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교통사고 및 사망에 대한 소재가 존재합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손찬오는 그날 그를 그렇게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저, 선배 좋아해요.’
붉어진 얼굴에 수줍은 웃음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을 보며 손찬오가 생각한 건 저 웃음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선배가 저를 반기지 않는 걸 알지만, 그래도… 다시 생각해주시면 안될까요?’
*
그날은 분명 사고였다. 손찬오가 어찌 할 수 없는 교통사고. 빗길에 차가 미끄러지는 건 드문 일이 아니며, 그로 인해 사고가 일어나는 일도 드문 건 아니었으나 하필 그 시간에, 그곳을 지나 네가 죽은 일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라는 말로 위로 받을 수 없었다. 울음소리가 가득한 날에도 비가 왔다. 진득한 공기가 제 몸에 닿아 발걸음을 느리게 만들었으며, 눅눅한 몸이 현실을 외면하게 해준다.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다. 너에 대한 죄책감으로, 너를 잃은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야지. 그래야만 해. 나는 너 못 보내. 난 너를 놓아준 적 없어. 울음소리 사이로 손찬오는 헛웃음을 뱉어낸다. 웃긴 일이지. 고백을 믿지 못했던 건 제 쪽이었다. 이제와서 놓아준 적 없다는 말 따위, 변명조차 되지 못하는데. 그리고 시선을 돌려 보이는 액자 속 웃는 얼굴은, 붉게 물들었던 그 얼굴과 똑같아 결국 현실로 이끌어낸다. 그건 분명 손찬오의 잘못이 아니었다. 운전자는 손찬오가 아니었고, 그가 길가에서 차도로 밀친 것도 아니었으며, 흐르는 피를 보고 도망가던 행인마저도 손찬오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모든 게 제 탓으로 느껴졌다. 적어도 그날, 너를 그렇게 보냈으면 안될 일이었다.
“…너, 언제까지 이럴 거야?”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이미 1년은 지난 일이야.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서 죽상이야? 네가 죽였어? 네가 뭐라도 했냐고.”
“최세민, 진정해…!”
“설연제 넌 답답하지도 않냐? 여기서 괜찮은 놈 하나 없는데 저 놈 혼자서…!”
“…형한테 너라고 잘도 부르는구만.”
손찬오는 귀에 꽂혀있던 이어폰을 빼고 최세민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달리 웃지 않는 입꼬리가 그의 상태를 알려준다. 정작 음악은 듣지 않았으니 최세민의 말을 놓친 건 아니었다. 뭐, 듣고 있었어도 목소리가 워낙 크니 전부 들렸겠지만. 손찬오가 채유하의 고백을 거절한 날, 그리고 다시 마주하는 그날에도 어김없이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미안. 지금은 무리야.’
손찬오가 내뱉은 목소리는 담백했다. 마치 고백이라도 할 줄 알았다는 듯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고민없이 답하였다. 거절의 답을 듣고도 채유하는 여전히 웃어보였지만, 그게 진실된 웃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표정에 변화가 있던 건 아니었다. 인사하고 돌아서는 순간까지 그는 웃고 있었고, 그저 그가 돌아간 후 화창했던 여름 하늘에 비가 내렸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는 오로지 손찬오의 착각이었다. 비가 올 거란 기상예보를 보지 못하고 나왔을 수도 있고, 봤는데 깜박 잊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날은 손찬오에게 있어 갑작스럽게 비가 온 날이었으며 다시 마주한 오늘도 비가 오고 있으니 손찬오는 제 답에 대한 채유하의 마음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무리 장마가 찾아오는 여름이라도 평생 짓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상태가 어떤데?”
“그걸 지금 몰라서 물어?”
손찬오의 물음에 최세민은 얼굴을 찌푸렸다. 최세민이 미간을 좁히는 건 숨 쉬는 일만큼 간단한 일이라 놀렸던 손찬오도 지금 그가 습관처럼 미간을 좁힌 게 아니라 제 태도에 화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맨날 실실 웃던 녀석이 이쯤만 되면 하루종일 말이 없어지고, 귀에는 하루종일 이어폰을 꽂은 채 남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최세민은 당장이라도 손찬오가 보여준 멍청한 모습을 나열하고 싶었으나 이 순간에도 상대를 외면하는 손찬오의 모습에 결국 뒤돌아 나갔을 뿐이었다. 그 뒤로 고개만 움직이던 설연제는 손찬오를 향해 고개를 까닥이고 최세민을 뒤따랐다.
“세민아, 네가 너무했어. 찬오 형은…”
“…괜찮은 척이라도 하지 말든가.”
“응…?”
“힘들면 힘들다고 말이라도 하라고!”
“세민아…”
채유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냈던 손찬오, 최세민, 설연제, 이하선은 각자만의 뚜렷한 성격이 있었고, 그들 사이를 대부분 중재해왔던 건 설연제나 채유하였다. 그들이 전부 한 사람을 짝사랑 하는 일은 없었지만, 결코 가벼운 존재는 아니었다. 언제나 함께 있었고, 앞으로도 함께 있을 줄 알았던 존재. 그러니 누구도 채유하의 죽음에 괜찮은 적이 없었고, 괜찮을 수 없었다. 그렇게 괜찮다는 말 따위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이 없던 그들과 달리 손찬오는 그날, 울음소리가 가득했던 장소에서 발걸음을 돌리던 날, 제 친우들을 보며 내뱉었다.
…난 괜찮아, 하고.
손찬오는, 분명 괜찮다는 말로 모든 게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매번 그래왔잖아. 난 괜찮아. 괜찮아. 어떤 일에도 괜찮았으니까, 나는… …몇 번이고 내뱉은 말이 웃기게도 결국 제자리 걸음이 된다. 괜찮다는 말 속에 숨겨진 말이 그를 벗어나지 못했다. …보내지 말아야 했다. 나도 네가 좋아, 라거나 네 대답에 조금이라도 망설였다면 없을 일이었다.
너를 믿지 못한 게 아니었다, 나는.
내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
그랬는데도, 너를 믿지 못한다고 말해 스스로를 향한 화살표를 네게 돌리고 만 것이다. 그건 손찬오의 잘못이었다. 분명 제 잘못인데, 용서를 구할 상대가 없다면 제 자신을 절벽으로 몰아세울 수밖에 없었다. 친우들이, 비록 빈 자리가 생겼어도 변함 없이 친구인 그들이 떠난 자리에 빗소리는 여전했다. 손찬오는 우산을 들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텅 빈 복도에도 저를 가득 채우는 건 오로지 비가 내리는 소리 뿐이었다. 이맘 때에는 늘 비가 왔으니 그는 우산을 잊은 적이 없었다. 아침 일찍 아무리 화창해도, 비가 온다는 소식 하나 없어도, 꼭 비가 왔으니 손찬오의 가방 안에는 작은 우산이 함께였다. 흐린 하늘을 향해 푸른색 우산을 펼친다. 더 이상 닿는 손길 하나 없으나 지금처럼 우산을 펼치면 그는 마치 떠난 이의 손길을 받는 기분이라 여겼다. 지금 내리는 비는 네가 보내는 말이며,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너의 말을 듣는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짓누르는 공기를 이겨내지 못한 채로.
앞으로 나아가는 길 속에, 오로지 우산에 닿는 빗소리만이 들려온다.
여름이었다.
그저, 네가 없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