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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데아는 넓다. 비록 레프가 일으킨 테러로 못 쓰게 된 곳도 꽤 있지만, 적어도 사람 하나가 말없이 사라질 경우 당사자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을 뒤지며 시간을 낭비해야 할 만큼의 크기는 되었으니까. 게다가 방은 또 얼마나 많던가. 만약 복도를 어슬렁거리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방에 숨는다면 그건 또 대단한 숨바꼭질이 되고 만다.

 

“어라? 빌리! 여긴 무슨 일이야?”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하아.”

 

그래. 그 대단한 숨바꼭질을 제가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빌리는 담요로 몸을 돌돌 말고 책을 읽는 중인 자신의 마스터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지마루의 부탁으로 그녀를 찾기 위해서 제가 얼마나 많은 곳을 뒤져봤는데, 30분 만에 찾은 마스터는 다른 서번트의 방에서 놀고 있다니. 한숨이 나오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겠는가.

“하하하. 안데르센의 방은 책도 많고 벽난로도 있어서 좋단 말이야~! 내 방에도 벽난로를 두고 싶은데 로마니가 제발 참아달라고 하는 바람에….”

“그래서? 책이랑 난로 때문에 여기 있는 거야?”

“응. 왜? 문제라도 있어?”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딘가에 갈 거라면 말이라도 해 주고 가면 좋을 텐데. 종 취급당하거나 주종관계 같은 건 싫지만, 그래도 자신들은 서번트랑 마스터 관계이지 않나.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면 곤란한 관계라는 건 마스터인 오디빌이 더 잘 이해하고 있을 텐데.

정말이지 곤란한 아가씨다. 빌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짓고 그녀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말도 안 하고 사라지면 곤란하잖아, 응?”

“아. 그건 그러네. 미안해.”

“…뭐, 그래도 감으로 방향이라도 찾아서 발견했으니 다행일까. 이럴 땐 편하네, 서번트라서.”

 

물론 이 특별한 능력은 자신에게만 한정한 게 아니다. 그녀와 계약한 다른 서번트, 그러니까 마리 앙투아네트나 사사키 코지로 등등 다른 서번트들도 그녀의 기척을 느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다른 서번트들을 두고 자신이 제일 먼저 그녀를 찾은 건 역시 조금 기쁜 일이다. 어쩐지 그녀랑 가장 인연이 깊은 사람이 자신인 것 같아서, 어깨가 절로 으쓱해졌으니까.

 

“그런데 날 왜 찾은 거야? 무슨 일 생겼어?”

“응? 아. 다른 쪽 마스터가 찾더라고.”

“아, 후지마루 군이? 왜?”

“이유는 몰라. 그다지 급한 일은 아닌 것 같아보였지만, 찾으면 자신한테 와달라고 전해달라고 하더라고.”

 

‘흐음.’ 소리 내어 고민하던 오디빌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려다가 도로 펼쳤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 이 따뜻함과 포근함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판단한 게 분명했다.

 

“가지 않아도 되나?”

“안 급하니까 괜찮지 않을까? 애초에 급했다면 직접 왔을 걸. 그 애라면.”

“흥. 그러다가 큰일이라도 나는 모른다고?”

 

방의 주인, 안데르센은 제 방에서 노닥거리는 그녀가 익숙한지 몇 마디를 주고받고는 다시 자신의 할 일에 몰두했다.

그러고 보니 같이 방을 쓰는 셰익스피어는 어디 간 걸까. 아까 전 몇몇 서번트가 시뮬레이션을 하는 걸 봤는데, 그 안에 있을지도. 빌리는 책 냄새와 온기가 가득한 방을 둘러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응?”

“온 김에 빌리도 쉬고 가. 자아, 내 옆은 비어있다고? 키요히메나 마리가 달려와서 차지하기 전에 앉는 게 좋지 않겠어?”

자신은 그냥 다리가 저려 일어났을 뿐인데, 상대는 대단한 유혹을 해오고 있다. 빌리는 담요 한쪽을 걷어 제 자리를 마련하는 오디빌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다른 서번트들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건 싫었고, 어차피 이 뒤로 할 일도 없었으니까.

 

“나야 좋지. 그럼, 실례할게.”

“음, 음. 얼마든지! 아, 뭔가 마실래? 내 방은 아니지만 셰익스피어가 마실 건 말만 하면 마셔도 된다고 했어. 커피도 있고, 차도 있는데….”

“괜찮아, 괜찮아. 읽던 책이나 마저 읽어. 응?”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제 마스터는 참으로 자신을 좋아한다. 다른 서번트들에게도 잘해주는 편이지만, 자신에겐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고 싶어 하고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 한다. 저렇게 까지 솔직하게 좋아하면, 누구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까. 물론 자신이 오디빌을 좋아하는 건, 그녀의 애정 공세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상대의 체온이 바로 느껴지도록 오디빌에게 바짝 붙어 앉은 빌리는, 그녀가 읽고 있는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책이야?”

“어린이와 가정의 이야기.”

“…응?”

“그림 형제의 동화책 말이야. 뭐, 다들 그림 동화라고만 알지 책 제목은 잘 모르니 당연한가.”

“아아, 그거.”

 

의외다. 빌리는 그렇게 말할 뻔 했던 입을 닫았다.

소설이면 몰라도 동화책이라니. 오디빌은 동화 같은 건 관심 없어보였는데, 알다가도 모를 선택에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뭔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읽고 있는 건 아닐까? 궁금증만 가득 쌓여가 말수가 줄어든 빌리를 대신해서 입을 연 것은, 여전히 눈으로 글자를 훑고 있는 오디빌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눈보라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겨울밤엔 자주 어머니가 이렇게 난로 근처에 앉아 우리에게 책을 읽어줬었어. 그때 제일 많이 읽어준 게 이 책이었지. 나는 솔직히 지루했지만, 내 동생들은 동화책을 한창 좋아할 나이였으니까. 내 수준에 맞춰 책을 읽어주면 동생들이 지루해 하니, 어머니는 동생들 수준에 맞춰준 거야.”

 

그녀의 입에서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다니. 이건 더 의외다. 빌리는 담요와 따뜻한 공기에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감기던 중, 정신이 번쩍 들어 오디빌을 보았다.

오디빌의 표정은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딱히 슬퍼하는 것 같지도, 추억에 잠겨 쓸쓸해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목소리만큼은, 어쩐지 조금 촉촉하게 물기가 느껴졌다.

 

“원래는 어제 읽던 고대 생물학에 대한 책을 마저 읽으려고 했는데, 이게 눈에 띄는 바람에…. 오늘은 머리도 식힐 겸, 이걸 읽고 있었지. 다 아는 내용이라 기억력 테스트처럼 되어버렸지만, 겨울 느낌이 나서 좋더라고. 우린 나갈 수가 없으니 계절감도 잘 느껴지지 않는데, 모처럼 겨울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 어차피 여긴 위치상 사계절 내내 춥지만! 날짜 상으론 겨울 맞잖아? 그러니 계절에 맞는 일을 하고 싶었어.”

“그래?”

“응. 아, 코코아 한 잔도 이 계절감을 되살리는데 큰 일조를 했지.”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은 오디빌은 옆에 놔둔 머그컵을 들었다. 진한 코코아가 든 머그컵은 난로 옆에 있었던 탓에 제법 온기가 느껴졌지만, 그 내용물은 전부 식어버린 것인지 김조차 올라오지 않았다.

 

“…겨울 좋아해?”

“응? 나? 아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

“그런데 굳이 겨울이라는 걸 느끼고 싶어 한 거야?”

“겨울이라는 걸 느끼고 싶었다고 하기 보다는…. 아까 말했잖아? 여긴 계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난 그냥 여기도 사계절이 존재한다는 걸 실감하고 싶었는지도 몰라. 여긴 플라스크 안도 아니고, 시뮬레이터 안도 아닌, 멸망한 세계에서도 유일하게 생명이 살아 숨 쉬는 현실이라는 걸.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는. 현실.”

 

요컨대 말하자면, 살아있다는 걸 느끼고 싶었다는 이야기가 되나. 그녀의 말을 전부 들은 빌리는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몸과 마음을 열정적으로 소비하며 애정을 불태우는 제 마스터는, 저렇게 보여도 뼛속까지 마술사라서 인정이나 도덕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 가문도 ‘당주인 자신의 것’ 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끼는 거지, 가문의 구성원에는 크게 정을 두지 않는 게 오디빌 마이켈베르크 아니던가. 물론 그녀도 자신을 낳고 기르며 당주로 성장시켜준 부모님 정도는 사랑하는 것 같았지만, 이렇게 추억에 푹 젖을 정도로 간절히 그리워 할 성격은 아니었지.

 

“빌리가 와서 다행이야. 나 말고 다른 체온이 옆에 있다는 건 좋네.”

“체온이 필요한 거라면 다른 서번트도 있잖아?”

“안데르센에게 옆에 와서 앉으라고 했다가 쫓겨날 뻔 한건 말 안했지?”

“…….”

 

‘뭘 봐?’ 그녀의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방의 주인에게로 시선을 돌린 빌리는 냉정한 안데르센의 반응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난 빌리의 체온이라서 좋은 거야. 다른 서번트라면 이렇게 주절주절 떠들지도 않을걸. 책 읽어야 하니까. 그러니 질투 하지 마, 알겠지?”

“질투 한 적은 없다고?”

“그럼 안데르센은 왜 본 거야?”

“…책 보던 중 아니었어?”

“후후.”

 

‘네 생각 정도는 다 알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든 오디빌은 가볍게 빌리에게 입을 맞췄다.

아주 잠깐 닿은 입술에선, 희미한 코코아의 맛이 느껴졌다.

정말 방심할 수 없는 여자다. 허탈한 웃음을 지은 빌리는 비어있는 그녀의 어깨에 몸을 기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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