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 후
스티브 로저스 x 이서연
“자네가 여기 남아줬으면 좋겠네.”
여기란 어딘가요? 당신 옆? 이 나라? 이 차원? 내뱉지 못한 단어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새파란 시선에 닿은 모든 곳에서 열이 날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은 시나리오에 없었다. 캡틴 아메리카, 미국의 이상향, 국가 그자체. 그가 자신에게 고백하는 일 따위 일어나서는 안 됐다.
“지금 당장 대답해 달라는 건 아닐세.”
나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굽힌 무릎에 시선을 고정했다. 눈을 보면 안 돼. 눈을 보면..... 뺨에 커다란 손이 닿았다. 조심스럽게 닿은 손은 내 뺨을 감쌌다. 나는 결국 고개를 올리고 한겨울 호수만큼이나 맑은 두 눈을 마주했다. 억세 같은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숨결이 닿을 거리가 좁혀지고 이마에 부드럽고 말캉거리는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리고 기다리겠다는 말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멀어져가는 등 뒤로 내 세상이 발밑부터 꺼져가고 있었다.
‘나’는 누굴까. 세상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일까. 누구나 한 번쯤 해볼 만한 생각만이 들었다. 원래 ‘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고, 세상의 위기를 좌지우지할 능력도 인맥도 없었다. 그때의 내 가치 판단이란 하등 내 도덕적 관념과 세계관에 비롯되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팔씨름으로 토르를 가볍게 이겨버리는 지금은? 지금의 ‘나’는 어벤저스였고 차원이동능력자였다. 요주 인물, 영웅, 감시 대상, 이능력자, 괴물. 미디어 속에서나 볼법한 말들이 이제는 나를 지목하고 있었다. 나는 무엇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가. 공교롭게도 나는 이 답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세계를 나는 모니터 너머로 지켜봤었다. 모니터 안에서 죽어가던 그 수많은 이들, 그들을 죽인 이들을 나는 모두 알고 있었다. 어떤 영웅도 어떤 괴물도 쉽게 죽을 수 있는 세상이었다. 나는 평화로운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따라서 내 생존전략은 간단했다. 모르쇠로 일관하기. 속여야 할 대상이 훈련받은 쉴드 요원인 건 두려웠지만 내가 아는 중요 인물들은 만날 수 없었기에 티가 날 정도로 연기해야 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죽지 않기 위해 계속 움직였다.
그랬을 뿐이었는데.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잘못된 건지 육하원칙으로 나열해보시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잘 지내보자고 악수했을 때부터? 아니면 사회적응 하라면서 나타샤가 같이 외출하는 걸 권했을 때부터? 같이 아침마다 조깅 나갈 때부터였나? 의심하기 시작하니 밑도 끝도 없이 나락으로만 떨어졌다. 나는 우리가 친구인 줄 알았는데 라니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자신 있었으니까. 내가 아는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는 페기 카터 이후로 그 대상이 다른 카터가 될 때까지 연애의 ‘연’ 자도 생각 못 하는 인물이었는데?
“힉!”
어깨를 감싸오는 손길에 앉은 채로 껑충 뛰어올랐다. 옆엔 나보다 더 눈을 크게 뜬 냇이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채로 앉아 있었다. 퀸젯에는 쥐구멍 없겠지? 와장창하고 뛰어내릴까.
“무슨 일 있어? 몇 번이나 불렀는데.”
친절한 냇은 달래듯이 어깨를 쓸어줬다. 민망함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져서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가로저었다. 이게 다 스티브 로저스 때문이다! 망할 얼음과자 같은 게 사람 심란하게 타이밍을 잡아도 그런 타이밍을 잡느냐고! 한가한 때였으면 혼자 반성의 시간도 좀 가지고 사색도 하고 냇이랑 카페 가서 신나게 물고 뜯고 즐기고 했을 텐데 바로 임무를 왔더니 이러고 있잖아. 얼굴을 조금이라도 식혀보기 위해 뺨 위에 손을 얹었다. 얼굴이 얼마나 뜨거워졌는지 땀이 밴 손이 그나마 나은 지경이다. 역시 바다에 한 번 빠져서 식히는 게 좋지 않았을까.
“끝나면 얘기할까?”
“네..... 끝나면,”
출발할 때는 푸르던 창밖이 깜깜했다. 냇의 지시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후방 게이트 앞에 섰다. 게이트가 열리고, 차가운 바람이 퀸젯 안으로 쏟아졌다. 허벅지에 찬 총을 더듬었다. 차갑고 딱딱한 게 바깥 풍경이랑 판박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가야지. 집중하자. 냇의 목소리를 신호로 우리는 어둠 속에 뛰어들었다.
임무는 순조로워 보였다. 별 마찰 없이 인질들을 찾았을 때는 탄성마저 나올 것 같았다. 이제야 이 칙칙한 곳을 벗어나겠네. 겁에 질린 얼굴들을 보며 나는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구출이라는 말에 갇힌 사람은 언제나 협조적이기 마련이라 나는 손쉽게 사람들 손목에 둘려있던 쇠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었다. 내가 맨손으로 쇠사슬을 끊어 낼 때마다 사람들은 감탄사를 내뱉거나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훑었다. 여기까지는 익숙했다.
“남편이 저기에 갇혀있어요!”
인질 하나가 사슬을 끊자마자 매달리듯이 호소했다. 험한 시간을 보냈는지 얼굴 한쪽에 찢어진 상처가 있었다. 인질을 달랜 뒤 철제 문 앞에 다가가자 도와달라는 굵은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부분 부분이 녹슨 문에 두꺼운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자 여러분, 이것이 바로 만능열쇠입니다. 자물쇠 양 끝은 잡고 힘을 주자 초콜릿처럼 쉽게 두 개로 쪼개졌다.
자물쇠를 옆으로 던져놓고 문을 열자 190cm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사슬에 묶여 있었다. 다른 인질들보다 더 안 좋은 대우를 받았음이 분명한 상처들이 눈에 띄었다. 사슬을 끊어버리고 걸을 수 있겠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지탱한 채로 문밖에서 입을 손으로 감싼 채 바라보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역광으로 그늘진 그녀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그녀의 표정이 이상했다.
휙 하는 바람 소리가 귀를 때리고 문이 시야에서 멀어졌다. 남자는 나를 방 가운데로 밀쳐내고 뛰어나갔다. 그가 문을 나서자마자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천장에서 유리 벽이 내려와 나를 둘러쌌다. 장난쳐? 유리를 내리쳤다. 유리에도 내 손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놀라기도 전에 멀쩡하던 바닥에 구멍이 쩍 벌어졌다. 나를 감싼 유리통이 빨려 들어가듯이 구멍으로 흡수됐고 나는 유리통 천장에 쏠려 구겨졌다. 유리 감옥을 빨아들인 통로는 곧 더 넓고 어두운 곳으로 나를 뱉어냈다. 바닷속으로. 이거 실화냐.
유리 감옥은 짙은 아가리 속으로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늦든 빠르든 감옥은 박살 날 것이다. 내가 부수던지, 수압으로 콜라 캔처럼 구겨지던지. 나는 머리 위로 손을 올리고 단단히 마주 잡았다. 오늘은 아니야.
여섯 번 정도 내리찍고 나서야 감옥 안에 바닷물이 밀려왔다. 나는 숨을 제대로 들이쉬지도 못하고 물에 잠겼다. 두 번을 더 주먹으로 내리치고 나서야 나갈만한 구멍이 만들어져서 몸을 뺄 수 있었다. 망설일 틈 없이 가라앉는 유리 감옥에서 올라오는 거품을 따라 헤엄쳤다. 거지 같은 기지는 지하에 있었으니 여기가 수심 몇 m 정도 일지 알 수 없었다. 길어야 3분이라는 재수 없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고, 눈이 빠질 것 같았다. 몸에 힘이 점점 빠졌다. 더 가야 하는데. 눈앞이 점점 흐려져 먼빛이 어른어른 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대답할걸. 그 미련한 사람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미안하게. 눈이 감겼다.
죽으면 나는 꼭 지옥에 갈 거로 생각했다. 엄마가 말한 대로 이때까지 내가 남긴 음식을 전부 말아서 주는 그런 지옥에는 내 이름이 쓰여 있는 의자가 있어서 악마가 나를 앉히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세상에는 이런 종류의 기적도 있나 보다. 물소리가 멈추고 딱딱한 바닥에 발이 닿았기에 마침내 내가 저승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지옥이 이렇게 밝던가? 눈을 뜨자 바닷물이 흘렀다. 뿌연 시야 넘어 풍경이 너무 밝은 나머지 나는 눈이 시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떴다. 그러면서 숨을 들이쉬었다. 공기가 달다. 착각이 아니라면 여기는 천국이구나. 장하다, 나 새끼. 어벤저스 노릇 열심히 하길 잘했지. 눈이 익숙해질 무렵 코끝에 익숙한 냄새가 걸렸다. 왜 천국에서 병원 냄새가 나지?
스티브 그랜트 로저스 / 110
지금 이 풍경이 내가 죽어서 온 천국의 모습이 아니라 기도에 물이 들어가서 질식하는 과정에 보는 환상이라면 내 상상력은 굉장히 빈곤하다는 뜻이겠지? 눈을 깜빡거려 보아도 문에 쓰여 있는 글자는 그대로였다. 음 빈곤하긴 해도 꽤 확고하네, 꿈은 안 이렇던데. 손을 뻗어 종이가 끼워진 투명한 아크릴판을 위에 갖다 댔다. 딱딱하고 차가운 판 아래에 끼워진 종이에 새겨진 이름만이 낯설지 않았다.
“이서연.”
고개를 돌리는 사이에 부르는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상대의 얼굴을 보고 그 생각마저 얼어붙고 말았다. 나였다. 망할 병원 복도에 서서 나를 부른 건 나였다.
혼란스러운 내 머릿속과 반대로 병실은 고요와 창을 타고 들어온 노을만이 너울거렸다. 뒤에서 서연(또 다른 내 얘기다)이 문 닫는 소리가 크게 느껴 질만큼.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장치들이 하나뿐인 침대를 둘러싸고 규칙적인 기계음과 함께 화면에는 선이 일정하게 그려지는 모습이 익숙했다. 그럼에도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 때문에 이 모든 장면이 이질적이었다.
“지금은 자고 있을 거야.”
서연은 태평하게 종이가방에 든 물건들을 냉장고에 정리하며 말했다. 다정하기도 하고 일상적인 그 목소리에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왜 이 모든 게 괜찮다는 식으로 말하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환자를 깨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마 소리칠 수 없었다. 내가 서연을 노려보자 그녀는 작은 휴대용 의자 하나를 꺼내놓고 손짓했다. 기계음이 몇 번 더 울린 후에 나는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줄까.”
“지금 몇 년도에요?”
“그것보다 내가 이 쪽 세상에 온지 몇 년이나 지났는지가 더 정확하지 않을까?”
“여기 온지 얼마나 지났어요?”
“12년째야.”
익숙하게 전기 포트에 물을 올려놓고 종이컵을 꺼내 드는 또 다른 나를 보면서 현기증을 느꼈다. 휘청하고 몸이 크게 앞으로 기울었지만,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10년 후? 다른 우주의 미래? 나의 미래? 죽을 위기에 발동한 능력이 나를 밀어놓은 우주가 하필 이곳이었다. 12년 후에도 이 우주에 남아 스티브 로저스의 병실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서연이 있는 미래. 포트가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서연은 내게 차를 쥐여 준 후에 어깨에 수건을 둘러주었다. 그제야 내가 바닷물에 푹 젖었다가 말라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올라오는 차 김 속에 바다 짠 내가 간간히 섞여 올라왔다. 슬쩍 옆에 있는 침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단단하고 투박해 보이기만 하던 손이 야윈 채로 하얀 시트 위에 얌전히 놓여있었고 옷 위로 보기에도 가늘어 보이는 팔을 따라가면 핼쑥한 얼굴이 보였다. 주름진 얼굴 위 드리워진 백발에 가까워진 금발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차마 계속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김 때문에 다시 눈앞이 흐려졌다.
“무슨 일이 있었죠?”
“시빌워는 알지?”
“알아요.”
다른 우주의 나는 처음으로 지쳐 보였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하려고 했던 것 같지만 나는 그녀의 눈썹이 힘없이 처지는 것을 보았다.
“캡틴 아메리카가 그렇게 떠나고 미국도, UN도 그걸 좋아하지 않았지. 우리를 떠난 짐승을 어떻게 하려고 하겠어?”
서연은 쓰게 웃었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4월 3일, 아직 날짜도 기억나. 그날도 세상을 구하고 사람들을 구하고 있었어. 하이드라 잔당들을 붙잡고 있었는데 어떤 놈이 폭탄을 던졌어. 시민들 사이로. 스티브는 그걸 잡아서 강으로 던져버렸어. 다행히 아무도 다친 사람은 없었지. 단 한명. 캡틴 아메리카 본인 빼고 말이야.”
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스티브 로저스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가다 한걸음 정도를 남겨 놓고 멈춰 섰다.
“그날 임무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스티브는 쓰러졌어. 폭탄을 쥐었던 손에 무언가 주사 됐었던 거야. 검사결과는 정말 끔찍했지. 스티브는 전에 앓던 병들을 차례로 얻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게 뭘 뜻하는지 알았어.”
서연은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쏟아지는 말들이 차가운 사슬 같았다.
“현대 의학으로 치료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지만, 문제는 수퍼 솔저 혈청이 보인 반응이었어. 스티브의 몸은 그냥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니었어. 온몸의 세포들이 그의 진짜 나이를 따라잡으려고 하고 있었거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에서 한 발짝. 그녀는 내게 돌아섰다.
“그래서 그때 잡았던 놈들을 심문했고 뒤를 캐고 뻔한 일들을 신속하게 진행했지. 우린 모두 절박했거든. 그렇게 알아낸 배후가 어디였다고 생각해?”
이건 질문이 아니었다. 서연은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몸을 숙여 나와 눈을 맞췄다.
“미 정부였어.”
그럼에도, 그 모든 조건 속에서도 그는 캡틴 아메리카였으니까. 자유와 약자를 보호하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 수류탄을 향해 가벼운 몸을 던지던 사람. 그는 언제나 그럴 준비가 되어있었기에 기꺼이 행했고, 그를 향한 모든 불명예가 벗겨지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도 그는 죽어가고 있었고, 마침내 그들이 자유로워졌을 때 그는 병실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수건으로 벅벅 닦아낸 눈가가 아렸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수건을 가져가면서 서연은 내게 다시 따뜻하게 데워진 차를 내밀었다. 노을의 빈자리를 병실 가득 흐릿한 스탠드 빛만이 채우고 있었다. 우느라 메인 목 안으로 차를 들이붓고 나서야 나는 입을 뗄 수 있었다.
“왜 떠나지 않았어요.”
원망이었다. 갈데없는 슬픔이 형태를 만들고 앞에 있을 뿐인 상대를 찌르는 말이었다. 스티브는 왜 캡틴 아메리카여서, 당신은 왜 차원이동능력자여서, 나는 왜 여기로 와서..... 그중 하나 일 뿐이었다.
“몰라서 묻는 거 아니지?”
내리깔고 있던 고개를 올리자 서연은 미소 짓고 있었다.
“사랑하니까.”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였다. 알고 있었다. 그게 다라는 걸. 그가 날 사랑하듯이 나도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 우리의 우주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더라도 상관없었다.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되면 나로 하여금 그를 떠나지 않을 거란 걸,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가 움직이지 않길 바랐을 뿐이었다.
“이제 갈 시간이야.”
침대에서 이불 스치는 소리가 나자 서연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어디로? 라는 질문을 하려는 사이에 그녀는 나를 껴안았다. 괜찮을 거야. 그녀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리고는 나를 밀쳤다. 멀어지는 그녀의 어깨너머로 푸른빛을 얼핏 보였다가 점멸하는 풍경과 함께 사라졌다.
기적적으로 내가 다시 나타난 곳이 우리가 타고 온 퀸젯 안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바다 한가운데 떨어졌고, 내게 달려있던 위치 추적기 덕분에 금방 구출되었다. 두 시간 동안 사라진 내 추적기 반응은 바다로 내가 사출 당했을 때 생긴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 오류라는 보고로 마무리되었다. 보고 내용은 전적으로 냇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대접할 요리 리스트를 만들어 두었다.
의례적으로 하는 검사들을 마치고 돌아오는 복도 끝에서 두리번거리는 스티브를 발견했을 때 아주 잠깐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날 발견하고 눈이 마주치자 그런 저항조차 무의미 해졌지만. 그 두 눈에는 수심이 가득해서, 빠른 걸음으로 가까워져 오는 커다란 사내를 나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곧장 내 앞에 섰고 나는 바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타샤에게 들었네. 사고가 있었다고 하던데.”
“큰 문제는 없대요.”
평소라면 장난스럽게 할 말을 형식적으로 내뱉었다. 바닥 무늬를 열심히 탐구하던 고개를 들자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살펴보는 스티브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자기가 내 이마에 입 맞췄다는 사실을 나만 기억하고 있나 봐. 혼자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연애 안 해본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궁상인지. 수줍음에 맥없이 흔들리는 결심을 붙잡았다.
“스티브, 나 할 말 있어요.”
장소를 공원으로 옮겼다. 탁 트인 시야로 잔잔한 호수와 그 너머 숲이 들어왔다. 오전의 따사로운 햇볕이 호수 표면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서 누군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나는 천근만근 같은 입술을 열었다.
“10년 후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잘 모르겠네.”
“나도 없는데, 이번에 보고 왔어요.”
내 말에 스티브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구태여 확인하지 않았다. 그는 내 말을 끊지 않았고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호수에 오리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스티브는 많이 아팠어요. 병실에 누워있었고. 나는 그런 스티브를 간호하고 있었어요.”
오리들이 호수에 미끄러지듯 착지했다. 오리 울음소리가 적막한 호수 위에 울렸다. 무릎에 얹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줄곧 돌아가고 싶었어요. 죽는 것도 무서웠고, 내가 괜히 당신들 이야기를 망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 광경을 봤을 때 너무 무섭고 슬펐어요. 도망치고 싶었죠.”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 폈다. 나는 시선을 호수에서 내 발로 옮겼다. 울음이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근데 10년 후의 내가 뭐라고 한 줄 알아요? 괜찮데요. 그 모든 게 괜찮데요.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도 괜찮데요.”
나는 울음과 함께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줄곧 두려워했던 것들이 어떤 식으로 나를 덮쳐 올 줄 알면서도 털어놓았다.
“그래서 돌아왔어요.”
고개를 돌려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그가 뻗고 있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스티브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나는 눈을 감았다. 언젠가 그랬듯이 이마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고맙네.”
스티브는 다른 한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을 뜨고 푸른 눈을 보았다. 10년 후 점멸하는 풍경 속에 두고 온 다정한 푸른색. 다시는 두고 갈수 없었다. 나는 양손을 뻗어 스티브의 뒷목을 감쌌다. 그를 부드럽게 당기자 이번에는 그가 눈을 감았다. 우리는 입을 맞췄다. 이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