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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은 씨, 수업 끝나면 데이트 갈래요?

 

허묵이 그렇게 제안한 데이트 장소는 캠퍼스 내의 넓은 정원이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장미가 가장 예쁘게 피어나는 곳으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기도 했다. 당신과 함께 가보고 싶었어요. 그 자상한 말에 채은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얼굴로, 저렇게 데이트 신청하는데 거절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어디 나오라고 해 봐.

 

그러나 그를 따라 걷던 채은은 정원과 가까워질수록 제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점점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콩콩 뛰는 심장 소리는 허묵의 귀에 다 들릴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좋은 것과는 별개로 평소와는 다른 떨림이 엄습한 탓이었다. 아니, 좋다고 맹랑하게 대답할 때는 언제고!

결국 정원의 입구를 눈앞에 둔 채은은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그에게 물었다. 괜찮겠어요? 대뜸 날아든 물음표에 허묵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반문했다. 음? 뭐가요? 그거야, 교수님이랑 같이 가면… 제대로 데이트를 못 즐길 테니까요. 자연스레 튀어나올 것 같던 그 말은 애써 목구멍 밑으로 삼켜냈다. 차마 그런 이유로 허묵과의 데이트를 포기하기에는… 또 억울할 것 같았으니까.

 

“허 교수님이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데이트 나오신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정원에 삼삼오오 모여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학생들의 시선은 허묵이 입구로 발을 들였을 때부터 일제히 집중되었다. 놀라움, 의아함, 그리고 호기심 따위가 한데 뒤섞인 눈빛. 허묵의 옆에 선 채은은 그 눈들을 훑어보다가 가만히 생각했다. 오늘 저녁 학교 커뮤니티에는 이런 글들이 올라오겠지. ‘허 교수님 여친이랑 정원에서 데이트함.’, ‘허 교수님 여자친구랑 커플룩 입었던데?’ 기타 등등. 그녀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어쩐지 벌써 눈앞에 보이는 것도 같고.

채은은 제게(정확히는 허묵과 제게) 쏟아지는 눈들을 잔뜩 의식하며 허묵의 손을 살며시 놓아버릴까 고민까지 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손을 강하게 잡아오는 허묵 덕분에 그저 고개를 숙여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는 수밖에 없었다. 연모대학교 공식 캠퍼스 커플. 허묵과 채은에게 따라붙은 이 수식어는 채은에게 아주, 몹시, 상당히, 무척이나 영광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부담스러운 이름이었다.

 

“채은 씨.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아, 아니… 그런 건 아닌… 데.”

“컨디션이 안 좋아 보여요. 다음에 다시 올까요? 당신이 원한다면.”

“아니에요, 저 정말 괜찮아요!”

“흐음, 그래요? 그렇다면…, 나랑 이렇게 손 잡고 걷는 게 달갑지 않은 건가?”

“그건 당연히 아니고요!”

 

제 마음 뻔히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런 장난을 치세요? 채은이 발끈하자, 허묵이 짓궂게 웃었다. 당신이 이러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요. 두 사람의 관계란 대략 그랬다. 허묵이 슬그머니 한 발짝 뒤로 물러나려 하면, 채은이 황급히 두 발짝 나서서 다시 그를 붙잡고 마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허묵이 은근히 손을 놓으려 하자, 그녀는 그 손을 다시 잡고는 아예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꼈으니까. 그제야 허묵이 만족스럽다는 듯 그 작은 손을 맞잡고는 미소를 지었다.

 

연모대 안쪽에 위치한 장미 정원은 연모대는 물론 연모시의 시민들까지도 찾아와 피크닉을 즐길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최근에는 SNS에서까지 유명세를 탄 바람에 외곽 지역의 사람들도 많이 찾아온다는 것 같았다. 채은 또한 새내기 시절에 친구들을 따라 이곳에 왔던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했다. 이런 곳은 애인이랑 와야 하는데. 채은은 곧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선 허묵을 올려다보려다가, 그의 지긋한 시선을 의식하고는 다시 고개를 제자리로 홱 돌려 버렸다. 그녀의 두 볼은 홍조가 가시지 않은 채로 여전했다. 화륵 달아오른 두 볼이 허묵과 마주 잡고 있는 손보다 더 뜨거운 것 같았다.

 

“와, 푸른 장미가 정말 자라네요?”

“아마 품종 개량으로 만들어진 장미일 거예요. 그래서 푸른 장미에는 ‘기적’이라는 꽃말도 있죠.”

“그건 알고 있었지만, 그냥, 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 신기해서요!”

 

채은은 제가 언제 긴장했냐는 듯 들뜬 목소리를 하곤 핸드폰을 들어 열심히 꽃을 찍었다. 이곳저곳이 갖가지 색상의 장미들로 꾸며진 정원을 채은이 카메라에 담으면, 그 옆에서 허묵은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한참 후, 그의 시선을 또 한 번 의식한 채은이 그의 눈을 마주했다. 어딘지 심통이 나 있는 귀여운 표정이었다.

 

“교수님, 이번에도 장미 말고 저 찍고 계셨죠!”

“하하. 내 눈앞에 푸른 장미보다 더 아름답고 신기한 당신이 있는데, 어떻게 장미에 더 집중할 수 있…,”

 

쉿!

채은은 허묵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검지를 들어 제 코와 입술 위에 급히 갖다 댔다. 갑작스러운 제스처에 허묵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요? 채은은 까치발을 들고는 허묵의 귓가에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며 속삭였다.

 

“그런 말은 둘만 있을 때 해 주세요! 여기는 교수님 알아보는 눈들이 너무 많아요!”

 

어쩜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울 수가 있는지.

결국 허묵은 웃음을 작게 터트리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당신 말대로, 둘만 있을 때 실컷 해 줄게요. 동시에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를 덮었다. 따스한 온기가 머리칼을 타고 고스란히 온몸으로 전해졌다. 채은의 얼굴이 또다시 붉은 장미처럼 물들었다. 간질간질한 심장 위에 따끈한 마시멜로우를 끼얹은 기분. 온 신경까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그 느낌이란 정말이지 말로 쉬이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고 또 황홀한 감각이었다.

 

*

 

두 사람은 길어진 해가 저물 때까지 손을 맞잡고 정원을 걸었다. 북적였던 학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어수선하던 공기도 조금 환기가 되었을 때쯤, 허묵은 잠시 쉬어가는 게 좋겠다며 장미로 둘러싸인 벤치로 발걸음을 옮겼다. 허묵의 옆에 따라 앉은 채은은 고개를 그의 어깨에 기대며 빙긋 미소 지었다. 초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선선한 공기가 머리칼 사이를 기분 좋게 가르며 흩어졌다. 채은은 노을빛을 받아 화사하게 빛나는 형형색색의 장미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허묵이 그녀의 어깨를 톡톡, 가볍게 두드릴 때까지.

 

“어, 이게 뭐예요?”

 

허묵이 그녀에게 내민 것은 푸른 장미 한 송이였다.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걸로 봐서는 미리 준비되어 있던 선물인 듯했다. 허묵은 그녀의 손에 장미 한 송이를 쥐어 주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선물이에요. 당신에게 꼭 주고 싶었어요.”

“교수님.”

“아까 말했죠? 푸른 장미의 꽃말은 기적이라고.”

 

내게 기적을 안겨 준 당신에게 딱 어울리는 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허묵은 그리 말하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주홍빛의 노을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반짝이는 등안이 황혼의 바다처럼 깊었다.

 

“고마워요, 교수님.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채은은 두 손으로 장미를 받아 들고는 맑게 웃었다.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 어떤 꽃보다 더 다채로웠고, 더 향기로웠다. 그녀가 가진 눈부심은 그의 눈을 아찔하게 찔렀고, 그녀의 달큰한 향은 그의 코끝을 자꾸만 어루만지고는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곤 했다. 그 순간 허묵은 어떤 말로도 정의내릴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기적이라는 단어마저도 이를 대체할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이었다.

 

허묵은 제게 찬란한 감각이 되어 준 채은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푸른 장미보다는 채은에게 더 ‘기적’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지 않을까. 장미의 영롱한 푸른빛의 색감마저 채은이 모조리 앗아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의 눈에는 채은만이 더없이 빛나고 있었다. “채은 씨.” 무언가에 홀린 것만 같은 목소리로 그렇게 부르자, 채은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맞닿은 시선은 딱 숨이 막혀버릴 정도로 따스했다.

곧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양 뺨을 따스히 덮었고,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입술을 겹쳤다. 깊지 않은 담백한 입맞춤이 마치 나비의 날갯짓과도 같았다. 가볍지만 달뜬 감각이 스치며 내려앉았다.

 

황혼마저도 숨을 죽이는 순간. 입술을 뗀 그들의 시선이 다시금 맞닿았다. 이대로 서로의 시선 속에 잠겨도 좋을 만큼, 정말이지 아득히도 사랑스러운 시간이 느지막이 그들 사이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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