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환생AU
눈보라가 몰아치는 밤에 하얀 유카타를 입은 여인과 청록색의 유카타를 입은 남성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날이 밝아올 때까지 하염없이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아니, 일방적으로 남성의 이야기를 여인이 들어주는 쪽이 더 알맞다고 할 수도 있었다. 파란만장한 모험 이야기와 그의 친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인의 입가에는 미소가 천천히 번져나갔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남성도 힘입어서 좀 더 즐거운 이야기를 밤새도록 떠들어대었다. 얼마나 이야기를 하였을까. 새벽이 되자, 언제 눈보라가 불었냐는 듯, 눈이 느릿하고 수북히 쌓이면서 한겨울에 피어 여리면서 이름 모를 꽃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여인과 남성은 마주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서로의 체온을 잃지 않도록 유지하고 있었다. 난데없이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남성이 여인을 끌어안고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품에 가두자, 작은 기침 소리 그리고 웃음소리와 함께 작은 체구의 여인이 남성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여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면서 맑고 푸른 바다를 연상시키는 듯한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어루만지자, 여인은 간지러운 듯이 작게 미소를 짓고 남성을 올려다본 채로 나즈막히 물었다.
' 오사무, 약속 하나 하겠나요? '
볼을 어루만지는 여인의 손을 잡고서 그 약속이 무어냐 묻기도 전에 긴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살짝 누른 채, 빙그레 미소지었다. 아무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무언의 의미였다. 여인의 손가락에 살며시 입맞춤을 한 후에 오사무 라 하는 남성은 여인을 바라보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하였다. 푸스스, 웃음소리를 내던 여인이 이내 오사무를 따라 끄덕이면서 품에서 조심스레 벗어나 하얀 손가락들 중에서 자그마한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그는 아기처럼 하얀 여인의 손가락에 살며시 제 손가락을 가져다대고 고리처럼 서로를 얽히게 만들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그 모습은 사랑스러움, 애틋함, 따스함과 행복함. 그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곧 여인이 그에게 무어라 이야기 했지만 그에게 여인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 들리지 않네, 무어라 이야기 하였는가. '
허공에 손을 휘젓자, 여인은 온데간데 없어졌고. 주위를 한참 둘러보던 그는 바닥에 쓰러져있던 여인을 발견하고 달려가 잡아채고서 들어올렸지만, 이미 늦은 후 였다. 여인의 숨은 끊어진지 오래인 듯, 체온과 숨결은 이미 여인의 것이 아니였는지 그녀의 안에서는 사라지고 찾아볼 수 없었다. 여인의 하얀 유카타를 적시는 적색의 꽃이 그녀의 심장에서 스멀스멀 피어 올라왔다. 남성은 처음으로 공포와 상실감, 허망함을 느꼈다. 죽었다. 사랑하던 여인이 한 송이의 적색 꽃을 피운 채로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렇게 최후를 맞이한 사랑스러운 여인이 아름다워서 남성은 절망을 맛봄과 동시에 또 다시 여인을 사랑하고 말았다. 지금은 비록 어려울지라도 기필코 후에 가서라도 사랑하는 그녀를 찾아내겠다는 집념으로 눈물을 삼키며, 남성은 품에서 단검을 꺼내어 강한 힘으로 스스로의 심장을 단번에 관통시켰다.
***
" 다자이 씨, 다자이 씨! "
한 소년이 화를 내면서 쇼파에서 자고있는 다자이 라 하는 남성을 깨우고 있었다. 눈을 뜬 그가 벌떡 일어나고 주위를 둘러보면 지겹다는 표정과 함께 입을 벌리며 하품을 하였다. 소년은 한숨을 쉬면서 오늘은 중요한 의뢰가 있다고 아까 전에 쿠니키다 씨가 말씀하셨잖아요. 주무시면 어떡해요! 라며 화를 내었지만, 다자이는 그닥 신경쓰지 않는 듯이 어깨를 으쓱일 뿐이였다. 소년은 한참이나 다자이에게 어떠한 일이라고 설명해주었지만, 지루한 일이라며 소년에게 알겠으니 그만 가보라고 손짓했다. 소년은 한숨을 쉬면서 회의가 있으니 어서 오라며 먼저 장소를 떠나갔다. 쇼파에 다시 누워서 잠을 청하려던 다자이가 눈을 뜨고 심장 부근을 매만지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이 아닌,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리로 나와서 거닐자, 눈이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다.
이상하리만큼 매년 이맘 때가 되면 꼭 그 꿈과 동시에 눈이 내린다고 생각한 다자이가 손바닥을 펼치자, 그대로 눈이 손바닥에 내려앉아 녹아 없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상하리 만큼 심장이 아려왔다. 매년 스스로에게 왜냐고 물었지만 소용없던 질문이였던 것을 잘 알고있었던 터라 이제는 익숙하기만 했다. 하지만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응어리는 점점 커져서 의심으로 변해버렸다. 한번은 누군가와 손을 잡으면 익숙한 느낌이 아니라서 금방 놓아버렸다. 익숙한 느낌을 찾으려고 동반자살을 하지 않겠냐는 말과 그냥 갑작스레 때때로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지만, 그 중에서 그나마 익숙하다고 느낀 손은 타니자키 나오미의 손이었다. 그 외에는 전부 익숙한 느낌조차 없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잡고있던 여성의 손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만나온 여성들은 거의 손을 잡지 않고 팔짱을 주로 하고 다녔다. 그렇기에 익숙해질 정도로 손을 잡은 기억은 전혀 없었다. 또 다른 일로는 길을 걷다가도 푸른 계열의 색을 보면 멍때리고 있는 일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하늘, 바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의 푸른 색을 보면 넋을 놓고 눈으로 쫓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보면 어느샌가 강물에 뛰어들어 빠진 후 였다. 자살시도 중의 30%는 넋을 놓다가 빠지는 일이었다.
" ... 무얼 그렇게 쫓고 있는건지. "
기억 저편에 무언가가 있지만 꺼내보기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언가를 눈치채고, 이상 증세를 느낀건 14세의 어느 날이었다. 꿈을 꾸고 눈을 뜨면 눈물을 흘린 채로 찝찝하게 아침을 맞이 했었다. 식사를 하다가도 하늘을 보면 넋을 잃었던 적이 많았고, 어쩌다가 어떤 가문의 영애와 손을 잡으면 익숙한 느낌을 찾고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차지했었다. 푸른색을 쫓다가 죽을 뻔한 적도 많아서 전 파트너였던 나카하라 츄야에게 꾸지람을 들었던 적도 적지않게 있었다. 혹은 오다 사쿠노스케와 나카하라 츄야의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미친사람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었다. 그에게 스스로도 미친 것 같다며 웃어넘겼지만, 아무래도 정말 미친 것 같았다. 일찍이 병원을 다녀볼까 마음도 먹었지만, 바로 병원에 박힐 것 같다는 생각에 관두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하자, 기억 저편의 무언가가 있었지만 꺼내볼 생각은 없었다.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무엇보다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겁쟁이였던 자신을 숨기면서 억지로 책의 내용을 머리에 집어넣으며 무언가를 꾹꾹 눌러서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후로 4년이 더 흘렀고, 22살이 된 현재에 꺼내보려 마음먹지만 번번히 실패해버렸다. 도대체 이게 무어길래 사무치게 그리우면서 동시에 겁이나는건지.
그렇게 또 얼마나 걸었을까, 걸음이 멈춘 곳은 요코하마에 이런 곳이 있었나 라고 할 정도로 처음 보는 곳에 도착해있었다. 꽤나 고풍스러운 듯한 마치 알고있는 듯한 곳이었다. 사무치게 그리운 느낌이 다자이를 덮쳐왔다. 이런 곳이 있었던가? 언제부터? 다자이가 발걸음을 옮겨 나아가자, 그곳은 다자이가 나아온 만큼 멀어졌다. 마치, 멀리서 구경하라는 듯이. 주위만을 배회하자 나무로 만들어진 울타리 너머로 여성과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타리 너머를 살며시 들여다보자, 남성은 여성을 소중히 품에 넣고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알수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보슬보슬 내리는 눈의 사이로 여성이 고개를 들어 남성을 바라보자, 다자이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푸른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그 어느 여인보다 가장.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사랑스러운 눈빛을 담은 여인은 남성과 약속하는 듯 손가락을 걸었다.
' 미래에도 당신의 신부가 되겠다고 약속하겠어요. '
남성은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행복한 듯이 여인을 품에 끌어안았고, 다자이는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찾아가겠다고,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약속까지 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탐정사로 되돌아가서 어딘가에서 살아있을, 그 여인을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다짐하며 최대한 빠르게 달려 나아가던 도중에 지나칠 정도로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자신보다 조금 작아 보이는 여인을 스쳐 지나갔다. 여태껏 푸른색으로 염색한 사람은 본 적이 있지만, 저렇게까지 온전히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것이라는 듯이 과시하는 머리색은 본 적이 없었다.
바로 뒤를 돌자, 허벅지를 가리는 교복치마와 긴 코트 사이로 셔츠와 리본, 니트를 입은 듯한 여인이. 아니, 소녀가 그곳에 있었다. 동시에 소녀도 뒤를 돌아서 다자이를 바라보고, 꽤나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아아, 저 눈이다. 푸르디 푸른 눈의 색. 나카하라 츄야와 오다 사쿠노스케의 눈 색과는 차원이 다른, 맑고 아름다운 바다와 하늘을 연상시키는 눈동자의 색. 줄곧 찾아다니고, 그리워하던, 꿈에 그리던 여인.
수많은 사람들의 사이에서 그 자리에 서있던 두 사람은, 서로의 시간만이 멈춘 것처럼 그저 지그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먼저 발을 떼어낸 사람은 소녀였다. 가슴께까지 오는 푸른색의 머리카락이 퍽이나 부드러워 보였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하지만 긴장한 듯한 소녀가 다자이를 향해서 걸어와 몇 발자국 남지 않은 곳에 서있었다. 그렇게 또 서로를 얼마나 바라봤을까, 소녀가 다자이에게 대뜸 인상을 씀과 동시에 삿대질을 하고서 내뱉은 말에 다자이는 잠깐 멍해졌다.
" 아저씨, 기분 나쁘게 왜 자꾸 봐요? "
생긴건 멀쩡하게 생기셨는데 머리라도 다치셨어요? 당돌하게 물어오는 소녀에, 다자이는 눈만 슴벅일 뿐이었다. 이렇게 빨리 찾을거라 예상도 못했고,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소녀가 말투가 조금 험하지만, 여전히 그때와 마찬가지로 너무도 아름다워서, 자신도 모르게 소녀를 품에 안았다. 소녀는 버둥거리기에 바빴으나, 다자이는 소녀를 찾았다는 기쁨과 행복에 울지는 않았지만 감격스러움에 훌쩍이며 소중하게 품어줄 뿐이었다. 한참 바둥거리던 소녀가 한숨을 내쉬고 얌전해지더니, 다자이를 마주안아주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작은 손이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놀랐는지 고개를 들어서 소녀를 바라보자, 이번에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왔다. 사악, 사악. 쓸리는 머리카락의 소리가 들려오고, 다자이는 다시한번 소녀를 품에 안았다.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너무도 다정해서. 너무도 그리웠었기에. 소녀는 얌전히 그런 다자이를 달래듯이 토닥여줄 뿐이었다.
길거리에서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자리를 옮겨서 공원 벤치에 앉아있자, 소녀는 혹여나 그가 울기라도 했을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였다. 입이 조금 험하긴 하다고해도, 기분 나쁘게 바라본건 사실이였다. 꼭 무언가에 홀린 듯이 뒤를 돌아봐야한다는 강한 느낌에 돌아보자 보인 것은 알수없는 감정을 가득 담은 눈빛의 그가 자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지만, 기분나쁘다는 생각이 우선되었기에. 다가가서 왜 그렇게 기분나쁘게 보냐고 물었던 것 뿐이었는데, 그렇게 울 정도로 상처받을만한 말이었나? 소녀는 잠깐동안 머리를 굴려 생각했고, 그가 조금 진정한 것 같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더니,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소녀를 벤치에 앉히고 입고있던 코트를 벗어 무릎에 올려주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소녀는 눈을 꿈뻑일 뿐이였고, 다자이는 소녀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손을 잡고선 화난 듯이 호소했다.
" 치마를 입고 함부로 남자 앞에서 쪼그리고 앉는건 안되네! "
소녀는 황당함에 허! 소리를 냈지만, 단순히 차별 발언 같다는 생각보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 같았기에 아무말도 할 수 없었고,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였다. 그런 소녀의 반응에 다자이는 자네에게 화낼 생각은 아니였다고, 화내서 미안하다며 소녀의 푸른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잠자코 쓰다듬을 받던 소녀가 입을 오물거리며 작게 중얼거리자, 다자이는 고개를 기울이고 응? 이라는 반응과 함께 소녀를 지그시 보면서 못들었다고 말했다. 소녀는 그를 한번 노려보면서 잘 들으라며, 다시한번 조금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 타테야마 카에나. "
그게 제 이름이예요. 자네 라던가 그런 이름이 아니예요. 소녀의 말에 다자이는 가만히 멍을 때리다가 아, 아 그런가? 라는 대답과 함께 소녀를 바라보고는 싱긋 웃으면서 어여쁜 이름이네. 카에나 양. 그의 말에 타테야마가 머리카락과는 대조되도록 한 송이의 붉은 장미꽃처럼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 시선을 피해버린 타테야마에게 상처받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쓰게 웃은 다자이가 그녀를 보면서 다자이 오사무. 나의 이름이네. 부디 편한대로 불러주길 바라. 카에나 양. 타테야마는 겨우 몇시간 전에 만난 다자이 오사무 라는 이 남자는 어째서? 그보다 한참은 아닐지라도 왜 어린 자신에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지 알지못했고, 도대체 왜 벌써 편하게 부르는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편하게 부르지 말라고 말하고싶어도 무엇 때문인지 이해 할 수 없이 조금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쪽도 예쁘네요. 처음 듣는 성 씨고요. 타테야마의 말에 다시한번 쓰게 웃은 다자이가 그녀의 손을 잡고, 나 역시 특이하고.. 처음 들어보는 성 씨였네. 왜인지 쓸쓸해보이는 그에게, 타테야마는 조금 안타까운 눈으로 위로를 건네었고 동시에 그에게 막말을 한 것에 대한 사과였다. 다자이는 그런 그녀의 눈빛에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나즈막히 말을 이었다.
" 괜찮네. 오랜시간 돌고 돌긴 했지만, 이제서야 나 자신의 이름의 의미와 살아있는 이유를 찾은 것 같아. "
카에나 양, 덕분이네. 다자이의 말에 조금 놀란 그녀가 어쩔줄 몰라하면서 안절부절 하는 것 같았다. 다자이는 진정하라는 듯이 타테야마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눈을 마주쳤다. 너무나도 올곧은 시선 때문에 피하려고 했지만, 다자이가 그녀의 볼에 손을 뻗어 시선을 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왜인지 모를 기쁨, 창피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행복감. 타테야마는 벅차오르는 감정들과 알 수 없는 기분에 진주처럼 자그마한 눈물을 흘리었다. 다자이는 조심스럽게 눈가를 쓸어주었고, 동시에 사랑스러운 것을 바라보듯이 소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었다.
" 一 카에나 양. 앞으로 영원히, 내가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겠는가? "
차디찬 겨울에 다시 소중한 약속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