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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지 않은 경치에 블래스터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리가 낯설었다. 손님을 불러 모으는 상인들의 목소리와 흥정하는 모험가들의 목소리,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웃는 소리가 활기차게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부딪힐 것을 염려해 거리의 중앙에서 물러나, 한쪽 벽에 등을 기댔다. 자신이 모르는 곳이라는 걸 인지한 블래스터는 이곳이 겐트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여기는 어디지? 어렴풋이 시간의 문에 휩쓸렸다는 것은 기억이 나지만, 머릿속은 안개가 잔뜩 낀 것처럼 흐릿해서 잘 기억나지 않았다. 혹시나 해 건드려본 통신기에서는 지직-거리는 잡음만 들릴 뿐, 연결이 되지는 않았다. 결국,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혼자 앓고 있어 봤자, 달라지는 건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블래스터는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대충 둘러본 것뿐이지만 활기차고 평화로워 보이는 곳이니, 특별히 위협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어느 시간대인지 정도는 경계심 없이 물어볼 수 있으리라.

 

 

“실례합니다.”

“어라, 손님? 손님인가?”

 

잡화상 앞에 햇빛을 받으며 노곤하게 늘어져 있던 청년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머리 색이 유독 눈에 띄었다. 선한 인상의 청년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해사하게 웃었다.

 

“저, 뭔가 사려는 건 아니고 여기가…”

“하이디! 허니! 손님이에요!”

 

아무래도 부부가 함께하는 잡화상점인 모양이다. 상점의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민 청년의 입에서 애정 가득한 호칭이 나오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굉장히 사이좋은 부부인가 보지. 실제로 저런 호칭을 쓰는 부부가 있구나. 블래스터는 그저 여기가 어디인지 물어보려 했을 뿐인데, 손님이라고 착각한 듯한 청년에 조금 난감해졌다. 어쩐다.

 

“조금만 기다려요, 잘생긴 총각! 하이디가 조금 바쁜 모양이네.”

“아뇨, 저는 길을…”

“자기야~!”

 

저 사람 혹시 일부러 저러는 건가. 청년은 절묘하게 말을 끊으며 자기 할 말만 하고 이곳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자신의 아내를 데리러 가게로 들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블래스터는 말을 잃었다. 저 자신도 꽤 마이페이스라고 생각했는데 자신보다 더한 사람이 있을 줄이야. 아주 잠깐, 겨우 한두 마디 나눠봤지만 블래스터는 말로 저 사람을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말이 통해야 승부라도 해볼 텐데 저 사람, 말이 안 통할 것 같거든. 그냥 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블래스터는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잡화상의 주인분과는 말이 통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저 때문에 들어갔는데 그걸 두고 가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아빠, 손님을 밖에 그냥 두고 오면 어떡해.”

“미안합니다.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부부가 아니라, 가족 단위였나? 문 안쪽에서 두런두런 들리는 목소리 중 하나는 어린 여자아이의 것이었다. 그것도 조금 익숙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만 들어보면 아직 어린아이일 것 같은데, 대화 내용이 어째 어린아이가 어른을 혼내는 것 같다. 조금 유쾌한 기분이 들어 입꼬리를 끌어올리던 그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나오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응? 어라?

 

“손님, 뭔가 찾으시는 거라도 있나요?”

“…”

“손님?”

 

의아해하는 여자아이의 얼굴이 익숙하다. 나를 볼 때 가끔 저런 표정을 지었지. 제가 알고 있는 이보다 더 작고 어린 아이이지만, 외모며 목소리며 짓는 표정까지 하나하나가 굉장히 닮아있었다. 때문에 블래스터는 뒤통수라도 한 대 맞은 것 같은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꼬마 아가씨, 이름이 뭐야?”

“네?”

“이름.”

“남한테 이름을 물어보기 전에 자기 이름부터 밝히는 거라고 그랬어요!”

 

당돌하게 고개를 들고 소리를 높이는 아이의 모습에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블래스터의 허리까지도 닿지 않을 작은 아이가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하는 말에 순간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 따님 멋있어!!”

 

아, 물론 블래스터가 아니라 아이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 얼굴 한가득 함박웃음을 지은 청년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분위기를 퐁퐁 피워내며 한참 작은 아이를 안아 올렸다. 앞에 사람이 있다는 걸 잊어버린 건지, ‘그건 누가 가르쳐준 거예요?’, ‘엄마가요!’ 따위의 이야기를 하며 청년과 아이는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손님 이름은 뭐예요? 그럼 내 이름도 알려줄게요!”

 

청년의 한쪽 팔에 안겨있던 작은 아이는 블래스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빠른 분위기 전환을 따라가지 못해 잠시 말을 잃었던 블래스터는 갑작스레 제게 던져진 물음에 눈을 깜박였다. 아이의 볼에 제 볼을 비비던 청년도 그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저렇게 얼굴을 나란히 두니, 눈매며 전체적인 인상이 퍽 닮았다.

 

“블래스터…인데.”

“블래스터 씨?”

“그냥 블래스터면 돼. 이제 꼬마 아가씨 이름, 물어봐도 돼?”

 

혹시나, 혹시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작게 미소 지으며 묻는 블래스터의 모습에 아이도 따라 웃으며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리베예요. 그리고 이쪽은 아빠인 타르윈 씨.”

 

혹시나 했지만. 블래스터는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렇구나. 리베는 아빠랑 똑 닮았네.”

“그렇죠? 아빠는 키가 무지 크니까, 나중에 나도 아빠만큼 크게 자랄 거예요!”

 

블래스터의 말에 리베는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린아이라 그런가, 표정이 다양하다. 감정을 숨기는 것 없이 제 기쁨을 표현하는 아이의 모습에 그는 조금 씁쓸히 웃었다. 어릴 때 모습 그대로 자란 것 같은데, 지금이랑은 확실히 다르구나. 지금은 웃는 모습도 보기 힘든데. 최근에 성인이 된 그녀를 떠올리며 블래스터는 이곳이 과거의 시간대임을 유추해냈다. 시간의 문은 무슨 생각으로 저를 이런 곳에 떨어뜨려 놓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 연인의 어린 시절을 만나게 해줘서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확실히 리베의 부친인 타르윈은 블래스터와 비슷할 정도로 키가 컸다. 아, 아버지 쪽이 겐트 출신이라고 했던가. 그가 저와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해낸 블래스터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그와 리베를 번갈아 보았다.

어쩌지, 리베야… 나중에도 저렇게 많이 크진 못했던데…

잠시 다른 생각에 빠지려던 블래스터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깜박였다. 제 아버지와 볼을 비비고 있던 리베는 조금 뭉개진 얼굴로 블래스터에게 물었다.

 

“그런데, 손님은 뭐가 필요해요? 포션?”

“응? 아, 아니. 나는 길을 좀 물어보고 싶어서 온 거였는데… 타르윈 씨가 갑자기 안으로 들어가셔서 말을 못 했네.”

“아빠가 나빴네. 음… 잠시만요. 지도 가지고 나올게요.”

 

리베의 말에 타르윈은 안고 있던 제 딸을 바닥 가까이 내려주었다. 아빠, 손님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요. 지도를 가지러 가게로 들어가기 전, 꾸중하는 것처럼 제 허리에 척하니 손을 얹은 리베의 말에 타르윈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응. 다음부터 조심할게. 응응. 타르윈의 손을 제 작은 손으로 토닥여준 리베는 지도를 가지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 작은 뒤통수가 문 뒤로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블래스터는 대뜸 제 앞으로 내밀어지는 까만 머리통에 주춤 한발 뒤로 물러났다.

 

“블래스터라고 했나?”

“예? 예…”

“아깐 못 물어봤던 건데, 황도군이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지? 옷을 보아하니, 낮은 계급도 아닌 것 같은데.”

 

너무 오랜만에 봐서 긴가민가했는데, 한참 보다 보니까 생각이 나네. 웃으며 묻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아무런 경계심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처럼 퍽 선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 블래스터는 조금 난감하게 웃었다.

 

“타르윈 씨도 천계 사람이었군요. 혹시나 했는데.”

“음. 그렇지! 아라드 사람들은 천계만큼 크지는 않으니까. 그래, 무려 천계의 군인이 여기까지는 어떻게 온 건가?”

“음… 어쩌다 보니…”

“…헉, 혹시 자네, 탈영을…?”

“예?!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기겁하며 손사래를 치는 블래스터의 모습에 타르윈은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순진하구만. 당연히 농담이지~ 따위의 실없는 소리를 하며 그는 블래스터의 등을 두드렸다. 하하.. 어쩐지 피곤해진 느낌에 블래스터는 어색하게 그를 따라 웃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휘두르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한참을 낄낄대며 웃던 타르윈은 지도를 가지고 나오던 리베와 눈이 마주치고는 예의 그 헤실거리는 얼굴로 돌아왔다.

 

“지도 가져왔어요. 블래스터는 어디로 갈 거예요?”

“으음… 지도를 봐도 모르는 곳들뿐이라…”

“블래스터는 어른인데도 지도를 못 보나요?”

“응? 아니, 그건 아닌데.”

“따님, 블래스터가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아빠가 알지요~”

 

지도를 펼쳐보고 있던 리베는 제 손에서 빠져나가는 지도를 보느라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제 뒤에 서 있던 타르윈의 다리에 가볍게 머리를 박은 리베는 저도 보여달라며 지도로 손을 뻗었다. 물론 그 손이 지도에 닿지는 못했지만. 타르윈은 가게의 벽을 받침대 삼아, 한 손으로 지도를 고정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뒷주머니에 넣어둔 펜을 꺼내 들었다. 입으로 펜의 뚜껑을 연 그는 지도에 큼직하게 한 지역에 표시해두곤 이것저것 슥슥 써 내려 갔다.

 

“여기, 가서 지도에 써준 걸 보여주면 자네를 도와줄 거야. 아마 그쪽에서도 널 보자마자 먼저 말을 걸 것 같지만.”

“그렇습니까.”

 

타르윈이 건네주는 지도에 시선을 둔 블래스터는 그가 써놓은 글씨를 대충 눈으로 훑었다. 헨돈마이어. 아라드에는 어떻게 온 것이냐 물었을 때 얼버무린 것을 혼자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지도에는 짤막하게 그를 도와주라는 내용이 쓰여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상황에서 이런 간단한 조력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블래스터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자, 타르윈이 됐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서로 돕고 사는 거지. 지도는 선물이야. 정 고마우면 다음에 또 와주면 좋겠네.”

“또 오세요!”

 

웃으며 건네는 타르윈의 말에 그의 다리를 한 손으로 붙잡고 있던 리베도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아마 그가 다시 이곳을 방문할 일은 없겠지만, 그런데도 블래스터는 언제나 와 같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열심히 제게 손을 흔들어주는 부녀의 모습이 멀어지자, 블래스터는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한 사람과 제 연인의 과거를 마주한 것은 그에게 이유 모를 씁쓸함을 남겼다. 모래가 들어찬 것마냥 까끌까끌한 목 안으로 숨을 들이쉰 그는 현재의 자신의 연인이 보고 싶어 발걸음을 늦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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