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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의 소이는 사내가 무심코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회춘의 비약이다. 그러므로 사내에겐 이 모든 사달을 불평불만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관조하던 코토미네 키레이가 긴 사색 끝에 갖게 된 소견이었다. 사내가 무엇 하나라도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면 결국은 네가 자초한 일이 아니냐고 한 걸음 물러선 채 비웃어줄 용의도 있었다. 역시나의 방심왕. 잠시 꺼내두었던 회춘의 비약을 여자가 시럽으로 착각해 팬케이크 위에 뿌려 먹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겠지, 라고.

 

하지만 이야기는 외도 신부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비껴나갔다. 감히 허락도 구하지 않고 짐의 것에 입을 대었냐며 몹시 노한 얼굴로 화증을 내려던 사내가 어려진 몸으로는 차마 땅에 발이 닿지 않아 교회의 장의자에서 다리만 허공에서 붕붕대던 아이를 보는 순간 할 말을 잃은 듯 침묵하다 왕님, 부르는 목소리에 그래, 하고 차분한 대답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사내는 조심스레 팔을 뻗는 아이를 안아들어 산책이라도 다녀오마, 짧은 전언을 남겨놓곤 그대로 키레이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코토미네 키레이는 의외의 전개에 짐짓 의아한 눈동자를 했지만 이제까지 사내의 행적을 뒤쫓아 보면 그가 어린 아이에게는 답지 않게 퍽 상냥했었다는 사실들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그제서야 고개도 끄덕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군. 나지막한 목소리도 함께였다. 예상과는 다른 시작이긴 했지만 좌우간 지켜보는 즐거움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후유키 시 유일의 신부는 짐짓 점잖은 체를 떨며 이후의 이야기도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그 곁에서, 텅 빈 채로 남겨진 유리 약통만이 드리우는 햇빛에 반짝였을 따름이었다.

 

 

 

 

 

* * * * *

 

 

 

 

 

잡종. 어린 나이에 그 단어에 담긴 묘한 뜻을 알 턱이 없었으나 아이에게는 이미 사내의 곁에서 배워 버릇한 눈치, 혹은 육감이라는 것이 있었다. 습관적으로 그 말을 입에 올리던 사내는 제가 그렇게 지칭할 때마다 품 안의 ─그 말은 듣는 이의 기분을 해치며 누군가에게 있어서 적대적 의미로 비추어질 여지가 있으니 최대한 삼가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어휘력의 부족으로 인해 미지근한 폭력 밖에는 행사할 수 없었던─ 아이가 작은 손으로 입술 언저리를 꼬집는 것에 어찌 반응해야 하는지, 마땅한 도리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회춘의 비약의 힘을 빌려 어려졌다고 한들 본질은 사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어떤 여자의 것이다. 그 모습을 떠올리면 덮어놓고 노호성을 토해낼까 싶다가도 나름대로 엄한 얼굴을 가장하며 아프지도 않게 볼을 꼬집는, 영락없는 어린 아이의 겉모습을 보면 또 분노는 눈 녹듯이 사그라들고 말았다.

 

“잡종.”

 

찰싹. 이번에는 작은 손바닥이 입술을 때렸다. 이젠 화조차 나질 않았다. 대신 비식비식 새어나오는 웃음만 읊조리던 사내는 팔에 힘을 주어 아이를 더욱 견고히 끌어안았다.

 

평소의 그녀에게선 볼 수 없었던 그 나름대로의 새로운 면모를 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높은 곳을 무서워 해 제가 슬쩍 팔에 힘을 푸는 척만 해도 달라붙어 온다든가 투정부리는 일 없이 곧잘 혼자 삭여내곤 했던 감정들, 이를테면 사내가 홀로 마실을 나가려고 할 때 저도 데리고 나가달라 피력하는 외로움이라든가 조금 더 진솔한 마음으로 같은 크기의 감정을 되돌려 달라고 바라는 이기심까지도 아이는 내비춰 온다. 어린 마음은 주체라는 것을 몰랐고 자중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 효력이 끝나는 날 다시 보게 될 여자의 얼굴이 이 짧은 순간 동안 어린 그녀가 저질러 두었던 사고 아닌 사고를 되뇌며 어떤 표정을 할지 가늠해 보는 것도 사뭇 즐거울 따름이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아마도 그녀는 후회할 것이다. 몇 날 며칠이고 성당 교회 근처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고, 사내의 기척이 느껴진다 싶으면 당장에라도 도망가버릴 뒷모습을 그는 마치 미리 내다보기라도 한듯이 그려낼 수 있었다. 하지만 후회는 온전히 여자의 몫으로 남겨두겠다는 듯 아이는 그저 산책 가고 싶어요, 나갈래요, 칭얼대며 옷자락을 잡아당길 따름이었다. 사내는 마지 못해 웃고선 교외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이 어린 낯은, 언제나처럼 불가항력을 지니고 있었다.

 

 

 

 

 

* * * * *

 

 

 

 

 

손을 뻗어오면 그것을 붙잡고, 손을 내밀면 그것을 붙드는 일상이었다. 다만 그런 나날이었다.

 

 

 

 

 

* * * * *

 

 

 

 

 

아이는 잠이 많았다. 한 손에 꼭 쥐고 있던 간식거리를 툭 떨구고,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빈틈없이 여며두던 팔이 어느 순간 허술하게 풀어지며 작은 몸이 기우뚱대는 것을 보고 있자면 이렇게 될 때까지 어딘가에 뉘여주지 않은 제 자신이 어떤 극의 몰매 맞을 악역이라도 된 기분을 느낄 정도로 극단적이다.

 

이 정도라면, 병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겠군. 사내는 나지막히 짧은 말한다. 하지만 품 안에서 부비작대는 온기를 만끽하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이는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때에도 방식만 다르다 뿐이지, 엇비슷한 빈도로 수면욕을 호소하곤 했으니 이상할 것은 없었다. 도리어 이 모습은 귀엽게까지도 봐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이런 마음을 사내가 겉으로 표현해 보이는 일은 천지가 뒤집혀도 없을 테지만.

 

성당 교회의 유일한 실권자인 신부 코토미네 키레이나 그런 코토미네 키레이에게 성심성의껏 번견으로서의 의무를 지움받고 있는 푸른 창병이 보았다면 질겁하리만치 유한 손길이 아이의 등을 쓸어내렸다. 곤한 숨결. 무심결에 제 옷깃을 쥐어오는 손. 아이다움을 피력하는 아직 채 여물지 못한 총명함 같은 것들. 와닿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사내의 걸음걸이에 맞추어 품 안의 고개가 대롱거렸다. 그는 남은 한 손으로 그 목덜미를 끌어당겨 제 가슴팍에 기대게 했다. 야트막한 숨소리가 새근대며 온기를 피력한다. 만약 쥔다면 손가락 사이로 그 잔상을 엮어낼 수도 있을 것만 같이, 분명하게.

 

곁에 있음을 무엇보다도 확실히 느끼지만 기이하게도 사내는 그 투명한 숨소리 속에서 짧은 고별의 징조를 보았다. 손을 저으며 작별 인사를 건네는 아이의 얼굴. 그리고는 총총 걸어가 버리던 뒷모습. 그건 모두 모든 미래를 넘나드는 눈동자의 탓이었다. 허나 직감 이후로도, 시선만은 여상스리울만치 담담하게 모든 것을 담아냈다. 비록 검은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손길엔 평소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고 해도.

 

굳건한 마디마디 사이로 모든 것이 미끄러져 간다. 이런 것이 다만, 시기상조일 리 없었다. 사내는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잡종.”

 

웅, 하는 잠에 취한 목소리가 아래로부터 들려온다. 제 자켓 끄트머리를 잡은 채 졸던 아이의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저번처럼 잡종이라는 호칭에 짜증내지 않는 것을 보면 얕은 의식 속에서 무던히도 수마와 사투를 벌이는 모양이었다. 사내는 그 고군분투하는 작은 낯을 멀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지금의 것보다 훨씬 순해보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설은 것. 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 무엇보다 익숙해진 것.

 

그리고 사내에게는 모든 것이 되돌아가기 전에 분명 물어보아야 할 것, 혹은 물어봐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어린 것에게는 성글기만 한 일상 속에서 사내는 아이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그것은 남들에게는 이해를 살 수 없는 상냥함일 수도 있고, 아이에게 확인받고자 하는 욕망일 수도 있다. 또는 인간의 감정만을 손꼽아 즐기는 사내기에 그 대답이 알고 싶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결국 모든 것은 아이의 대답에 달려 있는 것이었으므로.

 

부르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 사내는 더이상의 지체없이 묻고자 했다.

 

“즐거웠어요.”

 

“…….”

 

즐거웠느냐, 고.

 

묻기도 전에 돌아온 대답. 그것은 나뭇잎 사이를 스치며 제 존재를 부각하는 바람의 웃음 소리도 아니었고 제 시간의 도래를 알리는 밤벌레의 울음 소리도 아니었으며, 이제는 저 너머로 저문 태양이 마지막으로 보내는 작별 인사의 울림도 아니었다. 앳된 목소리. 소녀에게서 들려온 것이어야만 하는 것.

 

사내는 머지 않아 제 손을 붙잡아 오는 작은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검지 손가락 하나를 쥐기 위해 다섯 손가락 모두를 써야 하는 조그만 손이었다. 제 손가락을 접는 사소한 행위에도 바스라질 것만 같은 무딤. 유약하고, 유하고, 무르다. 이토록 어여쁘고 이토록 직설적인 온기를, 지금까지 사내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졸고 있으면서도 그 손가락만은 꼭 부여잡아 오는 강건함에 사내는 마지 못해 웃는 것처럼 웃기로 했다.

 

즐거웠다면 그걸로 되었다. 그뿐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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