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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닐스가 3차 아르덴 회전에서 행방불명된 후, 황도군에 의해 발견되기 일주일 전 무렵 일어난 사건이었다.

 

카르텔의 침공으로 수도 겐트가 불바다가 되고, 이윽고 황녀가 납치당하자 황도군의 사기는 무서울 정도로 떨어졌다. 이대로 모두 죽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소리를 하는 병사부터, 지금이라도 카르텔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병사까지. 승리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만 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엘레나는 제 소꿉친구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슬퍼하기도 힘들었다.

 

‘정말 안 돌아 오는 건가, 그 바보는.’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저런 생각 밖에 나질 않는다. 만약 평화로운 일상 중 닐스가 사라졌다면, 자신은 아마 잔뜩 울고 잔뜩 화낸 후 무법지대로 가버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은 전쟁 중. 당장 같은 부대의 동료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마당에, 그에 대한 일까지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는가.

물론 자신도 사람이니, 처음 실종 소식을 들었을 때는 눈물도 보이고 당황도 했다. 하지만 그 슬픔은 겨우 일주일도 가지 못해서, 엘레나는 자신과 그를 이렇게 만든 전쟁이 그저 원망스럽기만 했다.

역시 얼른 전쟁을 끝내기 위해선 겐트수비대인 자신들이 열심히 해야 한다. 엘레나는 의지를 다지기 위해 중화기를 손질하려다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수비대의 병사 때문에 총기를 놓칠 뻔 했다.

 

“발렌슈타인 씨!”

“…네?”

“대장님이 찾으십니다. 얼른 가 보시는 게….”

 

대장님이라 하면 분명 젤딘을 이야기 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녀가 지금 자신을 찾을 이유는 별로 없을 텐데. 자신은 우수한 병사라고 자부 할 수 있지만 일개 병사일 뿐. 명령할 게 있다면 그냥 말만 전했을 텐데, 굳이 찾아오라고 할 이유가 있나?

 

“알겠습니다. 늘 계시는 곳으로 가면 될까요?”

“네. 빨리 가보세요. 빨리.”

“?”

 

뭘 저렇게 재촉하는가. 그녀는 괜히 불안해져 평소보다 훨씬 빠른 걸음으로 막사를 빠져나왔다. 신에게 맹세컨대, 자신은 사고를 쳤거나 비리를 저지른 기억이 없다. 자신만큼 상사 말 잘 듣고 훈련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도 불안함이 엄습하는 것은, 역시 자신을 부르러 온 병사의 얼굴이 너무나도 이상했기 때문이겠지.

 

‘뭐라고 할까, 마치 보면 안 될 거라도 본 사람의 얼굴이었지.’

 

충격. 혼란. 의문. 그런 것들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표정은 도무지 잊을 수가 없다. 누구라도 그런 얼굴을 보면 제가 저지르지 않은 실수도 생각나겠지.

 

“대장, 저 왔어요.”

“아. 엘레나 양.”

 

아. 다행이 별 일 아닌가 보다. 적어도 젤딘의 표정은 심각하지 않으니 말이다.

긴장이 풀린 엘레나는 어깨에 힘을 빼고 한숨을 내뱉었다. 역시 제가 괜한 걱정을 한 거다. 잘못한 게 없는데, 뭘 걱정한 걸까.

 

“무슨 일인가요?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세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만…. 사실 오늘 순찰 나갔던 병사가 미아를 데려왔는데, 엘레나 양을 아는 건지 자꾸 불러달라고 해서 말이죠.”

“네? 미아요?”

 

예상치도 못했던 이유에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미아, 라는 건 곧 아이라는 거겠지.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아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 특히 고향도 아닌 겐트의 아이라면 제가 알 길이 어디 있겠는가.

 

“몇 살짜리 아인가요?”

“8살이라고 합니다.”

“8살이면 저보다 10살이나 어리잖아요? 어떻게 절 아는….”

 

황당하다는 듯 말하던 그녀는 젤딘 뒤에서 불쑥 나타난 자그마한 그림자에 입을 닫았다.

지금 제가, 뭘 본거지?

‘말도 안 돼.’ 작게 중얼거린 엘레나가 제 뺨을 꼬집었다. 아아. 이거라면 확실히 아까 그 병사의 표정도 이해가 간다. 아마도 자신도 지금, 그런 얼굴을 하고 있을 테니까.

 

“엘레나, 찾았다!”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는 그 소년은, 분명 몇 달 전 실종되었던 자신의 소꿉친구. 닐스였다.

 

 

 

 

 

“그러니까, 술래잡기를 하다 보니 전혀 모르는 동네에 와있었다는 거야?”

“응. 엘레나가 술래였거든. 필사적으로 도망갔는데, 정신차려보니 여기였어.”

 

뭐 그런 판타지 소설 같은 이야기가 일을 수 있나. 엘레나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제 무릎위에 앉아 사탕을 먹는 어린 닐스를 보고 입을 닫았다. 이미 일어난 일을 바보취급 해봐야 바보가 되는 건 본인이다. 하지만 꿈도 아니고 환각도 아닌데, 10년 전 제 소꿉친구가 이 시대에 나타난 걸 바로 납득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녀는 의심스럽단 눈초리로 소년에게 물었다.

 

“진짜 닐스 맞지?”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엘레나, 왜 이렇게 커진 거야? 어른 같네. 엘레나 맞지?”

“난 어릴 때랑 거의 안 변해서 의심하는 게 더 이상… 아, 너도 마찬가지이긴 하지. 음.”

 

잠깐 고민하던 그녀는 슬쩍 닐스의 손을 잡아보았다. 따뜻하고 작은 손에는 여기저기 굳은살이 박혀있다. 황도의 중산층 어린아이의 손이라기엔 너무 거칠지만, 어릴 때부터 옆집 런처들의 중화기로 사격연습을 한 닐스였으니 그녀에겐 이 손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래, 옛날부터 이런 손이었지. 별로 대단한 증거도 아닌데 의심이 누그러든 엘레나는 제 인식표를 내밀었다.

 

“자. 봐. 이름, 생일, 혈액형. 다 같지?”

“정말이다…! 어, 그러면 지금 엘레나, 몇 살이야?”

“18살.”

“진짜?! 나, 10년 후로 온 거야?!”

“믿기지 않겠지만, 그런 거겠지?”

 

‘우와!’ 두 눈을 빛내며 자신의 인식표를 살피는 미소가 눈부시다. 그 웃는 얼굴에 문득 지금의 닐스가 실종되었단 사실이 다시 떠오른 엘레나는 제 표정을 감추기 위해 마른세수를 해야 했다.

 

“그런데 엘레나, 군인이야?”

“응? 응. 수비대 런처가 됐어.”

“어릴 땐 안 한다고 했잖아? 어, 잠깐? 그럼 미래의 나도 군인이야?”

“아니 넌 아니고…. 나만.”

 

사정을 다 이야기 해주긴 곤란하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어린 아이에게 미래에 황도가 엉망이 된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잠깐 고민한 엘레나는 최소한의 정보만을 닐스에게 전해주기로 했다.

 

“넌 무법지대로 갔어. 실력을 스스로 시험해보고 싶다나 뭐라나 하면서.”

“우와, 나 꽤 강해졌나보네!”

“지금의 너 보다야.”

 

장난스럽게 웃은 그녀는 닐스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겐트 구경이라도 시켜주고 싶지만, 전쟁 중인 지금 그럴 여유는 없지. 지금 생각하면 무사히 병사들에게 발견 된 것도 행운이라 생각된다. 어디서 총이라도 맞았다면 이런 감동적인 만남은 존재하지도 않았겠지.

 

“배는 안 고파? 건빵 먹을래? 아님 초코파이.”

“초코파이로 줘!”

“그래, 일단 우리 막사로 가자. 손잡고.”

 

어릴 땐 주로 손을 잡고 온 마을을 싸돌아다니곤 했지. 옛 추억이 떠오른 걸까. 그녀는 어린 닐스에게 슬쩍 손바닥을 내보였다. 으음. 제 손을 지그시 노려보던 닐스는 자그마한 손을 올리는 대신 고개를 기울였다.

 

“…꼭 어른같이 행동하네, 엘레나.”

“응? 아니, 그거야 어른이니까.”

“기분 이상해. 내가 아는 엘레나가 아닌 거 같아.”

“그래? 싫어? 손잡지 말까?”

“아, 아니 그런 의미는 아냐…!!”

 

당황해서 후다닥 손을 잡은 닐스는 엘레나에게 얼른 앞장서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아아. 역시 어릴 때는 귀여웠는데, 왜 지금은 사고만치는 밉상이 된 걸까. 그녀의 입에서 무거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응? 왜 한숨 쉬는 거야?”

“아냐 아무것도….”

 

일단은 지금 나타난 이 어린 닐스라도 잘 돌봐야지. 대리만족이라 할지 몰라도, 자신은 소꿉친구이자 연장자로서 어린 그를 잘 보호했다가 과거로 돌려보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왕이면 지금 시간대의 닐스도 나타나 주면 좋을 텐데.

어리광 같은 소망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그녀가 마주잡은 손을 꽉 쥐었다.

 

“그럼 엘레나, 18살의 나하고도 계속 친하게 지내고 있는 거야?”

“그래. 뭐 얼굴 못 본지 좀 됐지만. 난 입대했고…, 넌 무법지대로 가고….”

“외로웠어?”

“…그다지. 우린 애가 아니니까?”

 

사실은 조금 외롭지만, 그 이유를 말해 줄 수는 없으니 거짓말 할 수밖에 없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상대를 기다리는 건 아주 외로운 일이다. 차라리 죽었다는 이야기라도 듣는다면, 희망을 버릴 수라도 있을 텐데. 하필 실종이라니.

 

“…과자나 먹으러 가자. 손 놓으면 안 돼. 나까지 혼나니까 말이야. 알겠지?”

 

만약 죽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어린 닐스도, 과거로 돌아가 성장하면 똑같이 실종되는 걸까.

복잡한 마음을 애써 감추는 그녀의 얼굴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저기, 엘레나. 혹시 18살의 나는 죽은 거야?”

 

8살의 닐스가 그렇게 질문한 건 그가 발견된 지 4일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누가 그래?”

“군인들이? 나보고 죽어서 다시 돌아온 거라고 그러더라고.”

 

아아. 잘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누구에게 들은 걸까. 엘레나는 잠깐 인상을 찌푸렸지만 애써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거짓말은 늘 거짓말을 부를 뿐이니, 차라리 솔직하게 현실을 말하는 게 나았다.

 

“죽긴 무슨. 실종이야. 실종.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

“결국 어떻게 된 건지 모른다는 거구나?”

“…그건, 그렇지.”

 

‘흐음’ 미래의 자신이 행방불명이라는 걸 들은 것 치고 닐스는 상당히 무덤덤해보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무표정한 건 아니었지만, 그다지 충격 받지 않은 얼굴이라 할까. 그냥 오늘 간식은 뭘까 고민하는 어린아이의 얼굴로 침묵을 유지하던 그가, 대뜸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엘레나, 화내고 있겠지? 내가 사라져서.”

“응?”

“나랑 동갑인 엘레나 말이야. 술래잡기 하다가 사라졌으니까, 엄청 놀랐을 거야. 지금 엘레나도 18살인 내가 사라져서 싫지?”

 

그거야 좋을 리 없지. 하지만 이 감정은 단순히 싫다는 말로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대답을 망설이던 그녀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엘레나는 솔직해서 좋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꼬맹이가.”

“쳇. 내가 아는 엘레나는 나랑 동갑이니 꼬맹이 아냐.”

“네, 네. 그래서 궁금증은 풀렸어? 죽은 거 아니니 걱정 마. 죽긴 누가 죽어.”

 

엘레나의 말은 상대방을 달래는 것 보다는 스스로를 달래는 것 같았다. 모두가 죽었다고 해도 스스로가 살아있다고 믿으면 그런 거다. 아직 생사가 확실하지 않은 이상은, 누구도 정답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그녀의 마음이 전해진 걸까. 닐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응. 난 엘레나를 지켜줄 거니까. 안 죽을 거야.”

“…나 참.”

 

18살의 그가 했다면 조금은 낯간지러웠을지도 모르는 말이지만, 지금 이 어린 소년이 말해봤자 조금도 설레지 않는다. 물론 8살의 자신이라면 잔뜩 부끄러워했을지도 모르지.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 죄로 등짝도 좀 때려주고 말이다.

 

“그러니까. 미래의 나도 곧 돌아올 거야. 18살의 엘레나를 지켜주기 위해서.”

 

어린 닐스의 말은 단순한 위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변성기도 오지 않은 목소리가 무겁게 자신을 누르고, 외로운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진심을 담아 말하는 거니 이렇게 힘 있게 느껴지는 거겠지.’ 엘레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그 말의 무거움을 실감하게 된 것은, 8살 닐스가 미래의 자신에 대해 알게 된 다음날의 아침.

 

“…닐스?”

 

이제까지 늘 자신보다 늦게 일어나던 닐스가 아침부터 보이지 않는다. ‘일찍 일어나 산책이라도 갔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그녀는 가볍게 부대 내를 둘러보았지만 역시 닐스는 보이질 않는다. 뭔가 이상하다. 보초 때문에 부대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안 될 테니 이 안에 있을 텐데, 왜 보이질 않는 걸까. 몰래 나갔다면 그건 그거 나름 문제다. 자신에게도, 어린 그에게도.

 

“나갔다 와볼까….”

 

겐트의 지리를 모르는 그가 만약 부대 밖으로 나갔다면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닐스를 두 번이나 잃게 되는 셈이다. 그건 싫다. 갑자기 초조해진 그녀는 부대를 나가려다가, 익숙한 표정을 한 병사를 보고 멈춰 섰다.

 

“발, 발렌슈타인 양.”

“네?”

 

전에 자신을 부르러 온 그 병사는 며칠 전보다 더 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찾아왔다. ‘설마 닐스에게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엘레나의 얼굴에 걱정과 살기가 뒤섞였지만, 튀어나온 상대의 보고는 의외로 걱정과 반대되는 말이었다.

 

“닐스, 닐스 군을 찾았습니다.”

“…아, 그래요? 다행이다. 멀리 안 갔나 보네요.”

“아니, 그게 아니라….”

 

식은땀을 닦은 병사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다. 또 뭔가 이상한 일이라도 일어난 걸까. 예를 들어, 그래. 생후 8개월짜리 아기 닐스라도 나타났다던가?

불안을 감추기 위해 애써 장난스러운 생각을 하는 그녀의 마음을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병사는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은 그녀에게 모든 걸 알려주었다.

지금 일어난 일, 제가 이런 얼굴을 한 이유, 그리고 어제 8살의 닐스가 한 말의 의미까지. 모두.

 

“실종 된 닐스 군이 발견됐습니다. 당신과 동갑인, 레프트 스트레이트 닐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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