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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기억은 아니었다.

 


 -이게 뭐냐.

 


 발갛게 튼 코를 보니, 불현듯 웃음이 터졌다. 문간에 걸터 선 리셸이 웃음기 서린 질문에 간단히 답했다. 리셸입니다. 그걸 묻는 게 아닐 텐데? 눈썹을 치켜 올렸다가도 그녀의 모습에 결국 표정이 풀어지고 만다. 추위를 많이 타는, 겨울에 약한 어린 연인의 모습이 꽤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밖에 엄청 춥더라구요.

 


 그런 건 차림새만 봐도 안다. 낡아빠진 나무 문 너머에 선 리셸은 매서운 추위를 버티고자 온 몸에 천을 두르고 있었다. 머리에는 방울이 달린 검은 털모자를 쓰고 색은 맞춘 것인지 앙증맞은 귀마개로 가장 민감한 귀를 덮었다. 아침에 춥지 말라고 저가 메어준 붉은 목도리는 인중까지 올라와 있어, 진실로 눈과 코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우습기보단 퍽 귀여워 자꾸만 멍청하게도 웃음이 샜다. 훌쩍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그녀의 코끝에서 떨어졌다. 연신 코를 먹던 그녀가 팔을 넓게 벌렸다. 안아달라는 신호임을 알면서도, 그 모습이 귀여워 괜히 모른 척 딴청을 부렸다.

 


 -추운데 뭐하고 있어?

 


 안 들어오면 닫을 거야. 라고 하자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했는지 쭈뼛거리는 손길로 옷깃을 낚아채 온다. 돌아본 시선이  호수같이 잠잠한 눈동자 속으로 잠겨든다. 마치 아무도 없는 호수에 몸을 내던진 돌멩이처럼.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응시하기만 했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돌이 던져지며 파동이 일어난, 그 잔물결 사이로 내 언어가 빠져버린 것 같았다. 언어의 조합을 해내듯 몇 번이나 우물거리던 입술 사이로 빨간 혀가 얼핏 보였다. 


 안아주면 안 될까요? 


 그 혀가 낮게 속삭이는 기분이 들었다. 새빨갛게 물든 마음을 한껏 열어 나는 그녀를 품에 가두었다. 아직 채 말이 나오기 전이어서 그런지 사뭇 당황한 그녀가 품 안에서 작게 꿈틀거렸지만 이내 익숙하게 팔을 둘러왔다. 히. 귓가 바로 옆에서 바람 빠지듯 웃는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품 안에 가득 찬 작은 온기가 시리도록 찼다. 이 순간만큼은 체온이 높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마주 안은 몸이 제 온기로 차츰 녹아가자 그녀는 부서지듯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당시 우리가 머물던 여관은 낡고 허름한 게 바람결에 닿으면 하릴없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가격도 다른 지역에 비해선 저렴한 편이었다. 그러나 저렴한 가격에 비해 벽난로나 생활에 필요한 기초 물품들은 다 갖추고 있었다. 물론 리셸이 사랑해 마지않는 커피포트도 있었다. 아침마다 방에는 자욱하게 깔린 담배연기가 아니라 커피 특유의 고소한 향이 났다. 구미를 확 댕기는 향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느끼한 기름 냄새보단 커피향이 좋았다. 저녁엔 난로에 불을 지피고 담요를 둘러 앉아 함께 뱅쇼를 마셨다. 분명 알콜이 다 증발했을 터인데, 그녀는 늘 취한 듯 기분 좋게 웃었다. 구김살 없이 미소 짓는 얼굴을 보면 가슴에서부터 따듯한 열이 번져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서로가 없던 시간의 조각을 퍼즐처럼 하나, 둘씩 끼워 맞춰 가면 더할 나위 없었고. 

 그녀가 유독 겨울에만 약하다는 걸, 함께 지낸지 4개월 만에 처음 알게 되었다. 함께 맞이하는 겨울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다른 때에는 아르바이트를 두 개나 병행할 정도로 성실하였는데 겨울철만 되면 아르바이트를 하나로 줄이고 종일 잠만 잤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겨울잠 자는 곰이었다. 평소엔 일에 치여서 서로 같이 있는 시간이 드물었는데. 이렇게 같이 있게 되었더니 잠만 자는 게 퍽 괘씸해 뺨을 꼬집어보는 둥 괜한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내 심술에도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잠만 잤다. 정말 이대로 동화에 나오는 공주처럼 영면에 들어버린 건 아닌지 걱정되어 작은 어깨를 가만히 끌어안은 적도 있다. 어긋나 부딪히는 심장의 위치에서 옅지만 또렷한 고동이 번져오면 그제야 한시름 놓는다. 정말 죽은 것처럼 잔다, 리셸은. 

 


 -곰탱아, 이제 그만 일어나자.

 


 저녁 먹어야지. 제 말에 잠기운이 짙게 드리운 눈꺼풀을 느리게 올렸다 감겼다. 그 사이로 흐려진 어두운 벽안이 보였다.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려놓았다. 곰탱이요? 그걸 또 들었는지, 채 풀리지 않은 입으로 어눌하게 되읊어 온다. 가슴 언저리에 흩어져 간질이던 머리칼을 살살 넘겨주며 피식 웃었다.

 


 -겨울잠만 자니까 그렇지, 곰탱아.

 


 곰탱이라는 단어가 꽤나 거슬렸는지 그녀는 뺨에 과하지 않게 공기를 불어 넣었다. 한 손에 들어차는 뺨을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바람을 빼자 이번엔 눈을 게슴츠레 뜬다. 반쯤 내보이는 눈동자가 선명한 색을 찾아 빛나기 시작했다. 그 눈동자 속에 얽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습관인양 하얀 뺨에 입술을 부볐다. 화장기 없이 부드러운 뺨에서 연한 비누향이 풍겼다. 그 향이 좋아 또 입술을 계속 지분대니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그녀가 입술을 댓발 내밀었다.

 


 -자꾸 놀리시면 곰탱이가 확 덮쳐버릴 수도 있어요.
 -그러기엔 곰이 너무 조그마해서 늑대한테 먼저 먹히겠는데?

 


 뺨에 부비던 입술을 열어 장난스레 동그란 뺨을 깨물었다. 제 행동에 그녀는 다리를 허공에 휘적이며 까르르 웃어 젖혔다. 낙엽만 굴러가도 웃는 십대처럼 밝고 순수한 어린아이마냥 맑았다. 그 울림이 그저 맑아서 듣기 좋았다. 한껏 웃어젖힌 뒤, 여운을 빼려는 듯 후 하고 숨을 가느다랗게 늘어트렸다. 제 목에 팔을 두르며 폭 안겨오는 얇은 허리에 단단히 팔을 둘렀다. 몸을 눌러오는 무게가 과하지 않고 딱 적당했다. 아니, 조금 가벼울지도.

 


 -꿈에서 크로스가 나왔어요.
 -내가?

 


 목 아래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음성에 고개를 내려 바라보았다. 작은 머리통이 꾸벅 움직이는 게 가슴을 통해서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뭘 했는데? 조금 흥미가 생겨 그녀에게 재촉하듯 물었다.

 


 -같이 여행을 다녔어요.
 -지금도 같이 다니잖아.

 


 꿈과 현실이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와 나는 함께 여행을 다니고 있었다. 그녀에겐 관광일지 몰라도 나에겐 임무였지만. 여행이라면 여행이었다. 묻는 말에 조금 물음표가 묻어났는지 그녀는 대답이라도 하는 양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음.. 밤하늘이 엄청 예쁜 곳으로 갔어요. 꿈인데도 생생할 정도로 추웠고 주변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있었거든요. 오로라를 보았는데 크로스가 내일 또 볼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다음날에도 보려고 나가는 찰나에 일어나고 말았어요.
 -이크, 절묘한 타이밍에 깨워버렸네.

 


 아쉬웠겠어. 사죄한다는 의미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프흐. 치아 사이로 새어나오는 웃음은 마치 바람이 빠지는 풍선을 닮아 있었다. 괜찮아요, 정말. 떠오른 의식이 다시 가라앉는 몽롱함에 발음이 흐렸다. 아마 따뜻한 온기 탓이리라. 몸에 힘이 빠져 흐트러지는 그녀의 몸을 고쳐 안았다. 몸을 덮은 가녀린 등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내린다.

 


 -졸려?
 -응.. 조금만 더 잘게요.. 미안해요.
 -그래, 더 자라.

 


 꿈결에 다시 발을 담구면서 그녀는 희미하게 응, 이라고 답한 것 같다. 오로라를 보러 가는 아이의 눈꺼풀이 스르륵 감기었다. 닫힌 눈꺼풀 너머에 숨은 눈동자처럼 예쁜 오로라가 펼쳐진다면 좋을 텐데. 품에 잠긴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기분 좋은 재잘거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방구석에서 장작이 타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타닥, 타닥. 바깥으론 여전히 매서운 바람이 칼날처럼 거리를 방황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이 작은 방만큼은 아주 봄 날씨였다. 적당한 온도로 따스해 몸이 살살 녹아 금방 나른하게 늘어진다. 따스한 온기 탓에 눈썹 아래로 잠이 몰려왔다. 얇은 눈꺼풀 위로 겹겹이 쌓아지는 잠결에 눈이 자꾸만 감겼다. 이대로, 같은 꿈을 꾼다면 더없이 좋을텐데. 이런 실없는 생각을 끝으로 의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

 지나간 계절이었다. 아니, 지나는 계절이다. 나는 여전히 그 겨울에 머물고 있었다. 머물고 싶었지만, 손에 그러쥘 수 없는 형태의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만 갔다. 난생 처음으로, 겨울이 따뜻하다고 느꼈다.

 

 


 그 뒤로는 아르바이트 시간까지 낮잠을 자버린 리셸이 부랴부랴 나가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오로라는 제대로 보았느냐고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 리셸은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오로라를 보지 못했다. 하물며 생생한 그 꿈속에서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잡아 녹여주는 일조차 하지 못했다. 매일을 꿈처럼 살아가던 그녀와 달리 나는 꿈을 꾸지 않았으니까. 그저 암흑이었다. 정신이 들었을 땐 여관의 낮은 천장이 보였다. 이게 전부였다. 가슴께에서 여전히 고른 숨소리가 색색 흩어지는 걸 보며, 나는 문득 북쪽의 먼 나라를 떠올렸다. 겨울은 추웠다. 분명 그 나라도 추울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라면, 조금 따뜻하지 않을까. 꿈에서 함께 보지 못했던 오로라를, 먼 길을 돌아오는 한이 있어도 언젠가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진짜 오로라를. 같은. 답지 않게 순정적이고 실없는 생각을 했다. 지금 이렇게 잡혀있는 꼴을 미루어보아, 불가능해보이지만.

 

 


 끝까지 태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새로운 걸 입에 물었다. 교단에 온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리셸은 고향에 잘 도착했을까. 우리가 처음만나고, 사랑에 빠진. 그 사랑스러운 거리에 말이다. 모든 게 끝나면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니 내가 돌아갈 곳은 이 숨 막히는 교단도, 마더와 바바가 있는 교회도 아니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그녀의 곁이다. 어서 일이 끝나야 할 텐데, 이제야 시작이라니. 홀로 에도에 남겨놓고 온 연인에 대한 걱정에 일이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금 당장 곁에 달려가서 여린 어깨를 품에 가두고 싶을 뿐이다. 그저 그거면 된다.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다. 사랑하는 이와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싶었다. 누군가에겐 당연하고 지극히 소소한 일상이 우리에겐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램이라니. 화살의 방향조차 정해지지 않은 짜증이 목울대까지 울컥 치밀어 거친 손길로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스치는 얇은 머리칼이 간지러웠다. 창밖으로 비가 빗금을 내리 그으며 흘러갔다. 하늘이 어두워 몇 시 즈음 되었는지 예측할 순 없지만, 체감상 곧 루베리에 그 인간이 예고한 시간이리라.

 


 ‘원수님, 실례하겠습니다.’

 


 생각을 마치기 무섭게 어깨 너머로 문이 가냘프게 울며 열렸다. 시간이 깨어진다. 금이 간 시간으로 어두운 빛이 새어나오며 나를 현실에 내동댕이 쳐버린다. 시간의 파편이 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올렸다. 잿빛이 가득한 하늘은 우중충하게 비를 뿌리고 있었다. 시선이 흐르는 빗물처럼 창가에서 미끄러져 문간으로 흘러갔다. 얼굴도 체형도 누가 누군지 분간이 가질 않는 옷을 입은 무리가 이열로 줄지어 길을 튼 상태였다. 루베리에, 그 양반은 적당히 하는 법이 없다. 하긴 이번 일은 적당히 하면 큰일 나지. 쯧, 하고 혀를 한 번 끌었다. 이래서 교단이 싫다니까. 여기 있으면 아가미를 잃은 생선처럼 숨이 막힌다. 담배연기와 함께 시린 숨을 뱉어냈다. 흐리게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자그마한 여성의 인영이 떠올랐다가 연기와 함께 산산이 흩어진다. 갈라진 연기 사이로, 시간의 틈새 사이로 익숙한 제자가 걸어 들어온다. 남성과 여성. 몸의 윤곽부터가 판이하게 다른데 왜 나는 아직 너를 보는 걸까. 온 몸을 휘감아오는 공기가 유독 차다. 입 꼬리를 살짝 휘어 올리며, 쓰리게 웃었다. 네가 없는 계절은 겨울처럼 시리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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