러난 날, 한 마디로 놀러가기 딱 좋은 날이었다.
“그러시군요... 엇 잠시만, 그럼 저도 같이 가는 건가요.”
“당연하죠! 제 경호원인데 같이 안 가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요?”
“예????”
“얼른 준비나 하세요! 제논이랑 가려고 며칠 전부터 준비했으니까.”
그녀는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제논에게 준비를 지시했다. 멍한 얼굴에 물음표를 가득 띄운 제논이 조용히 방을 나가고, 시라도 옆방으로 건너가 옷을 갈아입었다. 하얀 실크 잠옷이 바닥으로 부드럽게 떨어지고 보일 듯 말 듯 은은하게 수가 놓여진 하얀 원피스와 금빛 시계태엽을 장식으로 한 검은 카디건, 마지막으로 하얀 베레모까지 쓰니 완벽한 아가씨의 외출복이 따로 없었다. 작은 가죽가방을 어깨에 메는 것으로 단장을 마친 시라는 복도 끝의 방문을 두드렸다.
“네 아가씨. 금방 나가겠습니다.”
그리고 약 30초 뒤,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새카만 셔츠와 우윳빛으로 뽀얀 슬랙스, 목 주위 옷깃에 금빛 톱니바퀴 배지가 달린 하얀 코트를 걸친 제논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저택의 주요인물들을 경호하는 경호원들이라면 누구나 보유한 통신기는 한쪽 귀에 얌전히 끼워진 채였다.
“어머, 너무 잘 어울리는 거 아니에요~?”
“아가씨도 잘 어울리십니다. 고귀함이 느껴지시잖아요.”
제논은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살짝 허리를 숙여 베레모의 리본을 다듬어 주었다.
“리본이 비뚤어졌어요. 예쁘게 쓰셔야죠.”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언뜻 보면 여자 손으로 착각할 것도 같은 손이 시라의 하늘빛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시라가 귀 끝이 발개진 채로 말했다.
“ㅈ... 제논?! 지금 뭐 하시는 거에요??”
“예쁘시니까 쓰다듬어드렸죠. 이제 나가 볼까요? 아가씨가 준비한 일정이 너무나도 궁금해집니다. 하하.”
“칫... 좋아요.”
초콜릿을 녹여 만든 듯한 색깔의 부츠를 신고 저택의 육중한 문을 나섰다. 무일푼으로 시작해 엄청난 성공신화를 이룬 크로논 가의 상징인 기적의 푸른 장미가 가득 피어있는 정원을 지나 커다란 철제 대문에 이르렀을 때,
“준비됐어요?”
“물론이죠, 아가씨.”
고개를 끄덕이자 문지기들이 구불구불한 형상과 복잡하게 얽힌 톱니바퀴와 태엽, 정확히 대칭이 되도록 서로를 가리키게 만들어진 시곗바늘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대문을 열었다.
끼이익-
“우... 나중에 기름칠이라도 좀 시켜야겠어요. 메모해 주실래요?”
“알겠습니다. (통신기를 켜고는) 대문에 기름칠 좀 부탁드립니다. 네, 네.”
“이제 정말 나가볼까요? 히힛.”
제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의 대문 앞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가까지는 잘 다듬은 돌로 된 길이 깔려있어 걷기 편했다. 동글동글한 돌을 하나씩 밟으며 시라가 물었다.
“제논도 저랑 같이 하는 외출은 처음이죠? 저번에도 혼자서만 어디 다녀오고 그러시더만...”
“죄송합니다. 친구가 잠깐 부르길래 다녀온 거였어요. 그래도 금방 돌아왔잖습니까?”
“다녀오는 길에 간식이나 좀 사오시지, 칫...”
제논이 며칠 전에 잠시 저택 바깥으로 출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간식을 사 오지 않아서 귀엽게 삐져있던 시라가 준비한 것이 바로 오늘의 외출이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는 번화가의 가장 맛있는 식당들과 디저트집,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비밀 장소까지...
시라 크로논의 특별한 외출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와! 여기에요. 제가 너무너무 오고 싶었던 이 번화가!”
“저번에도 몇 번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달라진 게 있다면... 가게들이 조금 변했군요.”
“그때는 엄마 아빠랑 왔었잖아요! 구경도 제대로 못 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었다구요. 오늘은 제논이랑 저랑 단 둘이니까 찬찬히 구경할 수 있어요!”
“풋... 그럽시다. 저랑 아가씨 둘 뿐이니까 여기 있는 가게들 다 둘러보고 가자고요. 약속?”
“네, 약속.”
하얗고 가는 새끼손가락과 그보다 약간 작은 새끼손가락이 부드럽게 얽혔다.
“일단 배고픈데 뭐라도 좀 먹을래요? 가볍게 몸 풀기로 저기! 저기 한번 가 봐요!”
작은 손이 가리킨 곳에는 수플레 팬케이크로 인터넷상에서 유명한 가게가 있었다. 구름처럼 폭신한 케이크에 곁들여 먹는 소스도 직접 고르는 재미가 있다고 하는데...
“엇 잠시만, 아가씨!!”
...시라는 이미 가게 앞까지 순간이동 수준의 속도로 가 있었다.
‘정말이지 못 말리는 아가씨라니까... 후후후.’
괜스레 신경이 쓰여 귀에 끼워져 있던 통신기도 슬쩍 빼 주머니에 넣은 제논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순수한 검은색 머리카락과 깊은 바다를 닮은 푸른 눈동자. 꽤나 보기 드문 조합에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쏠렸다.
‘사람들의 시선... 이 정도야 가볍게 무시해 주지. 나는 시라 크로논을 지켜야 하는 존재, 다른 건 필요 없지. 그게 무엇이든 간에’
표정이 싹 사라진 그의 얼굴은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배색으로 인해 더욱 더 차가워 보였다. 그러나 그는, 지켜야 할 존재에겐 한없이 따뜻한 존재였다.
“아가씨, 다 고르셨습니까? 뒤에 손님들이 기다려요.”
“앗, 방금 다 골랐어요! 제논은 안 골라요?”
“아가씨가 고르신 걸로 같이 먹겠습니다. 맛있는 걸로 고르셨으리라 믿어요.”
둘은 함께 자리에 앉아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파스텔톤을 메인으로 하여 구름처럼 폭신한 팬케이크를 형상화한 몽글몽글해 보이는 덩어리들이 곳곳에 그려져 있고, 널찍한 구움기 위에는 연노랑빛의 수플레 반죽 몇 개가 밑바닥을 지지고 있었다. 은은하게 달콤한 향기도 났다. 그때,
“대기번호 17번 고객님 주문하신 팬케이크 나왔습니다!!”
“아, 나왔다. 다녀올게요!”
시라는 가죽 가방을 의자에 살며시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걸어갔다. 무척이나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녀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라 크로논 아냐? 집 밖으로 나온 적이 손에 꼽도록 적다는?”
“맞는 거 같은데? 그리고 재벌가 외동딸이 자기 혼자서 나올 리가 없지. 저기, 저기 흑발에 파란 눈 남자 보이지? 경호원인가 봐. 칫, 본인도 예쁘면서 경호원도 잘생긴 애로 뽑았네... 짜증나.”
......
시라를 은근히 조롱하는 듯한 말투에 제논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질투가 난다지만 자신이 지키는 아가씨를 모욕하다니, 성격이 굉장히 올곧고 합리적인 그였지만 이성의 끈이 점점 끊어지고 있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완전히 이성을 잃기 직전...
“괜찮아요?”
시라의 목소리였다.
“아... 네, 괜찮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요! 제논은 거짓말 하면 얼굴에 다 드러나는 사람이라구요. 내가 모를 거 같았어요?”
“....그랬습니까?”
시라는 고개를 끄덕이곤 팬케이크와 음료수가 든 쟁반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많이 화난 거 알아요. 제논은 제가 아주 어릴 때부터 저만을 지키면서 살아왔고 절 욕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성이 끊길 것 같은 거. 근데 사람마다 생각은 다 다른 거고 그 사람들 생각도 제논이랑은 다를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속앓이만 하지 마요. 자! 달달한 거 먹으면서 화 좀 푸시라고요.”
테이블을 살짝 내려다보니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높게 솟은 수플레 팬케이크와 시럽이 든 작은 주전자, 새콤한 향이 느껴지는 레모네이드가 가득 든 유리컵이 놓여 있었다. 그 앞에 앉은 시라는 두 뺨이 발그레해진 채로 두 손을 비비고 있었다. 잠시 뒤,
“제논, 찍어주세요.”
“알겠습니... 예??”
그녀가 가죽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건네주며 말했다.
“추억이잖아요, 인터넷에도 올리고... 헤헤.”
“무슨... 알겠습니다. 포즈 취하고 싶으시면 취하세요.”
제논은 귀여운 포즈를 취한 시라의 모습을 그녀의 카메라에 담았다. 발그레하게 물든 뺨과 하얀 피부, 동그란 눈매의 푸른 눈과 끝으로 갈수록 진해지는 푸른 머리카락이 퍽 잘 어울렸다. 눈을 반짝이던 시라가 자신감이 한껏 오른 얼굴로 포크를 건네주며 활기차게 외쳤다.
“자, 먹어요! 내가 사주는 거니까 맛있게 드세요.”
“잘 먹겠습니다, 아가씨.”
모름지기 어떠한 음식이든 맨 처음에는 그 음식 본연의 맛을 느껴야 하는 법, 제논은 아무 소스도 묻지 않은 팬케이크를 포크로 살짝 떠서 입에 넣었다. 너무 부드러운 나머지 포크를 살짝 갖다 대기만 했는데도 포슬포슬 부서지는 게 신기했다. 한 입 베어문 순간...
‘......!’
제논의 29년 인생에 이런 팬케이크는 처음이었다. 입 안에서 퍼지는 고소한 달걀과 부드러운 크림의 조화, 달콤함을 더해준 설탕과 우유의 환상적 하모니...
“아가씨, 여기 어디서 찾으셨다고요?”
“인터넷에서 찾았는데... 왜요, 맛있어요?”
“아, 정말 너무 맛있네요. 어떻게 이런 맛이 나올 수가 있습니까?”
“푸흣... 이 거리에 이런 수플레 팬케이크만 4군덴데 제가 다 한번씩 가보고 제일 맛있었던 곳으로 골라서 데려온 거에요. 맛있다니 다행이에요?”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감사하지만요.”
이성이 반쯤 날아가 있어 누가 툭 치기라도 하면 바로 얼굴에 주먹을 날릴 것처럼 날카로웠던 눈매가 훨씬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봄날 벚꽃처럼 살짝 핑크빛으로 물든 제논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시라는 핸드폰을 가방에 도로 넣으며 말했다.
“몸 풀기도 했으니 다시 나가봐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히힛!”
“와아~ 제논! 오늘 날씨가 너무 좋은 것 같아요~ 같이 나와서 그런가?”
“며칠 전부터 비도 안 오고 미세먼지도 없었는데 오늘은 햇빛까지 화창하네요. 후후, 정말 아가씨와 함께 나와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검은 카디건의 끝자락이 바람에 살랑, 살랑 흩날렸다. 파아란 머리카락까지 어우러져 무척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동글동글한 돌이 깔린 거리를 춤추듯 유영했다.
‘아가씨... 무척 즐거워 보이시네요.’
‘나중에 더욱 자라서도 그 미소, 그 웃음... 절대 잃지 말아주세요.’
제논은 서글프게 웃었다. 자신과 그녀가 절대 이어질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을까. 그때,
“제논! 이리 와 봐요.”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봐봐요, 너무 예쁘지 않아요...?”(초롱초롱)
“......?”
그녀의 부름에 가본 곳에는 하늘색 장미꽃 모양의 브로치가 보드라운 천에 싸여 있었다. 금으로 장미덩굴을 표현하고 꽃의 한가운데에는 작은 다이아몬드도 박혀 있었다. 가격은... 50만원. 시라라면 몇 개든 살 수 있겠지만 지금 그녀는 자기 돈으로 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눈에서 눈물 두 줄기가 흘러내릴 것처럼 촉촉하게 젖은 눈가와 언젠가 인터넷에서 떠도는 걸 본 것 같은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제논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결국...
“......3개월 할부로 해주십시오..”
“와! 제논, 이거 사 주시는 거에요? 고마워요.”
“대신 다음 달 월급 조금만 올려주세요...”
“아 그거야 당연한 거고요! 월급날만 기다려 봐요, 내가 2배로 넣어줄테니까.”
카운터의 직원이 브로치가 든 작은 상자를 건네주었다. 후다닥 받아본 시라,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고는 더욱 더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제논을 쳐다보았다. 그 거부할 수 없는 눈빛에 결국...
“아가씨, 이리 와 봐요.”
“?”
키가 시라보다 머리 하나 정도 큰 제논이 브로치를 한 손에 들고 다리를 살짝 굽혀 눈을 맞추었다. 평소와 같은 멍하고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그녀의 옷에 브로치를 달아주는 손놀림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눈은 계속해서 시라에게 맞추고 있었다. 다소 불편해 보이는 자세였지만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자, 다 달았어요. 한번 보실래요?”
거울을 보니 칠흑같은 색의 카디건 위에서 금빛 덩굴과 하늘색 장미가 빛나고 있었다. 배경과 대비가 이루어져 더욱 도드라져 무척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우와...! 너무 예쁜 거 아니에요?”
“아가씨보다는 아닙니다. 자, 이제 다른 곳도 가보실까요.”
“어어? 너무 바로 답 나오는 거 아니에요? 거짓말 아냐??”
“전 거짓말 못 하는 성격인 건 아가씨가 더 잘 아실텐데 말이죠...(먼산)”
“칫...”
정말로 제논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아니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 다 드러나는 성격이었던 지라 방금 한 말도 분명 진실일 터였다.
이런 건... 거두절미하고,
“이제 2군데 밖에 안 돌았다구요! 얼른 다른 데 가봐요. 이러다 기다리겠어~”
“(가볍게 한숨 후 미소) ...네, 같이 갑시다.”
“우와...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길 줄이야..”
“유명한 뎁니까?”
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방에서 파스타가 제일 맛있기로 소문난 집이에요. 원래도 사람이 많은 덴데 게다가 요 며칠 전부턴 한정 메뉴도 팔아서 사람이 배로 늘어버렸네요... 어떡해요 제논?”
“어떡하긴 뭘 어떡합니까. 기다리셔야죠.”
“기다리기 너무 귀찮단 말이에요! 이 땡볕에 30분을 서서 기다리라구요?!”
“하... 잠시만요.”
잠시 어디론가 달려간 제논은 이윽고 손에 연한 분홍빛의 아이스크림을 들고 돌아왔다. 색깔로 보아 딱 딸기맛이었다.
“와~ 고마워요! 이제 좀 편하게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미소)”
“근데 제논 건 안 사왔어요?”
“...그러실 줄 알고 제 것도 물론 사가지고 왔습니다. 전 그렇게 준비성 없는 인간이 아니에요?”
제논은 장난스럽게 웃고는 뒤에 감추어두었던 왼손에서 옅은 보랏빛 아이스크림을 꺼내 들었다. 역시... 이 근방 최고 재벌가 후계자의 경호원은 준비성마저도 뛰어난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그렇게 기다리기를 15분, 마침내 자리가 났다는 소리가 들렸다! 반쯤 녹아 흘러내릴락 말락 하는 아이스크림을 여전히 입에 문 둘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더운 날씨에 알맞게 내부에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다. 바깥 풍경이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은 시라가 지나가던 직원을 부르더니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주문을 했다.
“여기, 이 가게에서 제일 맛있는 걸로 두 개 주세요!”
“...... 예?”
훅 들어오는 주문에 놀랐는지 직원은 약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멍한 표정으로 창 밖을 쳐다보던 제논이 분위기를 눈치채고 정정하여 설명해 주었다.
“아, 여기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토마토 파스타랑 오일 파스타 하나씩 주시고요. 아가씨, 음료는 뭐라도 하시겠습니까?”
“기간 한정 애플망고 에이드요! 사실 그걸 먹기 위해서 여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요!”
“...예, 기간 한정 애플망고 에이드 두 개 주세요. 감사합니다.”
매우 잔잔하고 정중한 말투에 출중한 외모까지. 말 그대로 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제논의 행동에 직원은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주문을 끝내자 그 직원은 주방으로 쏜살같이 달려 들어갔다. 얼굴은 메뉴판으로 꼬옥 가린 채로.
“...내가 그렇게 잘 생겼나.”
“네?”
“아가씨는 제가 잘 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궁금해지네요, 갑자기.”
“음... 평균보단 확실히 위죠. 왜요?”
“요즘 사람들이 저만 보면 얼굴이 빨개지십니다. 몇몇 분들은 아예 부끄러운지 도망도 가시더라고요. 그래서 말입니다.”
“잘생긴 건 잘생긴 거고, 태도 때문이 아닐까요?”
“예?”
“제논도 잘 알겠지만 저희 집은 예의범절에 무척 예민해요... 시간약속에 민감한 거도 그거 때문이고. 그런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원래 성격부터가 그러니 예의가 몸에 배지 않을 수가 없죠... 사람을 사귈 때는 물론 외모도 중요하기야 하겠지만 깊게 들어가면 결국 예의 바른 사람만 남게 돼요. 제논이야 그 두 개를 다 갖췄으니... 사람들이 이끌리는 건 당연한 거 아닐까요?”
20살이라는 나이에 맞지 않게 굉장히 뼈가 있는 말이었다. 그 말에 제논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군요... 좋은 것이였군요.”
“당연히 좋은 거죠?! 앞으로도 쭉 그래주시면 돼요.”
“네, 아가씨.”
그렇게 대화를 잇다 보니 어느새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파스타가 두 사람의 앞에 놓여졌다. 함께 시켰던 기간 한정 애플망고 에이드도 같이 나왔다. 멍하니 바라보던 제논이 문득 겉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라에게 내밀며 말했다.
“아까 전엔 제가 찍어드렸으니 이번엔 아가씨가 찍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얼른 받아주세요. 파스타 다 식겠다.”
아무 장식도 없이 투명 젤리 케이스만 달랑 씌워놓은 핸드폰. 주인을 닮아 쓸데없는 건 하나도 달려있지 않았다. 얼떨결에 핸드폰을 받아든 시라, 잠시 망설이더니 이윽고 동글동글한 눈을 빛내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제논은 멍하니 바깥을 보고 있었지만 그 모습조차도 화보촬영의 한 장면 같았다. 그렇게 잠깐의 포토타임 후...
“자, 이제 먹어요!”
토마토 속살의 색을 그대로 옮겨와 물들인 듯한 옅은 붉은색의 토마토 파스타와 사이사이 들어있는 마늘과 페페론치노가 은은한 향을 내는 오일 파스타는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이 가게가 왜 유명한지 단번에 알게 할 수 있을 정도로 풍미가 깊고 아주 맛이 있었다. 그 맛에 홀렸는지 식사 중에 말을 꽤 하는 편인 둘 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먹기만 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아, 맛있다~ 내가 왜 기꺼이 30분을 기다리자고 했는지 이제 알겠죠?”
“아가씨 감사합니다. 신세계를 경험한 기분이었네요.”
“그랬다니 다행이에요! 이제 내가 준비한 장소도 어느 정도 끝나가는데... 다음은 어디로 갈까요? 이번엔 특별히 제논이 정하게 해줄게요.”
그녀가 애플망고 에이드를 홀짝이며 묻자 제논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음... ‘스텔라니아의 이름’이라고 혹시 아십니까?”
“스텔라니... 뭐요?”
“모르셨구나... 스텔라니아의 이름이라고, 사장님이 무슨 신기라도 있으신지 손님이 원하는 물건이 무엇이든 척척 알아맞춰 준다고 해서 유명해진 곳이에요. 어쩌면... 있어선 안 되는 것도 있겠죠?”
제논의 마지막 말에 시라는 파랗게 질린 얼굴이었다.
“그... 그런 말은 하지 마요! 있어선 안 되는 거라니...”
“후후, 농담이고요. 사장님이 엄선해서 고르고 고르신 것만 진열해 두셨다고 하니 끔찍한 건 없을 거에요. 자, 그럼 가볼까요?”
“우와...”
“멋있죠? 저도 이번에 알게 된 곳인데... 웬일인지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모양이더라고요. 들어갈까요?”
딸랑-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신비의 가게, ‘스텔라니아의 이름’이 모습을 드러냈다. 별과 은하를 모티브로 한 장식물들이 보랏빛 그라데이션 벽지와 어우러져 상당히 신비로운 분위기였는데, 통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는 사장도 마침 카운터 앞에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 이게 누구신가! 이 근방 최고 재벌 크로논 가 집사 아닌가?”
“경호원입니다만... 이번엔 아가씨와 함께 나와 봤습니다.”
흔히들 민트색이라고 부르는 옅은 초록색 웨이브 헤어와 세상의 모든 색을 전부 합친 듯한 순수한 흑안. 머리 위에는 흰색 리본 머리띠가 발걸음에 맞춰 통통 튀었다. 이 가게의 사장 H. 스텔라니아, 다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긍심이 높고 겉으로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탓에 세간에서는 인간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그녀는 극구 부인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어떤 이유로 날 찾아왔나?”
“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 드릴 선물을 찾으러 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 준다라... 무엇이 좋을까나......?”
스텔라니아가 손가락을 카운터에 피아노 치듯 움직이며 깊은 고뇌에 빠졌다. 찌푸린 미간을 보아 정말 깊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약 3분 뒤...
“음... 그거면 딱 좋겠어. 잠시만 기다려 봐.”
그 말을 남기고 카운터 뒤편의 창고로 사라졌다. 스르륵, 잔향처럼 스치는 그녀의 민트색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라가 입을 열었다.
“...저 분 정체가 뭘까요?”
“저도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만... 평범한 분은 분명히 아닙니다. 진짜 평범한 사람이라면 저렇게 손님이 원하는 걸 척척 내올 리가 없어요.”
두 사람이 쑥덕쑥덕거리는 사이, 그다지 크지 않은 얄팍한 연갈색 상자를 들고 나온 스텔라니아가 상자를 카운터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며 말했다.
“이건 우리 가게에 하나밖에 없는 건데... 잘 들어. 내가 정말 힘들게, 극비리에 구해온 거야. 전 세계에도 몇 개 없는 거라고. 옛날에 어떤 마법사가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는 신비의 책이라고 해. 이렇게 얇아 보이지만 주인이 원한다면 쪽수가 무한히 늘어나지.”
상자 안에는 짙은 푸른색의 바탕에 금박으로 글자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고, 표지 한가운데에는 신비한 빛을 뿜어내는 보석이 박혀있는 얇은 양장본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진중한 톤의 목소리가 된 스텔라니아가 말을 이었다.
“몰랐겠지만 우리 가게는 물건에 돈을 받지 않아. 대신 정말로, 버리지 않고 제대로 쓰겠다는 약속을 받지. 너희 둘, 이 책... 안 버리고 제대로 쓸 자신 있어? 내가 그동안 몇 번 쓰지도 않고 우리 가게 물건 버리는 애들을 너무 많이 봐서 불안해서 그래. 약속할 거야?”
진중해 보이는 목소리와 표정이었지만 어딘가 슬퍼보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더니 동시에 말했다.
“당연하죠.”
“당연한 일입니다.”
자신감이 가득 들어간 목소리에 스텔라니아의 새카만 눈동자가 빛났다. 한껏 텐션이 올라간 목소리의 그녀가 기쁜 표정으로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음, 그래! 역시 너희들이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어. 자! 잘 써줘. 그리고 가게 홍보도 좀 해주고... 히히.”
“물론이죠. 스텔라니아 사장님. 주인님께 꼭 귀띔해 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계세요!!”
손까지 흔들며 인사하는 스텔라니아를 남겨두고 둘은 가게를 나왔다. 여전히 신비로운 오라를 뿜어내는 그 가게 앞에서 제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참 좋으신 분이에요. 이렇게 멋진 책도 주시고...”
“그러게 말이에요, 쪽수가 무한대로 늘어나는 책이라니... 언제 다 써요 이걸??”
“영원히 다 못 쓰는 거 아니겠습니까, 무한히 늘어나니까... 후후.”
뚜껑을 열어 책의 양장을 쓰다듬던 시라, 문득 흘러가는 듯 말을 내뱉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거기만 가면 되는데...”
“음? 어딜 말입니까?”
“가기 전까진 비밀이에요, 히히... 이제 슬슬 밤인데 집에 돌아갈까요, 아님 거기만 갔다가 돌아갈까요?”
“.....아가씨가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전 항상 준비 되어있습니다.”
그 말에 시라는 미소를 짓더니 총총걸음으로 먼저 나아갔다. 밤이 되어 사람이 더욱 많아진 거리 방향으로 나아가는 걸음에는 이유 모를 흥분감이 깃들어 있었다. 제논은 조용히 그녀를 뒤따랐다.
까만 돌바닥에는 두 사람의 구둣발 소리만이 울렸고, 하늘에는 왠지 스텔라니아의 가게 벽지에서 본 듯한 별들이 무수히 반짝이고 있었다.
“아가씨! 걸음이 너무 빠르십니다. 좀 천천히 가주세요.”
“아, 거기가 일찍 문 닫아서 빨리 걸어야 된다구요! 거의 다 왔으니까 좀만 더 힘내주시라고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제논은 궁금해졌다. 게다가 밤 시간대인 탓에 거리에는 낮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20살 치고 가뜩이나 키가 작은 시라를 찾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렇게 10분을 걸어...
“후우~ 다 왔다. 문 닫기 전에 와서 다행이에요!”
“도대체 어디를... 엇.”
시라가 마침내 걸음을 멈춘 곳은 이 거리, 아니 이 도시를 통틀어 가장 비싸고 아름다운 장신구를 파는 가게였다. 기본적으로 모든 제품들이 수제작이라 매우 가격이 높고, 몇몇 제품은 완전맞춤 커스텀까지 지원해주는 곳이라 수백 수천만 원이 ‘따위’로 보인다는 그곳. 그래서 이 도시의 여자들은 가장 원하는 결혼 선물이 이 가게에서 만든 결혼반지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여기는...”
“놀랐죠? 정말 아무한테도 말 안하고 준비했다구요. 자, 들어갑시다!”
그녀를 따라 들어간 가게 내부는 외관보다 더 휘황찬란했다. 흰색을 메인으로 하여 곳곳에 금빛 장식과 투명한 쇼케이스가 쭈욱 늘어선 모습이 마치 중세의 성을 연상시켰다. 카운터에 서 있던 몇몇 직원이 시라를 알아보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크로논님 오랜만입니다. 저번에는 부모님이랑 오시더니 이번엔 혼자 나오셨군요?”
“이번 주 내내 엄마랑 아빠가 출장이시라서... 집에 혼자 있기도 심심해서 나왔죠 뭐.”
단정한 흰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과 시라는 꽤 면식이 있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몇 주 전에 이곳을 방문한 시라의 부모가 이곳의 상품들을 싹 쓸어갔기 때문이다. 이 도시에 이 가게가 생긴 이래로 이렇게 많은 물건을 사간 사람은 없었다. 그 이유로 크로논 가의 사람들은 항상 vvvip 대접을 받으며 직원들, 그리고 사장과 개인적인 연을 쌓아가고 있었다.
“흐응... 뭐가 좋을까나. 제논, 뭐 맘에 드는 거 없어요?”
“네? 아아, 아직은 딱히 끌리는 게 없네요. 워낙에 종류가 많아서.”
“흐응, 좀만 더 찾아봐요.”
두 사람은 운동장만큼 넓은 가게 안을 한참이나 돌아다녔다. 아마 둘 중 하나가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구경하다가, 진 사람이 고른 디자인으로 맞춰버릴 생각인 듯 했다. 그리고 거의 1시간이 지난 뒤...
“전 이거요!”
“저도 정했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카운터 앞으로 걸어와 섰다. 한 손에 쏙 들어갈 만한 작은 상자를 하나씩 든 채였다. 물끄러미 서로를 쳐다보고는, 제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누가 먼저 까는 걸로 정할까요.”
“먼저 말했으니까 제논이 먼저 까요! 난 나중에 까고 싶으니까.”
“허어... 알겠습니다.”
제논은 잠시 한숨을 짓더니 자기 손에 쥐어진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왠지 둘의 눈동자 색을 꼭 닮은 색깔을 가진 보석이 박힌 꽤 얇은 은빛 반지가 놓여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반지를 꺼내어 어루만졌다. 하얀 장갑을 낀 듯 다소 비정상적으로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과 은빛 반지가 퍽 잘 어울렸다. 옆에 선 직원들의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오~ 센스 있는데요?”
“아가씨에게라면 뭐든 어울리겠지만... 그래도 이게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골랐습니다. 자, 아가씨도 열어 보시지요.”
시라는 짐짓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기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제논이 고른 것보다 조금 더 화려한 분위기에 똑같이 푸른 보석이 박힌 은빛 반지가 놓여 있었다. 보석 주위에 아주 얇게 덩굴이 세팅되어 있고 아주아주 작은 다이아몬드도 함께 세팅되어 무척 아름다운 은반지였다.
“오...”
“예쁘죠? 여기서 비싼 물건 1,2위는 우리 엄마 아빠가 다 쓸어가서 없었고... 아쉬운 대로 3번째로 비싼 걸 골랐어요. 제논 건 내가 살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정말입니까?”
“그럼요, 그럼 내가 뭐 거짓말 하는 줄 알았어요?”
“아이 아닙니다! 아가씨가 거짓말을 하실 리가 없잖습니까.”
그렇게 두 사람의 귀여운 말다툼이 몇 분간 이어진 후,
“와~ 손가락이 워낙에 가늘어서 그런가, 너무너무 예뻐요! 원래 제논 거였던 것처럼!”
“제 손가락이 가는 편이긴 합니다만... 후후, 안 빠지게 항상 끼고 있겠습니다.”
“좋아요! 히히.”
그 순간, 제논이 두 팔을 활짝 펼치며 말했다.
“아가씨, 이리 와 봐요.”
“??”
제논은 가까이 다가온 시라를 꼬옥 끌어안았다. 느닷없는 포옹에 시라는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ㅈ, 제논?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잠깐만 이대로 있어봐요. 따뜻하고 좋구만 뭘.”
“아니 그건 괜찮은데 숨은 좀 쉬게 해줘야 할 거 아니에요!”
“아, 맞다.”
잠시 팔을 푼 제논은 시라가 몸을 조금 틀자 다시 꼬옥 끌어안았다. 찬바람 쌩쌩 불 것 같은 그였지만 의외로 품 속은 따뜻한 모양이었다. 그의 품 속에서 시라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논.”
“예?”
“혹시 저 좋아해요?”
“......부정은 못하겠네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마지막으로 강하게 끌어안은 다음 놓아주었다. 옆에서 놀고 있던 직원들이 괜스레 박수를 쳐주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뽀얀 뺨도 조오금 발그레해진 모습이었다. 그게 더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두 사람은 가게를 나왔다. 어느새 칠흑같이 새카맣게 변한 밤하늘에는 옅은 노란색의 달이 휘영청 떠있었고 거리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쩌면 두 사람은 그 인파 속에서 서로의 손을 놓쳐버릴 수도 있고, 놓친 손을 잡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고 있는가? 시라네 가문의 성씨인 ‘크로논’은 신화 속 시간의 신의 이름을 따와 지어진 것, 시간은 아무도 붙잡을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다.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처럼, 그 두 사람의 이야기도 앞으로 끝없이 이어질 것이었다.
-그 두 손가락에 끼워진 은빛 반지가 빛나는 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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