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약간의 욕설 주의

 

   멀은 오늘 집에 없었다. 멀을 제외하면 인간관계가 발 디딜 곳도 없이 협소해지는 대릴과는 달리 그의 형은 제법 발이 넓은 편이었다. 군대에서 알게 된 사람도 있었고, 약을 사다가 알게 된 사람도 있었고, 그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알게 된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때문에 멀이 오늘처럼 다른 이들과 어울려 집에 없는 날이면-그의 형은 늘 그를 옆구리에 붙이고 다녔기 때문에, 그렇게 자주 있는 날은 아니었지만-대릴은 맥주 몇 캔을 사다가 졸릴 때까지 마셨다. 그는 혼자 있는 시간을 재주 좋게 보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흘러간 영화를 지껄이는 텔레비전을 앞에 두고 잠이 올 때까지 맥주를 들이키다가, 멀의 고함소리에 등짝을 얻어맞고 부스스 일어나는 것. 그것이 그가 홀로 있는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었다.

 

 

     허벅지에서 맥주 캔을 담은 비닐봉지가 부스럭거렸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대릴은 잠깐 동안 저가 무엇을 본 것인지 생각하며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길을 지나가는 꼬맹이들이 하도 두들기고 다녀 움푹하게 손자국들이 난 우체통 바로 옆에 무언가가 있었다. 희미한 상아빛을 띈 가로등의 불빛이 둥글게 말린 등을 하얗게 물들였다. 사람인가?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자? 아니면 나이가 적은 어린애일 수도 있다. 둥글게 말린 몸은 자세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작고 말라 보였다. 오는 동안 이 근방에서 애 잡는 소리는 못 들어봤는데. 그는 잠깐동안 입술 위로 혀를 내어 축이다 결국 몇 걸음을 디뎌 그 앞에 섰다. 이봐, 하고 부르는 소리에 마른 어깨가 흔들렸다. 어이.

  “남의 집 앞에서 뭐하고 자빠진 거야?”

  “…어라.”

  고개를 든 얼굴이 숨을 삼키도록 앳되었다. 솟을 생각은 없이 아래로 아래로 축 쳐진 눈꼬리를 가진 순한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가 문득 나긋하게 휘어지며 웃었다. 낯선 웃음이었다. 호의와 애정으로만 가득 차서 어쩔 줄 모르는 웃음. 뒷목을 휘감아 오르는 감각이 낯설어 그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모난 곳 하나 없이 유순하게만 생긴 여자였다. 누가 제 뺨을 때려도 대거리 한 번 하지 못할 것 같은 유약한 얼굴 위로 오목조목 올라앉은 보드라운 이목구비와 길이가 맞지 않게 엉망으로 잘린 단발이 가로등 불빛 아래서 창백하게 반짝였다. 여자가 여전히 나긋하게 웃는 얼굴을 한 채로 딱딱하게 굳은 대릴의 얼굴을 몇 번 시선으로 쓸어내렸다.

 

“이 정도로 자세하게 말해준 적은 없었는데.”

“뭐?”

“꿈이라서 그런가……. 한 열 살 쯤 어려보이는 얼굴이네.”

 

  숨이 새는 소리와 함께 어깨가 달싹이도록 웃은 여자가 다시 세운 무릎과 그 위에 얹은 손 위로 이마를 파묻었다. 그는 얼떨떨한 얼굴이 되어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인간을 한 순간에 꿈이라고 결정 내버린 그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약을 했는지, 그게 아니면 어디서 술을 이 모양으로 진탕 처먹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여자가 문득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신기하다, 이렇게 생겼었을까, 하는 목소리가 온후하게 밤공기와 뒤섞였다. 시선이 마른 턱선을 따라 데구루루 굴렀다. 머리도 짧고, 눈가에 주름도 적고, 세상에, 수염도 얼마 안 나고, 그런데 눈은 지금처럼 반짝거리는 푸른빛이네... 하는 혼잣말들이 귓불 안 쪽으로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쌓였다. 여자는 그를 앞에 세워두고 한참을 옹알이처럼 웅얼거리다 입술을 앙 말아 물었다. 뺨과 광대뼈 위로 빗물처럼 닿던 시선이 어렵사리 떨어져 나갔다. 흰 이마가 다시 무릎을 세워만든 공간 사이로 파고 들어갔다. 그는 그 모양새를 지켜보다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뭐하는 여편네인지는 모르겠는데.”

 

  미친 여자가 분명하다. 아니면 실연이니 나발이니 당해서 술 처먹고 정신 못 차리는 여자이거나. 그 유순한 얼굴의 어디가 뒷목을 잡아당겼는지 움칫 물러섰던 것이 시간이 지나자 괜히 쪽팔리고 울화가 당겨 대릴은 와작 미간을 구겼다. 멀쩡히 살아있는 인간을 앞에 두고 죽은 사람 얼굴 떠올리듯 웅얼거리는 소리가 괜히 혀 아래를 더 깔깔하게 만들었다. 여자는 여전히 머리카락으로 뒤덮인 뒷덜미를 드러내며 웅크린 채였다. 모서리의 어디도 깎아내지 못한 말들이 혀끝에 똬리를 틀었다가 우두두 쏟아졌다.

 

  “난, 씨발, 댁같은 중국인 여자하고 별로 할 말 없거든.”

  “하하, 젊은 아저씨 신랄해…….”

  “미친년이네. 술이건 약이건 취했으면 집에나 들어가서 쳐 자라고. 헛소리로 사람 기분 더럽게 만들지 말고.”

 

   오르락내리락 하던 등이 잠깐 멈췄다. 그러나 수그러든 목덜미와 쏟아진 머리카락은 거두어질 줄을 모르고 여전히 가로등에 하얗게 부스러지고 있었다. 대릴은 저 목덜미를 잡아 채 길거리로 내던지고 싶은 충동과, 땅바닥에 침이나 뱉고 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동시에 느꼈다. 그는 위협이라도 하듯 제 발치 쯤에 탁 침을 뱉었다. 저 웅크린 등이 자꾸 속을 긁었다. 제 얼굴을 보고 죽어나자빠진 사람 영정 보듯 지껄이는 미친 여자의 볼품없이 마른 등이, 헐렁하게 늘어진 윗옷 같은 것들이 그랬다.

 

   차라리 저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으면 될 것 같아 그는 발을 틀었다. 술에 취했는지 약에 취했는지 모를 여자 따위 우체통 옆에 웅크리고 앉아있건 말건 알 바 아니었다. 마시고 들어오던 멀이 보면 뭐 어떻게 해서든 내쫓아내겠지.

 

   그러나 걸어가던 걸음은 덜컥 멈췄다. 옷자락 끝을 앙상한 손끝이 말아쥐었기 때문이었다. 손 끝을 타고 시선을 옮기면 앳된 얼굴이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혀끝에서, 퍽이나 비싼 얼굴이구만, 하고 끝이 짓눌린 비아냥이 맴돌았으나 대릴은 내뱉지 못했다. 그건 여자가 지나치게 메마른 얼굴을 하고 있어서였다.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지었던 나긋한 미소가 거짓말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얼굴이었다. 한껏 지쳐 숨을 쉬기도 어렵다는 듯 한 표정을 비끄러뜨리며 그녀는 손에 쥐인 대릴의 옷자락을 꾹 말아쥐었다. 눈가 아래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푸르스름하게 떨렸다. 물기 하나 없는 입술이 나직하게 소리를 떨어뜨렸다. 이상하지. 속삭이는 소리에 입 안에서 쓴 맛이 돌았다.

 

  “아주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뭐?”

  “자꾸 등만 보여주니까.”

  “이거 진짜 미친년이구만. 이거 안 놔?”

 

   아저씨. 들어본 적도 없는 부름이 발꿈치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애틋하고 온후한, 그러나 물 냄새가 묻어나는 단어를 여자가 다시 한 번 속삭였다. 아저씨. 그는 옷자락을 당기려던 손을 저도 모르게 허공으로 떨어뜨렸다. 울지 않는 얼굴로 울 수 있다면 저런 표정이 될 것이다. 헐렁한 소맷자락 안에서 비죽이 튀어나온 손가락들이 여전히 옷자락을 감아쥐고 있었다.

 

  “너무 멀리 가버리지는 말아요.”

  “뭐…….”

  “꿈이라서 하는 말이지만, 나, 계속 쫓아가고 있으니까.”

 

   둥근 눈동자가 몇 번이고 그의 얼굴을 쓸었다. 대릴은 이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여자가 정말로,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의 얼굴 위에 제가 아는 사람의 얼굴을 뒤집어씌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보다 머리가 더 길고, 눈가에 더 주름이 자리해 있고, 그보다 수염이 더 긴, 하지만 그와 똑같이 푸른 눈을 가진 누군가를. 그러나 조금 전처럼 속 안에서 왈칵 불이 당겨오지는 않았다. 여자가 울고 있었다. 일그러지지 않은 얼굴, 그저 너무 많은 일을 겪어 지쳐버린 것 같은 얼굴이, 아주 오랜 시간처럼 울어본 사람인 양 자연스럽게. 꼭 누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는 것이 당연했던 사람처럼.

  “아저씨가 아무리 멀리 가버리려고 해도, 나, 계속 뒤에서 쫓아가고 있으니까.”

  “…이봐.”

  “포기 같은 거, 그런 거 안 해요. 계속 쫓아갈 테니까. 아저씨한테 내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안아 줄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쫓아갈 테니까.”

   어린 아이가 다짐하듯 엉망인 말투를 하면서도 그 유순한 얼굴 위로 물길이 쉼 없이 떨어졌다. 조각상 위로 물을 부으면 만들어질 것 같은 얼굴이 내장 안쪽을 우드득 소리가 나게 긁었다. 씨발, 대체 뭐하는 새끼에 뭐하는 미친년이란 말인가. 그로서는 단 한 번도 마주해본 적 없는 감정들이 정제되지 못한 언어로, 그러나 묵직하게 발끝과 어깨 위를 짓눌렀다. 여자가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긴 속눈썹이 가로등 조명 아래 은빛으로 반짝였다. 볼품없이 마르고, 누가 뺨을 후려갈겨도 대거리 한 번 못할 만큼 맹탕인 얼굴을 하고, 그의 얼굴 위에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종 못할 새끼를 겹쳐보는 여자가 처음 얼굴을 들었을 때처럼 나긋하게 웃었다. 젖은 뺨으로, 그러나 말라비틀어진 입술로.

 

  “그러니까 혼자서만… 혼자서만 너무 멀리 가버리지 말아요.”

   숨결처럼 끝이 흐려지는 그 말은 눈앞의 대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릴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적어도 이렇게 분명하게 드러나는 상황을 착각하고 잘못 짚을 정도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로 화한 모든 단어와 문장들이 무릎을 아프게 짓눌러 그는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땅에 댔다. 졸지에 바닥에 닿은 봉지 안의 맥주 캔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름도 모르는 여자가 그의 얼굴을 젖은 얼굴로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갈색 눈이었구먼, 하고, 대릴은 시답지도 않게 그런 생각을 했다. 맑은 눈이었다. 곱게 빚은 질그릇에 물을 가득 채워놓은 것 같이 말간 다갈색의 눈동자. 그가 눈 앞에 주저앉는 통에 그림자가 진 눈동자 안에서 물결이 일었다.

  “대체 내 얼굴을 보고 어떤 새끼를 떠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우는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방법 따위는 잘 몰랐다. 우는 여자를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는 더더욱 몰랐다. 그저 신경 쓰이는 걸 뱉어낼 뿐이었다. 젖은 속눈썹이 제법 길다고, 또다시 시답잖은 생각을 떠올리며 그는 와글거리는 말들을 잇새 사이로 깨물었다.

  “신경 쓰이니까 울 거면 소리 내서 울어.”

  “…큽.”

   여자가 다문 입술 사이로 웃음과 비슷한 소리를 냈다. 그의 목소리에 부풀어 올랐던 눈동자가 담긴 눈매가 끝을 모르고 아래로 둥글게 휘어졌다. 한동안 표정을 짓지 않아서 어색한 얼굴로 여자는 그렇게 웃는 표정을 하다가, 곧 경련하듯 떨리는 입 꼬리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눈동자를 굴렸다. 대릴은 그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휘어내려갔던 눈꼬리 끝이 움찔거리고, 웃음기를 머금은 듯 했던 입가가 와드득 떨리고, 따뜻한 빛을 띤 말간 눈동자가 가만히 자리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해매다 결국 물기를 머금고 젖어드는 모습을. 무릎 위에 자리했던 손이 관절이 하얗게 질리도록 비틀리다 결국 얼굴을 감싸쥐었다. 손바닥 안으로 잠긴 입술에서 척척한 울부짖음이 부글부글 차올랐다가 허공으로 흘러넘쳤다. 어, 어어, 어어어-, 하고 쏟아지는 울음이 따가웠다. 뜨겁고 축축하고 무거웠다. 그는 저가 왜 그러고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지근한 밤바람이 스며들었다. 서른다섯 살의 대릴 딕슨은 그렇게 송 윤을 만났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