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엔은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어머니와 함께 쓰는 침대에서 내려갔다.
창밖은 아직 어둡고, 바깥도 조용하다. 도대체 몇 시이기에 다들 자는 걸까. 어둠속에서 더듬더듬 시계를 찾은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도 그걸 곧바로 믿을 수 없었다.
오전 5시 30분. 아침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
“…왜 이렇게 일찍 깬 거지?”
특별히 어제 일찍 잔 것도 아닌데, 이상하기도 하지. 하지만 깊게 생각할 정도의 일은 아니다. 평소보다 빠른 기상에 대해 고민도 하지 않고 기지개를 편 그녀는 먼저 가게를 정리해놓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어차피 일은 점심시간이 가까워 져야 시작하겠지만, 미리 이것저것 청소해 놓으면 분명 외할아버지도 기뻐하겠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며 자신을 말리는 외할머니도, 분명 속으로는 기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콧노래를 부르며 2층 주거공간에서 1층 주점으로 내려온 루엔은 빗자루부터 찾으려다가 문 밖을 서성이는 그림자에 멈춰 섰다.
‘이 시간에 손님?’
아침부터 손님이 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식사도 가능하긴 하지만 일단 여기는 ‘주점’ 이었으니까. 물론 밤늦게까지 마시고 또 마시러오는 주정뱅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밖에 서있는 사람의 흔들림 없는 자세를 보아하니 딱히 취한 것 같지도 않았다.
“…누구세요?”
결국 신경이 쓰인 루엔은 문을 열지는 않고 그 앞에 서서 신원을 물었다. 혹시 카르텔이라면 어른을 깨우는 편이 좋을 테니까. 함부로 문을 열어줄 순 없었다.
“아, 있었나?”
“네. 있긴 하지만 우리 가게는 11시부터 문 열거든요! 나중에 다시 와요!”
“그냥 잠깐 들어가서 물 한잔만 마시고 가는 건?”
뭐야. 나그네인가. 루엔은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와 대답의 내용을 듣고 단정 지었다.
“물 한잔 정도라면 되는데, 카르텔은 아니죠?”
“아닌데. 애초에 이런 시골에도 카르텔이 있냐.”
“흠…. 알았어요, 잠깐만요!”
말은 저렇게 하지만 진짜인지 아닌지 어떻게 믿겠는가. 루엔은 슬그머니 바(bar)의 안쪽으로 가 리볼버를 꺼내왔다. 아직 10대 초반의 어린아이인 그녀지만, 무법지대에서 험하게 자란 아이라면 총이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다.
수상한 짓을 한다면 쏴버려야지. 그리 결심한 루엔이 문을 조금만 열자, 붉은 코트차림의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와.”
“…?”
키 크다. 게다가 미남이네.
카르텔이면 공격하겠다는 생각은 저 멀리 사라지고 만 루엔은 낮선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리 오래 산 건 아니지만, 이렇게 까지 잘생긴 남자는 처음 본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더라도 얼굴만 보면 왜 화난 건지 잊어버릴 것 같은 잘생김이라고 할까. 자신도 모르게 경계심이 사라진 루엔이 문을 활짝 열었다.
“아침 먹었어요?”
“아니.”
“먹고 갈래요?! 스튜밖에 없지만!!”
“아니, 됐으니 물만….”
“일단 들어와서 결정해요, 자 자!”
‘이 녀석, 지금 내 얼굴 보고 이러는 거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자그마한 손에 이끌려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자, 여기 앉아있어요! 아, 다들 자니까 조용히 하셔야 해요?”
“네 쪽이 더 소란스러운 거 같지만?”
“윽, 난 괜찮아요. 이 집 딸이니까. 어쨌든 기다려요!”
분명 손님이 아침은 됐다고 했지만, 루엔은 가장 먼저 어제 저녁 미리 만들어놓은 스튜부터 데웠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잘생겼으니 뭐라도 더 대접하고 싶다는 단순한 호의일 뿐. 그녀는 원래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다 잘해주는 소녀가 아니었지만 미남에겐 약했다. 아니, 누구라도 저 정도 미남이라면 마음이 약해질 것이다. 루엔은 따뜻한 스튜를 그릇에 담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자, 여기요! 물도 가져왔어요!”
“…아침은 됐다니까?”
“줄 때 먹어요. 돈 주고도 못 먹는 우리 엄마 스튜니까! 얼마나 맛있는데.”
“아 그래?”
‘어렸을 때도 똑같네.’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린 남자는 얌전히 스푼을 들었다. 뜨겁지도 않은지 후후 불지도 않고 스튜를 입으로 가져가는 남자의 표정은 나쁘지 않다. 분명 스튜가 마음에 든 거라고, 루엔은 자부할 수 있었다.
“어디서 왔어요? 여기 사람 아니죠?”
“10년 후에서.”
“네?”
“10년 후에서 왔다고. 넌 안 믿겠지만.”
당연히 안 믿지. 아무리 제가 어린애라 해도 저런 거짓말을 믿을 만큼 어수룩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미남이 하는 말이라면 믿는 척이라도 해주고 싶어진다. 그러니 루엔은 속아주듯 남자의 말에 동의해 주었다.
“그거 굉장하네요. 10년 후 무법지대는 어때요? 카르텔은 많나요?”
“득실득실하지. 뭐 그래도 최악까진 아니지만.”
“그래요? 헤에, 아. 당신 이름은 뭐예요?”
“데스페라도. 그것보다….”
몇 번 정도 스튜를 떠먹은 그는 수저를 놓고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서있지 말고 여기 앉지 그래. 루엔.”
“…응?”
“앉으라고. 에소루엔 로시스 양.”
이상하다. 이건 진짜 이상한 일이다. 아침 일찍 손님이 오거나, 알람 없이 새벽에 깬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이상한 일이다. 루엔은 이름을 불리고 나서야, 비로소 이 남자가 정말로 미래에서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제 이름은 알아내는 건 힘든 일이 아니었다. 주점 주인의 외손녀로서 가게 일을 자주 도와주는 자신은 마을 안에선 누구나 얼굴 한번 쯤 보았을 사람이었고, 그만큼 이름도 쉽게 들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애칭인 ‘루엔’에 한정한 이야기. 에소루엔 로시스라는 긴 이름을 알아낼 방법은, 가족들에게 추궁하는 방법뿐일 텐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아냐,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이네. 뭐 당연한가. 다들 루엔이라고 부를 테니. 여기서는.”
“여기서는, 이라뇨?”
“10년 뒤에는 풀네임으로 불리는 일이 더 많아질 거야. 여러 의미로 굉장한 일만 저지르고 다니거든. 네가.”
“…10년 후의 나랑 아는 사이에요?”
미래의 자신은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걸까. 카르텔이 되는 게 아니라면 뭐든 괜찮지만, 이런 미남이랑 아는 사이라니. 부럽기 그지없다.
라고 생각할 때.
“아는 사이고말고. 네 애인인데.”
“……”
저 말을 들은 루엔은, 순식간에 미래의 자신이 더없이 존경스럽게 느껴지고 말았다.
“정말요?”
“그래. 그냥 애인도 아니고 몇 년씩 동거하고 있는 애인.”
“진짜에요?! 미래의 나 능력자네, 이런 미남이랑 사귀고!”
“…….”
데스페라도는 그녀의 반응에 황당하다는 듯 한숨 쉬었다. 하지만 루엔은 이미 눈앞의 낯선 미남이 미래에서 왔고, 심지어 제 애인이 될 상대라는 것에 흥분해서 한숨소리 같은 것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미래의 난 어때요? 여기 찾아온 것도 미래의 내가 그러라고 했어요?”
그의 옆에 냉큼 앉은 루엔은 번쩍번쩍 빛나는 두 눈을 감추지 않았다. 표정부터 눈빛까지, 온통 흥미로 가득 차있어 눈이 부시다. 데스페라도는 그게 우스운지 소리 죽여 웃고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하나씩 물어. 일단… 뭐, 미래의 넌 지금이랑 별로 다를 거 없어. 성격이나 외모나.”
“그래요?”
“그래. 총 실력은 아마 미래의 네가 백배쯤은 좋겠지만.”
별 다를 게 없다는 건 칭찬인지 욕인지 애매하다. 하지만 총 실력 하나 만큼은 확실히 칭찬이니 전자도 칭찬일 것이다. 긍정적이게 생각하기로 한 루엔은 코 밑을 문질러 쑥스러움을 감췄다.
“그리고…, 여기 온 건 내가 알아서 온 거야. 미래의 네가 가끔 여기 데려와 줬으니까. 장모님이랑 인사도 했고. 어르신들도 다 건강하고….”
띄엄띄엄 말을 이어가던 데스페라도는 밝아져 오는 바깥을 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곧 해가 뜰 거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는 하늘이었다.
“미안한데, 난 이만 가야겠네.”
“에?! 벌써?”
“벌써, 라고 할까…. 난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네가 안으로 들인 거다만.”
“으으으, 그래도 아쉬운데…!”
출입문으로 향하는 그의 뒤를 졸졸 뒤따르는 루엔은 어떻게든 그를 더 잡아보고 싶어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자신은 아직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그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다. 그는 자신을 잘 알겠지만, 자신은 그에 대한 건 아무것도 모르니까.
“걱정 마. 지금으로부터 한 5년 뒤엔 싫어도 날 실컷 보게 될 테니까.”
초조해하는 루엔의 머리를 쓰다듬은 데스페라도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5년. 말이야 쉽지, 5년이라는 세월은 길다. 특히 자신 같은 어린아이에겐, 더더욱.
“…그럼, 5년 뒤에 보는 거야!”
“아아. 그래. 잘 있어라. 루엔.”
달칵. 문이 닫히기 무섭게 데스페라도는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사라졌다. 등장도 그렇지만, 퇴장도 심각하게 조용한 사람이다. 기척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게 문 앞에 서있던 루엔은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일찍 일어난 후폭풍이, 뒤늦게 밀려온 탓이었다.
“졸려….”
이상한 일 뿐인 새벽이었으니 지칠 만도 하다. 대접했던 그릇을 치우지도 않고 위로 올라간 그녀는 아직 잠든 어머니 옆에 누워 이불을 끌어올렸다. ‘데스페라도 라고 했지.’ 혹시나 잊어버릴까 싶어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되뇐 루엔은 스르륵 잠들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