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엇갈림
벚꽃이 하늘하늘 춤을 추고, 날씨도 좋겠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날이다. 요 며칠 우중충해서 햇볕도 제대로 못 받았는데 따스한 해가 뜨니 움츠러들었던 꽃들도 제각기 화려한 색을 뽐내기 시작했다. 그래, 마치 마법 같은 날이다. 그러니 절대로 집에 틀어박혀 있으면 안 된다며 그녀는 재빨리 제 남친을 꼬드겨서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굳이 이런 날 밖에서 데이트를 안 해도 된다며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남자친구를 윽박지른 진은 샤방한 원피스를 입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길거리를 걸으면서도 예쁜 꽃에 저절로 눈이 간다. 하루 이틀만에 화악- 펴서 그런가, 봄바람에 살랑살랑 흩날리는 벚꽃 잎이 어쩐지 몽환적으로 느껴진다. 잠시 나무 아래에 서서 따뜻한 바람을 만끽하며 떨어지는 꽃잎을 구경했다. 속설로는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면 사랑을 이루어준다던데, 한번 잡아볼까? 설마 이렇게 많이 떨어지는데 하나쯤은 잡을 수 있겠지. 그리고, 진짜로 잡았다. 아싸, 가지고 있다가 잇세이한테 보여줘야지.
이렇게 완벽한 날에 데이트라니, 그녀가 항상 바라왔던 것이다. 물론 액면가로는 직장인인 남자친구는 실외 데이트보단 실내 데이트를 선호하는 것 같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녀가 좋아하는데.
하여간, 그래서 이렇게 완벽한 날 차로 이동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한 진은 결국 하이힐을 신고 걷는 걸 택했다. 그러니까, 그게 사건의 발단이었다는 것이다.
데이트 장소로 가려면 지하차도 하나를 건너야 하는데, 그 지하차도가 매우 으슥해서 도저히 혼자서는 건너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예전부터 이 지하차도에는 귀신이 나온다거나 밤 12시에 이 터널을 지나면 다른 세계에 도착한다는 괴담들이 우글우글 해서,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 얼른 잇세이한테 전화 해야지.
커플 폰케이스로 맞춘 아이폰을 꺼낸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잇세이.”
“어. 무슨 일?”
“지하차도 건너기가 무서워서.”
“무슨 애냐...”
이렇게 성질을 살살 긁는 말을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시시콜콜한 일상 얘기로 넘어가면서 그녀를 배려해주는 태도에 진의 입고리가 느슨해졌다. 게임에나 나오던 던전의 입구 같았던 지하차도도 더 이상 그녀를 위협하지는 못했다. 데이트에서 뭘 할까, 하며 재잘재잘 거리며 행복한 고민을 하는 진은 어느새 지하차도의 중반에 다다랐다. 그 전에 지하차도를 건널 때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던 핸드폰이 갑자기 지직- 거리며 잇세이의 목소리에 잡음을 섞어놓기 시작했다. 그걸 화면 건너편에도 있던 그도 느꼈는지 연신 “여보세요-”를 반복했다. 지하라서 그런가? 영 이상해진 음질에 불편했던 그녀는 이제 무서움도 한결 가셨겠다, “잇세이 내가 올라가서 전화할게~” 라는 말을 하고는 통화를 끊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전화를 끊자마자 후회했다. 터널 안에 있는 조명과 콘크리트 벽이 자아내고 있던 분위기가 너무 무서웠던 탓이다. 어딘가 으스스한 분위기를 뽐내는 터널은 정말 괴담처럼 귀신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진은 탁, 하는 작은 소음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가는 고양이처럼 반쯤 뛰고 있었다. 차로 가면 얼마 안 걸리는 이 지하차도는 오늘따라 어찌나 긴지. 다시는 이 터널을 걸어서 건널 생각은 그만 두겠다며 이를 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무사히 반대편에 도착했다.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환히 쏟아지는 빛이 반갑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반대편은, 그녀가 알던 곳과는 달랐다.
지하차도를 건너면 신축한 높은 빌딩이 빼곡하게 서있어야 하는데, 지금 마주한 이 빌딩들은 어딘가 낡아 보였다. 뭐지? 이거 지어진지 겨우 몇 개월 안 된 건데 벌써부터 떼를 탔나? 황사 섞인 비가 온 것도 아닐 텐데, 뭐야 이거. 게다가 안 그래도 낡아 빠졌던 신사는 이제 다 무너져 주변에 금줄이 쳐진 채 신축 공사를 시작 할 것이라는 안내문이 써져 있었다.
“...?”
대체. 내가 알던 곳 맞아? 저 신사는 누가 불태워버렸나 왜 저래? 왜 하루 만에 폭삭 주저앉은 거야?!
당장 어제 봤던 풍경이 180도 달라져서 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울린 핸드폰 벨소리에 멍하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너 어디야.”
“잇세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나 여기 어딘지 모르겠어어어...”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당황한 그는 대체 여기서 산지가 몇 년 짼데 길을 잃어버리냐며 역정을 내더니 주변에 보이는 걸 말해보랜다. 그래서 그녀가 대답을 하면, 그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그러더니 잠시만 기다리라며 전화를 끊었다. 눈물이 눈고리에 아롱아롱 매달려 거의 떨어질랑 말랑 할 때 그가 나타났다. 뛰어왔는지 허리를 굽힌 채 헉헉대던 마츠카와가 숨을 고르고 허리를 폈을 때, 그녀는 눈을 의심했다.
그녀의 앞에 나타난 마츠카와 잇세이는, 조금 더 키가 컸고 조금 더 성숙미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웅앵!”
“...?”
“야, 너가 이렇게 띨빵해서 얘가 보고 배우면 어떡해. 어? 정신 줄 좀 잡고 다녀. 걱정하잖아.”
숨을 가다듬자마자 잔소리를 쏟아내는 그의 품에는 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한 듯 보이는 아기가 하나 있었다. 딱 봐도 마츠카와의 주니어에요! 라고 주장하는 얼굴 속에는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숨어 있었다.
“...잇세이.”
“왜.”
“...너 애도 있었어?”
어쩐지 액면가가 엄청나더라니만...!
어딘가 핀트가 나간 감탄을 하는 그녀를 특유의 얄미운 표정으로 한심하게 쳐다봐준 마츠카와는 말했다.
“내 애 맞지만 너 애거든.”
“?! 내가 언제?”
“아니, 너가 낳고도 모르냐? 어?”
다다다 말을 쏟아내던 그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나보다. 말을 하다말고 의아하다는 듯 마츠카와가 진을 샅샅이 훑었다. 길게 늘어뜨렸던 머리는 가벼운 단발로 변해있었고, 결혼 후 항상 끼고 다니던 반지도 없다. 그렇지만 그녀다.
상황을 파악하던 그의 눈길이 진의 머리 위에 살포시 내려앉아있던 벚꽃 잎에 닿았다. 하여간 칠칠치 못하지. 이상한 건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떨어질랑 말랑, 경계에서 흔들리던 분홍색 벚꽃 잎을 떼어 냈다.
“아.”
그를 응시하는, 크게 떠진 눈동자와 살짝 벌려진 분홍빛 입술. 그리고 어디선가 많이 봤던 원피스. 마츠카와는 그 순간 느껴졌던 위화감을 깨달았다. 그래, 분명-
그리고 “어린” 이시하라 진은 사라져 있었다.
“어?”
진이 눈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 그의 앞에는 어딘가 멍해 보이는 남자친구와 마주했다. 보통 넋을 빼놓고 다니면 핀잔을 날리는 것은 마츠카와였는데, 이번엔 바뀌어버렸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그녀는 툭, 그의 팔을 쳤다.
“나 왔어.”
“어? 어어...”
오늘도 잘생긴 마츠카와의 손에 제 손을 엮은 그녀는 오늘 있었던 이상한 일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아마도, 방금 봤던 건. 조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마츠카와 잇세이겠지. 10년이 지난 후에도, 10년 전에도. 우리는 함께구나.
어쩐지 만족스러워진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재잘재잘, 오늘의 데이트 코스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귀찮아하면서도 들을 건 다 들어주는 마츠카와 잇세이도, 무뚝뚝한 그를 변화시킨 이시하라 진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걸어가는 커플의 뒤로, 벚꽃 잎이 흩날리며 잠시 일렁이던 공간을 빠르게 지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