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바탕 망자와의 전투를 끝내고서 전투 중 발견한 민간인을 안전한 곳까지 데리고 가서 민간인이 무사히 돌아가는 것을 보며 나름의 보람을 느끼던 카리나는 근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깨닫고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몸을 조금 비틀면서 찾고 있으니 희미하게 남색과 회색이 보여 천천히 다가갔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걷고 있으니 모습도 더욱 선명하고 확실하게 보이게 된다. 남색은 소녀가 정말 싫어하는 소녀, 제레 발레리였고 회색은 그 제레 발레리와 언제나 함께 있는 소녀, 브로냐 자이칙이었다. 하필이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보게 된 카리나는 표정을 한껏 찌푸렸다. 아니 천명의 적인 네겐트로피 소속인 둘이 왜 여기에 있는 건가, 불쾌하기도 하고 수상하기도 해, 두 사람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제레는 목에 무언가 판을 걸치고서 힘껏 두 팔을 펼치고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브로냐는 영문을 몰라 하는 표정을 짓다가 연락을 받고서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제레에게 슬슬 돌아가자는 말을 남기고서 그대로 뒤를 돌아 떠났다. 제레는 크게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 모습을 그대로 보고서 카리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건 뭐야?”
별 이상한 걸 다 보겠다며 카리나가 그대로 본부로 복귀하기 위해 발길을 옮기려던 그때였다. 카리나의 근처에서 확실하게 카리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카리나가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던 제레가 지금은 카리나의 바로 앞에 있었다.
“윽, 왜 네가 있는 거야?”
“그건 제레가 하고 싶은 말이야. 왜 카리나가 여기에 있는 거야?”
귀여운 얼굴이 한껏 짜증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카리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 너랑 다르게 사람을 구하는 발키리라서 말이야, 그러니까 신경 꺼.”
하지만 어쩐지 시선이 제레에게 향하고 만다. 정확하게는 제레의 목에 걸린 판, 그리고 판에 적힌 글자가 신경 쓰였다. 그 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free hug! - Only Bronya].
"이 뭔...“
그것을 보며 카리나의 머릿속에 대강 두 사람, 아니 제레에게 일어난 일이 그려진다. 뻔할 뻔자이긴 했다. 열심히 브로냐에게 어프로치를 가하기 위해 저런 것까지 만들어서 안아달라고 외쳐도 브로냐가 그 뜻을 전혀 모르고서 그대로 무시하고 만 것이겠지. 그래서 지금 제레가 저렇게 기분이 안 좋은 것이고.
“그런데 왜 안아달라고 하는 거야?”
영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간간히 제레의 옆을 지나쳤을 때 브로냐 언니에게 안기고 싶다는 느낌의 발언을 들은 적은 있었다. 그래도 카리나의 머리로는 영 이해도 안 가고 생각도 잘 안 났다. 아니 내가 왜 알고 싶다고 생각해야 해? 라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제레는 그런 카리나를 무시하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말 이런 거에는 둔하구나. 오늘은 허그데이라구.”
“...뭔 데이?”
“허그데이! 오늘은 연인끼리 서로 안아주는 날이야.”
그 말에 카리나가 그런 날도 있었냐며 의문을 품으면서도 대강 납득을 한다. 그래서 브로냐에게 안아달라고 했던 거구나. 딱히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근데 너 연인 없잖아.”
“윽...! 아, 아니야!”
정곡을 찌른 것 같았다. 제레가 속상한 듯 불쾌한 듯 잘 모를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면서 카리나를 노려본다. 카리나도 질 수 없다는 것처럼 힘껏 노려보다가 문득 누군가의 시선을 느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웬 가게의 문 앞에서 어떤 남성이 두 사람을 똑바로 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무, 뭐야... 저 사람...?”
“제레도 모르겠는데...”
제레와 카리나가 떨떠름하게 조금씩 떨어지며 남성이 오는 것을 바라본다. 남성은 다가오면서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들 혹시 커플인가?”
동시에 제레와 카리나의 표정이 한껏 구겨졌다. 두 사람이 아니 저 아저씨도 참 할 말하고 하면 안 되는 말이 있는 것도 모르냐며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으니 남성이 두 사람이 있는 바로 앞까지 와 말했다.
“우리 가게에서 허그데이를 기념해서 허그를 하고서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크게 외치는 커플에게 선물을 주고 있는데 말이야, 자네들 관심 없나?”
“아니 저기요, 저희는...”
“...선물이 뭐예요?”
서로 싫어하는데 뭔 커플이야, 커플은... 그렇게 말하려고 하는 카리나의 말을 그대로 가로막으며 제레가 묻는다. 아무래도 제레는 선물 쪽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카리나가 짜증을 그대로 표정으로 드러내면서 한숨을 쉬었다. 선물이 뭔가요? 제레를 따라하듯 카리나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남성은 잘 질문했다는 것처럼 당당하게, 하지만 흥분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듣고 놀라지 말게나. 무려 한정판 호무 인형이라네! 게다가 세트로 호미 인형도 주는데 말이야! 이것 보게, 이, 이, 목도리랑 모자를 쓴 게 얼마나 귀여운가!”
남성의 설명에 카리나와 제레가 동시에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둘의 시선이 호무와 호미 인형에 꽂혀서는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어머! 저건 가져야 해, 그런 생각이 카리나의 머릿속에서, 저걸 브로냐 언니에게 준다면 브로냐 언니는 제레에게, 그런 생각이 제레의 머릿속에서 강하게 박히며 튼튼하게 묶였다. 이 순간 카리나와 제레의 의견은 일치했다.
카리나가 굳은 결의를 품으며 두 팔을 벌렸다. 마치 율자라도 상대하는 것 같은 기백을 품고 있었다. 제레 또한 비슷한 모습으로 목에 건 판을 벗어 던지고서 그대로 카리나에게 달려가 안겼다. 제레와 카리나가 정말 싫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딱 몇 분 간만 우리는 연인이야, 알겠어?”
“제레는 브로냐 언니 거지만 어쩔 수 없지... 이것도 다 브로냐 언니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서... 주기 위해서...”
서로 짧은 대화를 나눈 제레와 카리나가 남성을 부른다. 남성이 밝은 모습으로 말했다.
“오, 한 번 해보겠는가?”
“물론이죠. 천명의 발키리가 이 정도로 굴복할 리가 없잖아요!”
“제레도 브로냐 언니의 정예부대 일원으로서 이 정도 쯤은...!”
“......어, 자네들 무슨 소릴 하는 겐가...? 아, 아니지... 기백이 아주 좋군! 마음에 들었어! 그럼 모처럼이니 여기서 하는 걸로 하세!”
남성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카리나와 제레가 동시에 한숨 섞인 호흡을 한다. 저 그야말로 완벽한 상품을 얻기 위해 두 사람은 마치 거대 붕괴수와 마주한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달랜다. 단 몇 초, 실제로는 짧지만 두 사람에게 있어서 영원 같던 시간을 넘기며 두 사람은 배에 힘껏 힘을 주면서 소리 질렀다.
“제레! 사... 사아아아... ......에이, 사랑한다아아아아아!!!”
“제, 제...레도... 으으..., 사랑해애애애애애!!!”
울부짖음에 가까운, 혹은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였지만 남성에게는 그야말로 열렬한 고백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남성이 시원하게 웃으며 잠깐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가게 쪽으로 떠났다. 격렬한 전투를 끝낸 것처럼 크게 헐떡이던 카리나와 제레는 이대로 상대를 힘껏 밀어서 그대로 벗어나고 싶은 욕구를 꾹꾹 참으며 서로를 안는 팔에 힘을 가득 주고 있었다.
아저씨 대체 언제 오시는 거예요. 이대로라면 땅바닥에 머리 박고서 기절할 거 같아요. 슬슬 분노 섞인 울음이 두 사람의 정신에 한 방울 씩 떨어져 부서지던 때, 남성이 양손에 인형을 들고서 제레와 카리나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아이고, 미안하네. 오래 기다렸는가?”
“그야 다, 아, 아뇨, 아니에, 요...”
“제, ...제레는, 괜찮, 아요...”
“허허, 그거 다행이로군. 자, 인형들 받게나. 이야, 오랜만에 이렇게나 기백 있는 커플을 보게 되는구먼!”
남성이 두 손에 든 인형을 드니, 제레와 카리나가 기다렸다는 듯 두 팔을 풀고서 인형을 하나 씩 들어 그대로 껴안았다. 제레가 호미 인형, 카리나가 호무 인형이었다. 남성은 인형을 가진 것을 확인하고서 좋은 사랑을 하라는 욕설, 아니 덕담을 남기며 그대로 자신의 가게로 돌아갔다.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제레가 힐끗 호무 인형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제레가 호무를 가질래.”
“...왜?”
“브로냐 언니가 호무를 좋아하는걸. 그리고 카리나가 제레에게 호미 인형을 줘.”
“넌 아무리 봐도 호미가 아니라 호오잖아.”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빈정거리는 카리나의 말에 제레가 크게 화를 낸다. 애초에 카리나 자신도 인형을 가지고 싶어서 그 굴욕을 견뎌낸 것이었다. 달라고 해서 줄 수는 없었다. 달라고 하는 사람이 제레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그러했다. 하지만 제레의 고집을 알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카리나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럼 내 호무 인형하고 네 호미 인형하고 바꿔.”
“제레는 브로냐 언니에게 호무랑 호미를 주고 싶으니까 싫어.”
“아, 진짜...”
카리나가 제레의 고집에 크게 짜증을 낸다. 결국 카리나가 짜증을 못 이기고서 냅다 검을 뽑으며 외쳤다.
“그렇게 둘 다 가지고 싶으면 날 이기던가!”
카리나의 말에 제레가 기다렸다는 듯이 낫을 꺼내며 살기등등하게 말했다. “그렇게 하자구.”
“뭐 하는 거야?”
이번엔 또 누구인가, 제레와 카리나가 짜증 섞인 모습으로 고개를 돌리니 만화책을 든 장신의 여성, 히메코가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크게 놀라며 히메코 앞에서 무기를 대강 뒤로 숨기니 히메코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싸울 거면 여기서 하지 말고 딴 곳에서 하는 게 어때? 여기 시가지잖니.”
“그, 그렇군요... 히메코 소령님...”
“그리고 그렇게 싸우고 싶으면 나중에 나랑 한 판 할래? 오늘은 어울려줄게.”
“아, 아닙니다...”
떨떠름하게 상사의 말에 답하는 카리나의 살짝 뒤에서 제레가 그런 카리나를 비웃는다. 카리나가 그런 제레를 흘겨보면서 제레에게 다가가 제레의 손에 든 호미 인형을 빼앗듯이 가지고 가면서 자신이 들고 있던 호무 인형을 던지며 제레에게 넘겼다. 그리곤 도망치는 모양새로 그대로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을 히메코가 보며 제레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니?”
제레가 자신의 손에 들린 호무 인형을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브로냐 언니에게 선물 하나 주고 싶어서 싫어하는 사람하고 서로 안으며 사랑 고백을 했다는 소리는 곧 죽어도 할 수는 없었다. 분명 이건 카리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니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겠지, 아니 알아서는 안 된다. 특히 브로냐 언니와 신에게는. 제레가 고개를 저으며 히메코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힘겹게 카리나가 본부로 돌아와서 자신의 방에 호미 인형을 놓았을 때, 카리나는 이상하게 호미 인형을 똑바로 볼 수가 없는 나머지 그대로 장롱 구석에 인형을 쑤셔 박고 말았다. 하필이면 그 ‘제레’와 헛짓,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얻은 것이라 볼 때마다 그때의 자신의 행동이 생각이 나,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제레 또한 기지로 돌아왔을 때 브로냐가 웬 호무 인형이냐며 관심을 보이는 것을 어찌 얼버무리지도 못하고서 그대로 자신의 방에 돌아와 호무 인형을 집어 던지고 말았다. 분명 브로냐에게 주기 위해 구한 것일 텐데도 그 방법이 너무 생각만 해도 부끄러운지라 당당하게 줄 수가 없었다. 제레는 그것이 너무나도 억울했다.
그것은 12월 14일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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