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배, 그거 알아요? 여름에 보는 바다와 겨울에 보는 바다는 다르다는 거.
단지 그 작은 호기심에 동했다. 허묵에게는 아무렴 상관없는 말에 불과했지만, 이게 대단한 일이라는 것 마냥 옆에서 쫑알대는 여자아이는 역시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그렇게 대놓고 말하지 않았다.― 허묵은 가벼이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잘 몰라. 그리고 어쩐지 채은은 마치 그 대답을 기다렸던 듯, 옆에 앉은 그의 손을 덥석 잡고는 말했다. 그럼 저랑 같이 보러 갈래요? 허묵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가 가르쳐 줘. 무엇이든 네 곁에서 함께 알아가고 싶으니까.
여기까지가 두 사람이 바다로 향하는 버스에 함께 오른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채은은 잔뜩 들뜬 마음으로 창가를 바라보며 연신 즐거워하다가 이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곯아떨어졌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작은 몸을 보다 못한 허묵은 작은 머리통을 한 손으로 조심스레 감싸 쥐고는 제 어깨에 기대도록 했다. 옅은 숨소리가 허묵의 주변을 아지랑이처럼 간지럽혔다. 초여름의 끝자락은 더위로 가득했지만, 이런 따스함은 역시나. 싫지 않았다.
방학식이 끝나자마자 떠난 바다 여행은 애석하게도 당일치기였다. 채은이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를 결국 꺾지 못한 이유에서였다. 채은은 한숨을 쉬며 발을 동동 굴렀고, 허묵은 실망감에 싸인 그녀를 향해 장난스레 속삭였다. 너 졸업할 때 되면 또 같이 가면 되지. 1박 2일로. 그 말이 담고 있는 저의는 너무나도 투명하고 새빨간 것이었다. 채은의 두 볼이 순식간에 불로 달군 듯 달아올랐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쑥스러움이 잔뜩 묻어난 말에는 또다시 장난으로 응수했다. 응? 그냥 여행 가자는 말에 왜 그렇게 과하게 반응하지? 채은의 패배였다. 이 능청스러움에 더 이상 말려들어서도 안 되는 건데. 그럼에도 즐거웠다. 그녀만이 볼 수 있는 장난스러운 그의 모습이었으므로. 두 볼은 여전히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입꼬리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위로 솟아 있었다. 어쩜 이렇게 귀엽지 않은 구석이 없는 건지. 허묵이 그녀의 볼에 짧게 입 맞췄다.
*
어쨌거나 두 사람은 크고 작은 해프닝 끝에 연모시 주변에 위치한 항구 도시에 발을 들였다. 아직 성수기에 접어들기 전인 탓인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최적의 조건이었다. 날씨 또한 완벽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그리고 깨끗한 수평선과 하늘을 닮아 맑은 해수면까지. 어느덧 중천에 떠오른 태양은 따사롭지만 조금은 따끔한 빛을 내며 제자리에서 빛났고, 해수면은 마치 하늘의 커다란 거울이 된 것처럼 그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과연 이보다 더한 절경이 있을까. 처음으로 여름의 푸른 바다를 마주한 허묵은 감정이 마음속에서 조용히 소용돌이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던 중 제 옆의 소녀에게 시선이 닿았다. 바닷가 앞에 서서 그 절경을 카메라 안에 열심히 담아내는 순수한 소녀의 표정이 그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부러 대단한 말을 나눈 것도 아닌데도 그녀는 지나치게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그렇게나 바다가 좋을까. 허묵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바다에 와서 좋아? 채은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즉답했다. 그러자 또 다른 질문이 날아들었다. 뭐가 제일 좋은데?
채은은 웬일인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해사한 표정으로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까지도 귀여웠다. 그리고는 그 작고 도톰한 입술로 또 한 번 사랑스러운 대답을 했다. 선배랑 같이 여름 바다를 볼 수 있는 게 좋아요. 그 해맑은 미소는 벚나무를 닮아 있었고, 깜찍하면서도 발칙한 그 대답은 세상의 갖가지 디저트를 한데 모아 놓은 듯했다. 아니, 그 디저트를 한데 모아 놓으면 아마 채은의 형체를 할 것만 같았다. 허묵은 기분 좋은 듯 입꼬리를 슬며시 말아올렸다. 분명 날씨는 여름인데, 왜 나는 아직 벚꽃의 따스함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인지. 아마도 평생, 이 따스함 속에 잠식될 것이리라.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었다. 그가 그녀의 곁을 떠나는 일은 결단코 없을 테니까.
그래서, 이제 좀 뭐가 다른지 알 것 같아요?
이번엔 채은으로부터 질문이 날아왔다. 허묵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겨울의 바다든 여름의 바다든, 허묵에게는 크게 의미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계절이 무슨 소용이고 바다의 색이 어떻든 그것 또한 무슨 상관이랴. 채은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색채였다. 채은으로 하여금 색을 보는 그였기에, 그는 그 계절의 변화에서 어떠한 유의미한 것도 과학적인 가치가 있는 것도 찾지 못했다. 그러니 이 호기심에서 시작된 실험은 실패일까.
아니, 그건 아마도 아닐 것이다. 가장 큰 변화를 지금 찾았으니까. 마치 진리를 발견한 학자처럼, 채은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허묵의 두 눈이 달처럼 휘었다. 이내 그의 큰 손이 채은의 볼을 감쌌다.
“네 표정이 다르네. 겨울 바다를 볼 때랑은 다르게.”
“응?”
“겨울 바다를 보러 갔을 때의 네 표정이 생각나.”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슬퍼 보이던 그 쓸쓸한 표정을.
허묵은 타인의 감정과 표정을 읽는 일에는 능했으나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고 표현하는 일에는 다소 서툴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있어 감정이란 사소한 놀음쯤에 불과한 것이었으니까. 적어도 채은을 만나기 전까진 그랬다. 사람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의 공유와 변화. 허묵은 이 과학적이지만 비과학적인 일을 자신이 직접 뛰어들어 탐구하고 싶었다. 인간의 주관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정말이지 객관적인 접근이었다.
그러던 중 채은을 만났다. 누구보다도 감정적이고, 또 누구보다도 표현하는 데에 적극적인 이 작고 유약한 여학생을. 허묵은 자신의 흑백 세상에 점차 색채가 더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너무나 자명하게도 곁에 채은이 함께하던 순간부터였음에 그 답이 숨어 있었다. 허묵은 곧 봄처럼 따뜻한 채은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얽어지는 부드러운 손가락의 온도가 서로에게 흘렀다. 그리고 이 작은 체온은 허묵에게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안정감을 선사했다.
고마워. 네가 내 곁에 있음에 감사해.
그리 말하던 입술은 곧 채은의 이마에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곁에서 더 많은 것을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비로소 접어든 여름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해안처럼이나 모든 것이 반짝이는 계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