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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이 있을까. 다시 만나게 되는 날에 너는 나를 사랑스럽다고 여겨 줄까. 그래서 어느 날엔 내가, 태어나길 잘했다고 말하게 되는 순간이 올까.

 

/황정은, 계속해 보겠습니다

 

 

 

며칠 간 연속으로 계속되던 일들. 그 피곤함이 누적되어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흐릿한 초점을 바로 잡고 바라본 저의 앞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베이커가의 풍경.

 

이곳이 원래 이런 곳이었나?

 

베이커 가에 왕래가 잦은 편은 아니었지만, 흐릿한 기억의 파편들에 비추는 베이커 가의 모습과 저가 지금 바라보는 베이커 가의 모습은 확연히 달랐다. 대체 무어가 다른 것이지, 싶지만 그건 또 확연히 할 수 없으니.

마음 같아서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싶었지만 일은 확실히 해 두는 것이 좋지, 라는 저의 신조에 그랑이 주머니에 있는 저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익숙한 휴대폰의 자판 음이 작게 울렸다. 아마도 여자가 입력한 것은 조직의 간부인 진의 번호. 오직 자동차가 다니는 소리만이 가득한 거리에서 긴 신호음이 여자의 귀에 퍼졌다. 평소라면 이미 받고도 남았을 터인데,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끊기지 않는 신호음에 여자의 속에서 불안이 자랄 때 즈음, 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만 같았다.

 

“진, 최근 베이커 가 쪽에 큰 공사가 있었나? 내가 이곳을 다니지 않는 동안?”

 

용건은 최대한 간단히. 여자 홀로 암묵적으로 정한 룰이었고, 남자는 그걸 따랐었다. 양 측 모두 긴 통화를 이어나갈 만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늘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전화를 끊고는 하였지. 그런데 그랑의 말에 한참이나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진? 재차 그를 다시 불러보고, 휴대폰의 화면을 다시 확인하였다. 분명 그의 번호가 맞을 터였고, 처음에 들린 목소리도 그가 맞았을 터인데. 들려오지 않는 답에 이상함을 느끼며 전화를 끊으려 하던 때였다. 전화야 뭐, 워커에게 해도 되었으니.

 

“..그랑인가?”

“뭐야, 끊을 뻔 했잖아. 왜 이렇게 답이 늦은 거야? 무슨 일 있어?”

“너는 대체 누구지?”

 

뭐? 제가 묻는 말에는 제대로 된 대답조차 하지 않으며 연신 이상한 것을 묻는 남자에 여자가 고개를 갸웃 이며 대답하였다. 그랑, 이잖아.

 

“그 곳이 어디지?”

“베이커 가에.. 5번지 정도 될 것 같은걸.”

 

여자의 말을 마지막으로 짧으면서도 무언가 이상했던 대화가 끝을 맞았다. 어디인지 물어본 것은 아마 데리러 오겠다는 것이겠지. 하는 생각에 근처의 공원에 들어가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

“찾아가서 확인해보고, 여차하면 죽여라.”

 

그랑이와의 전화를 끊자마자 진이 다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성의 낮은 목소리와 거친 입담을 뱉어내는 여성의 목소리. 아마 코른과 키얀티겠지.

아까의 전화 상대는 목소리부터 말투, 그리고 평소의 버릇까지도. 놀랍도록 저가 아는 여자와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번호까지도.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 리는 없었다. 저가 아는 여자는 분명 3년 전의 임무에서 죽었을 터인데.

 

대체 뭐야. 누가 이런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지?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연신 잘근 씹어대며 남자가 홀로 중얼거렸다. 떨리는 목소리가 남자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

코른과 키얀티는 저 멀리 보이는 그랑의 모습에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태양을 받아 더 빛나는 듯 한 불그스름한 머리와 빛나는 금빛의 눈동자. 그리고 습관처럼 매만지는 저의 넥타이. 분명 여자였다.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차다 못해 제대로 된 생각을 유지할 수 없었다.

죽었을 터인데, 저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은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그런 생각으로 몇 번이나 눈을 비비며 다시 확인해보아도 여전히 여자였다. 지독히도 싫어했지만 좋아한 여자.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수년 전의 여자처럼 가지고 있는 짧은 머리겠지.

 

“뭐야, 왜 이리 늦었어? 굼뜨다고 너희. 이래서야 날 따라잡을 수 있겠어?”

 

말투와 저흴 향해 짓는 표정 하나까지 전부 일치한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죽었던 사람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

한참이나 벙찐 채 여자를 쳐다보던 둘은 이내 여자를 데리고 진에게로 갔다. 아마 그가 판단하겠지. 애초 남자는 둘에게 판단을 맡기었지만, 도저히 둘은 여자를 판단해낼 수 없었다.

 

-

“그 때, 죽은 것이 아니었나?”

“내가 죽다니, 무슨 말이야?”

 

연신 이상한 말을 묻는 조직의 동료들의 모습에 그랑이 당황한 듯 머리를 매만지며 일일이 질문들에 답하였다. 의도는 전혀 파악하지 못하였지만. 질문들에 대충 대답하며 찾아간 곳의 끝에는, 진의 모습이.

 

“다들 왜 저래? 나보고 죽었다질 않나..”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제 목을 매만지는 여자가 남자에게 다가갔다. 여느 때처럼 남자의 머리에 입을 맞추려 하자, 진이 조용히 여자를 끌어당겨 안았다. 아마 그랑인 것을 확신한 것이겠지. 이런 사람이 아닐 터인데, 조금은 당황하면서도 약간 떨리는 남자의 몸에 그저 가만히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평소라면 진동했을 담배냄새가 나지 않았다.

 

-

다시는 말도 없이 떠나지 마라. 사라지지 마. 언제까지나 곁에 있어.

 

-

너를 떠나는 일은 없을 거야. 내가 뭐 하러 너의 곁을 떠나겠어?

 

-

어느 순간에서야, 갑자기 맞춰진 퍼즐조각에 머리가 아파왔다. 그래, 지금 이 곳은 아마 저가 원체 있었던 곳에서 수년의 시간이 지난 때. 아마 나는 죽은 것이겠지. 그렇기에 모두가 그런 반응을 보였던 걸 것이야.

말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상황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고자 눈을 감았다. 쌓인 피로가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

눈을 뜨자 앞에 보이는 것은 저의 집이었다. 분명 진의 차 안에서 잠이 들었을 터인데, 진이 데려다 놓은 것인가 하는 생각에 침대에서 일어나 간단히 샤워를 하고, 남자에게 연락을 하려 휴대폰을 들었다. 수많은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 알림이 휴대폰의 화면을 채웠다.

 

‘사장님,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요? 며칠 째 레스토랑에도 못 나오시고.’

 

이건 뭐야, 분명 레스토랑은 폐업했다고 베르무트에게 들었는데. 예전의 문자들이 갑자기 이리 몰릴 리도 없고. 의아하게 생각한 그랑이 다시 고개를 들어 앞의 달력을 확인했다. 수년 전, 정확히는 저가 원래의 있던 곳의 날짜. 당황할 틈새도 없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그곳에 있었고, 또다시 눈을 감았다 뜨니 돌아와 있었다. 아니, 돌아온 것이 맞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떨리는 마음으로 저의 레스토랑의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은 신호음 끝에 직원의 걱정스런 말들이 그랑이의 귀에 맴돌았다. 더 이상, 수년 후에 있지 않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야.

 

-

“그랑?”

 

분명 제 옆의 자리에 앉아 잠을 청하고 있었을 터인데, 어느 순간 옆을 돌아보니 다시 사라진 그랑의 모습에 진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며 그랑의 번호로 연락을 취했다.

 

[이 번호는 없는 번호로. ..]

 

여성의 기계적인 어투가 진의 귓가에 맴돌았다. 잔인하기도 하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고개를 내저으며 워커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 쪽에 그랑이가 있느냐고. ㅡ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래, 내가 잠시 꿈을 꾸었던 것인가. 헛것을 보았던 것이겠지. 현실을 부정하고자 피해 들어간 꿈.꿈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나았다. 오직 저를 탓할 수 있으니. 그렇게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꿈이라 치부하며 고개를 숙이자, 차 옆 작은 공간에 여자가 얼마 전 제게 건넨 바이올렛 한 송이가 눈에 띄었다. 꿈이 아니었다. 오로지 홀로 여자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 볼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 났다.

 

-

“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기며 네게 다가갔다. 운명은 바꿀 수 없어. 바꾼다고 하더라도,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어. 그러니까, 세상의 순리에 맞게.

 

“사랑해. 사랑했어.”

 

그토록 뱉지 않으려 했던 말도, 속으로 수만 번은 삼켰을 단어들을 내뱉었다.

미래의 슬픈 너를 웃게 해주는 것은 나 따위가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마지막으로, 네게 전하고 싶었던 말들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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