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작 이전 시점
*드림주 = 오리지널 ep3 플레이어 집행관이라는 설정이며, 오리지널 시점의 아르타니스는 그의 부관이라 해석하고 있습니다.
*드림주/캐들이 모두 지구인이 아닌 관계로... 세계관에 맞추기 위해 부득이하게 기념일 명칭을 다르게 표현하였습니다. (‘한 주기[=1년]의 절반’, ‘초록의 날’ 등...)
*각종 헤드캐논 및 창작 설정 주의!
끔찍할 정도의 더위에 숨마저 막힐 듯한 날이었다.
행성 적도에 가까운, 안티오크의 여름은 그 곳에 발을 들이는 모든 생명에게 가혹했다. 사방이 사막인 외곽 지역보다야 더하겠냐마는. 허나 수련생이라면 필수적으로 착용해야 하는, 방열 기능조차 없는 구식 갑주 차림으로 밖을 싸돌아다니기엔 결코 좋은 날씨라 할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고위 기사 수련생 네스티르 케 벨라리와 그의 가장 친한 친구 두 명은 하필 이런 날에 정기 수련 일정을 예약해두었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 그것도 실전에 가까운 완전 무장 상태로 – 방열 기능조차 없는 구식 갑주 차림으로 밖을 싸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린 도제 시절에 익히 그리했던 것처럼, 거추장스러운 갑옷은 죄 벗어던지고 튜닉 차림으로 강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그와 친우들은 더 이상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년이 아니라, 각자 제자 한 명씩은 둔 어엿한 정식 기사였다. 그것도 아주 촉망받는. 체통깨나 지킨다고 소문난 엘리트 두 명이, 무려 안티오크의 신임 법무관 양반과 함께 근무 시간에 신나게 물놀이나 하고 있다면 제 이미지와 탄탄한 커리어에 어떤 타격이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태사다르가 새로 제자 삼았다는 그 젊은이가 부러웠다.
…? 수련장에 가는 게 아니었나?
한창 상념에 잠겨 있던 네스티르는, 옆에서 걷고 있던 그의 친우가 익숙한 길을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자 의아함을 내비치며 물었다.
자네 몰랐는가? 오늘은 한 주기에 한 번 돌아오는 ‘초록의 날’이라네. 카스 이래 쭉 이어져 온 관습일세.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지. 신임 법무관은 이리 말했다.
혹여 정말로 물놀이라도 하러 가는 줄 알았나? 제 마음을 읽은 듯 농담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네스티르는 딱히 부정하지 않은 채 어깨만 으쓱했다.
행성이 태양에 가장 가까워졌을 때, 각자에게 소중한 이들과 함께, 우리 주변의 싱그러운 삼림과 푸른 초목을 만끽하는 명절이라네. 전통적으로 한 주기의 절반이 지났을 즈음, 그러니까… 여름이 한창 기승을 부릴 때 즈음 열리지.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역사학 교관들에게 이와 관련된 전통에 대해 들어본 적도 있는 듯했다. 칼라 이전, 영원한 투쟁 시기의 관습에서 유래했으며, 가족 단위로 숲을 순찰하며 적의 공습으로부터 진지를 지키던 전략이 시간이 지나며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모양이다.
함께 갈 텐가?
잠깐, 나는 당장 사흘 뒤에 이번 주기 역량 평가가… 태사다르가 다급하게 말하자,
괜찮네! 자네 같은 인재라면 이번 평가도 부담 없이 최우등으로 통과할 게야! 피닉스가 자랑스럽게 그의 말을 잘랐다. 저 대책 없는 당당함은 여전하다는 듯, 네스티르는 다시금 어깨를 으쓱였다.
아, 이것을 말하지 않았군. 오늘 수련 일정 말이네.
설마. 앞서 가던 태사다르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특별히 내가 손을 좀 써 두었지. 이런 날씨에, 그것도 야외에서 반나절 동안이나 합을 겨룬다는 건 아무리 기사단이라 해도 너무 끔찍한 일 아닌가. 내가 안티오크 법무관으로서 정식으로 받은 첫 번째 휴가를 어디 사용했는지 맞춰 보게.
세상에, 사랑한다 친구여. 무릎 꿇고 신들께 감사의 기도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든 첫 번째 자손을 통틀어 너희들이 최고다.
높은 상록수가 빼곡히 들어선 나지막한 산지 너머로 계곡이 자리했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여름 풍경을 즐기기에는 역시 이 곳이 안성맞춤이었다. 알데라 평원 근처 삼림에, 그것도 이 둘과 함께 가 보는 것은 도제 시절 훈련을 함께 빼먹었던 날 이후 처음이었다.
웃자란 덩굴과 화초들이 발에 밟히며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늘상 착용하던 갑주 대신 편안한 로브 차림으로 걸음을 옮기던 네스티르는 그 주변의 지나치게… 친밀하고 애정 어린 분위기에 의아함을 느꼈다. 의문은 곧 불안으로 바뀌었다.
숲 곳곳에 둘씩, 혹은 가족 단위로 단란하게 짝지어 걷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그 중 몇몇은 새로이 임명된 법무관을 알아보고 간단한 목례를 올렸다. 그와 함께 있는 두 명의 기사에게도 잠깐 시선이 머문 것은 덤이었다.
제 어깨에 둘러진 팔에 절로 시선이 갔다. 그제야 네스티르에게 어이없는 깨달음이 닥쳐왔다.
아니 그러니까 이 사람아!
왜 하필 우리가! 자네의! 영혼 형제 행세를 해야 하는 겐가! 한 단어 한 단어에 강세를 두었다. 초록의 날인가 뭔가 하는 전통이, 각자에게 누구보다 소중한 ‘연인’들과 만끽하는 날이었을 줄이야. 네스티르는 이백 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기사단 쪽 혈통을, 그리고 이 친구(들)과 알게 된 것 자체를 후회했다. 도제 시절 말이라도 섞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니 애초부터 기사단 입단을 포기하고 심판관의 길이나 갔어야 했다…
자네가 예전에 소개했던 그 형제는 어디 두고…? 네스티르의 어이와 영혼이 함께 날아갔다.
헤어졌네. 법무관 임관 얼마 전에. 피닉스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러면 그 전의 그 자매와는…? 막역지우의 연애사에는 그닥 관심을 두지 않던 태사다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한 지 몇 주기쯤 되었네. 그 자와도 ‘초록의 날’을 함께했던 적이 있었지. 이번에도 대답은 막힘없었다.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자네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겐가 하는 태사다르의 뜨악한 시선은 덤이었다.
무슨 말인가! 친우와 연인은 종이 한 장 차이일세! 당당하게 뜻을 전달해온 피닉스가 얼굴에 철판 한 겹을 더 깔았다. 잔 생각 말고 얼른 팔짱이나 끼게나!
종이 한 장 차이라니, 세상에 그렇게 두꺼운 종이가 있을 리가 있겠냐마는. 그는 저와 같은 생각인 듯한 태사다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대로 붙어다니다가는 오해를 살 것이 분명했다. 아 신들이시여…….
‘초록의 날’ 이후 네스티르는 당분간 제가 온갖 소문의 중심이 될 것이라 예상했으며, 실제로도 그 예상은 들어맞았다. 평소 그토록 과묵하던 동료 기사들이,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부터 질문 세례를 퍼부어댄 것이다. 거기 왜 간 거요? 부터, 그 둘과 무슨 사이요? 를 넘어, 누구 제안이었소? 까지.
법무관님과 무슨 사이십니까? 제 스승님과는요!? 짤막한 휴가 이후 성지에 복귀한 그에게 아르타니스가 가장 먼저 던진 질문 또한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했다. 어쭈, 이 당돌한 애송이 좀 보게나. 백오십 살을 갓 넘긴 수련생 치곤 거침없었다.
친우다. 그는 거짓 하나 없이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했다.
그의 아킬래 부관은 그 말을 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몇 시간 동안 줄곧 팔짱까지 끼고 다니셨다면서요. 실망입니다. 뚱한 톤의 대답이 날아왔다.
친우라니깐!? 진지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이제껏 숨겨오셨던 겁니까!? 허나 저 젊은 친구 또한 자신 못지않게 진지한 모양이었다. 네스티르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여간 설명할 게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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