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넓게 펼쳐진 풀밭.
사방엔 시야를 가리는 나무 한 그루조차 없었다. 저 멀리 웅장한 아발론 왕궁이 우뚝 솟아있는 것이 보였다. 왕궁 위로 뭉게구름 하나가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하늘도 파랗고, 햇빛도 포근했다. 좋은 날씨다.
올가는 시선을 옮겨 자신 앞에 서있는 바네사를 바라보았다.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뻣뻣한 자세로 주먹을 꾸욱 쥐고, 바네사는 올가와 살짝 거리를 둔 채 마주보고 있었다.
올가가 물었다.
“정말로 그 복장으로 하실 겁니까?”
기다란 치마 이야기였다. 바네사가 평상시에도 즐겨 입던 그 옷은 딱 봐도 높은 신분이 입을 법한 복장이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물 흐르듯 흔들거리는 치마와 레이스는 마치 한 마리의 잉어를 보는 것처럼 우아했다.
“실제 상황에선 복장을 고를 수 없으니까요.”
“왕녀 전하께서 그렇게 하고 싶으시다면.”
올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바네사가 그저 객기를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실전에선 복장을 고를 수 없다. 그러나 그렇기에 오히려 연습할 때는 움직이기 편한 복장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동작을 몸에 쉽게 익히고 이후 기습 상황이 발생했을 때 자연스럽게 그 동작이 나올 수 있다.
바네사가 배우고자 하는 것은 호신술이었다.
비록 바네사 개인은 싸움에서 유의미한 전력이 되지는 못하나, ‘알드 룬의 왕녀’라는 그의 입장은 알드 룬 해방군에게 의미 있는 동력이 되어준다. 상징의 힘은 강하다. 바네사는 그 존재만으로 군에게 엄청난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바네사는 매 전투마다 직접 나서서 지휘하고 같이 싸운다.
그러나 최근 바네사는 그 한계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난 뒤에는, 자신이 다음 전투에서도 무사히 잘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잘 하기는커녕, 살아 돌아올 수 있을 지조차 자신 없었다. 그래서 바네사는 혼자서도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원했다.
그것이 바네사가 리브리안의 군단장 올가에게 호신술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한 까닭이었다. 물론 부탁할 사람이야 아발론에 넘쳤지만, 저항군의 수장으로서의 고민을 잘 이해해줄 사람은 올가밖에 없다고 바네사는 판단한 것이다.
바네사의 판단은 절반 정도 들어맞았다.
올가는 바네사의 부탁을 수락해줬다. 그러나 그것은 올가가 바네사의 입장을 이해해줬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올가는 바네사의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물론,
한때 왕녀였던 신분으로 국민과 함께 제국군에 맞서 싸우는 바네사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올가는 생각했다. 바네사가 가진 상징의 힘이 굉장히 강력하고, 그건 단지 알드 룬 해방군뿐만 아니라 리브리안 저항군에게도 미친다는 사실을 올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네사의 호신술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일반인이 금방 익혀 실전에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럼에도 올가가 바네사의 부탁을 들어준 것은,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라고 올가는 생각했다. 올가는 그때 바네사의 눈빛을 보았다. 올가는 그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올가는 바네사에게 호신술을 가르쳐주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열 번째 수업이었다.
의외로 바네사는 올가의 수업을 잘 따라오고 있었다. 실전에서의 경험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었다. 이 정도의 실력으로는 괜히 나서 싸우려 해봤자 오히려 험한 꼴만 당하게 될 게 뻔했다.
“오늘은 어제 배운 검술을 응용해볼까 합니다.”
올가는 자신이 가져온 목제 검과 목제 방패를 가리켰다.
“방패로 막고, 칼로 공격하는 겁니다.”
바네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각자 칼과 방패를 들고 다시 서로 대치했다.
올가가 말했다.
“왕녀 전하께선 호신술이라 하셨지만, 사실 본 목적은 전투에서 직접 나서서 싸우는 스킬을 얻기 위함이시겠죠. 그러니까 왕녀 전하께서 저를 공격해보세요. 저는 그럼 왕녀 전하의 공격을 막고 반격해보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합을 맞춰봅시다. 아시겠습니까?”
바네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칼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곧 바네사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더니 바네사는 있는 힘껏 올가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올가는 대각선으로 내려오는 칼을 방패로 간단히 받아치고, 그 사이 생긴 틈으로 자신의 칼을 쑤셨다. 칼에 찔린 바네사는 큭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동작이 너무 큽니다.”
바네사는 풀밭에서 일어나 치마의 흙먼지틀 툭툭 털어냈다.
“다시 한번.”
올가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네사는 곧바로 공격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위에서 내려오는 공격이었다. 올가는 방패를 들어 바네사의 칼을 막고, 깊숙이 들어와 바네사의 가슴을 자신의 칼로 찔렀다. 방패로 쳐낸 칼이 바네사의 손에서 벗어나 풀밭 위를 굴렀다.
올가의 목검이 자신의 가슴 가운데에 푹 파고들자 바네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올가와 바네사의 얼굴은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바네사의 떨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아까부터 방패를 쓰지 않으시군요.”
올가가 말하자 그의 입에서 나오는 따뜻한 숨결이 바네사의 입술에 닿았다.
“왜 방패로 막지 않으시는 거죠?”
“오...... 올가 경의 공격이 빨라서......”
“왕녀 전하께선 충분히 막으실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럴 리가-”
“만약 처음부터 방패를 쓸 생각이 있었다면, 말입니다.”
올가가 말하자 바네사는 자신의 숨이 턱 막히는 게 느껴졌다.
“제 감상을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지금 왕녀 전하께서는 싸우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죽으려고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보입니다. 적의 칼에 일초라도 더 빨리 찔리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바네사의 흔들리는 동공을 응시하던 올가는 휴우 한숨을 내뱉고선 뒤로 물러섰다.
바네사는 땅을 응시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올가 생각이 맞았다. 바네사가 호신술을 배우고 싶어 했던 것은, 애초부터⸻⸻.
“다시, 한번.”
바네사가 입을 열자 올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이내 자세를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지 좋습니다.”
바네사는 풀밭 위에 내동댕이친 칼을 다시 주워들었다. 후우, 지그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던 바네사는 눈을 번쩍 뜨고 단숨에 올가와의 거리를 좁혔다. 이번에는 칼끝을 올가에게 향해 찌르는 방식이었다.
올가는 살짝 뒤로 물러서며 바네사의 칼을 자신의 것으로 쳐냈다.
“처음엔 왕녀 전하가 존경스러운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번 더 칼이 맞부딪혔다.
“하지만 요즘은 잘 모르겠습니다. 실은 국민들과 함께 맞서 싸운다는 건 핑계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사실은 그저 죽고 싶은 것 아닙니까? 삶에 대한 의지가 없기에, 목숨을 그렇게 쉽게 전장에 내던지는 것 아닙니까?”
“올가 경은 이해 못해요.”
“제가 이해를 못 한다고요?”
“저에겐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요. 제 뒤엔 국민들이 있고, 제 앞엔 억울하게 죽은 가족들이 있어요. 저는 제 목숨을 다해 저에게 주어진 임무를 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렇기에 전 살아야 해요.”
“자신의 목숨을 도구로 사용하는 순간부터 삶에 대한 의지가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칼이 또 부딪혔다.
“올가 경은 다른가요?”
“저 말입니까?”
“올가 경은 군인으로서 목숨을 다하는 것이 아닌가요? 올가 경도 결국 자신의 목숨을 도구로 삼는 것이지요. 스스로 말한 것처럼.”
“그렇지만 저는 쓸 만한 도구지요. 전문적인 도구.”
올가가 방패로 바네사의 칼을 튕겨내는 순간 바네사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러나 쓸모없는 도구를 가져가는 건, 결국 그걸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올가의 칼이 바네사를 향해 위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지기 시작한 바네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방패!”
올가의 외침에 눈을 뜬 바네사는 자기도 모르게 방패를 위로 들었다.
풀썩, 풀밭 위에 쓰러지는 동시에 바네사는 가까스로 올가의 칼을 방패로 막아냈다.
헉, 헉,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보세요, 막을 수 있지 않습니까?”
올가의 말에 바네사는 고개를 들고 올가를 올려다보았다. 올가가 바네사에게 손을 내밀자 바네사는 올가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가가 말했다.
“왕녀 전하가 저에게 호신술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의 눈빛을 기억합니다. 제 절친이었던 동료가 마지막 임무를 떠나기 직전 보여줬던 그 눈빛. 만약 제 그 눈빛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면 전 제 친구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올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았다.
“그 친구는 옷 속에 숨겨뒀던 폭탄과 함께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습니다. 덕분에 실패 직전이었던 작전은 가까스로 성공했지만, 저는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바네사와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죽으러 가는 사람의 눈빛.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왕녀 전하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람을 내버려두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기에...... 죽을 각오를 한 사람에게, 차마 죽지 못할 희망을 어떻게든 주고 싶었습니다.”
“제가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는 거군요.”
바네사는 올가와 잡은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무심코 실례되는 말을-”
“아니에요, 이제야 조금 알겠어요.”
바네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자꾸만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어요. 누군가가 가슴을 압박하는 기분. 전투에 나가면 자꾸 최전선에 나서려고 했어요. 저기에 가면 내가 죽을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마치 목줄이 채워진 것처럼 발이 앞으로 나갔어요. 저는 지금까지 그것이 제 책임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진짜 정체를 이제야 알겠네요. 저는......”
바네사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자신을 포기하려고 했던 거군요.”
올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네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었어요. 그건 곧 그들의 죽음을 의미하니까. 그래서 저는 강한 척 연기를 해야 했어요. 그리고 그것이 제 모습이라고 스스로 믿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사실은 ‘강한 나’를 핑계로 저는 제 나약한 자신을 버리려고 했던 거군요.”
“왕녀 전하께선 지금까지 충분히 잘 해오셨습니다. 만약 그게 정말 연기일 뿐이었다면 알드 룬 해방군은 지금까지 계속 버티지 못했겠죠. 처음엔 연기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것이 진짜 왕녀 전하가 맞습니다.”
“그렇지만......”
“왕녀 전하께는 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방패도 있습니다.”
올가는 바네사의 방패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자신을 지키는 것 또한 하나의 강함이죠. 이제부터 그것을 배우시면 됩니다.”
바네사는 자신의 방패를 내려다보았다.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다가도,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아, 가벼운 한숨을 내뱉고선 바네사가 올가에게 말했다.
“올가 경은 다정한 사람이군요.”
“그렇습니까?”
“저에게 방패를 쥐어줬으니까요.”
바네사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올가는 잠시 생각하다 같이 피식 웃었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할까요?”
“그럽시다.”
두 사람은 붙잡고 있던 손 그대로 악수 하고선, 다시 몇 걸음 떨어져 서로 마주 보았다. 올가는 바네사의 눈빛에서 초롱초롱한 빛을 발견했다. 방금까지 얼굴 위를 드리우던 먹구름이 사라지고, 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바네사가 발걸음을 떼자 올가는 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딱, 딱,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저녁까지 울려 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