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네사 경에게.
우선 종이의 질이 좋지 않은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소식을 전하기 위해 쓸 종이마저 찢고 구겨서 이불과 베개를 채우는 이곳의 사정을 알고 나니 제 것을 남겨두기 어려웠습니다. 녹은 양초를 다시 모아 굳히고, 잉크보다 사람의 피가 더 많이 흐른 장소에서는 사람이 사람으로 누릴 수 있는 유희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인지 느낍니다. 그러나 앞서 달려나가 위험과 절망의 앞에 선 군인으로서 후방에 전해야 할 소식이 있으니 저 개인의 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편지 뒷면에 답장을 쓰는 이유입니다. 댈 수 있는 핑계겠으나 당신의 감정마저 묵살하려는 시도는 아닙니다. 서운하시다면 다시 만났을 때에 털어놓으시거나 답장을 않는 투정도 저는 받아들이려 합니다. 다만 몇 번이나 읽고 접었음이 보여 부끄러우나 제가 잘 받았다는 사실을 증거하니 부디 속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외투의 가슴께에 들어갈 만큼 접다 보니 자국이 많이 남아 그렇습니다.
뒤집어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신의 거절은 잘 받아 보았습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반쪽의 인간이라 하셨습니다. 비록 멸망한 왕국이지만 왕녀의 신분으로 당신을 기억하는 국민이 살아서 당신을 기다리니 감히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연맹과 제국의 전쟁이 완전히 마무리되고 어떠한 권위와 편의도 보장받지 못하는 마지막의 마지막 사람에게 일상이 되돌아가는 날까지 차마 행복을 고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당신의 구분을 이해합니다. 당신의 거절이 어떤 대지에서 피어나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결론 내려졌는지 이해합니다. 바네사 경, 당신은 군인으로 키워지지 않았으나 이미 한 사람분 이상의 전쟁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해방군의 지도자로서 개인에게 부여된 의미와 생존의 무게를 저 또한 사람의 두 어깨로 느낍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과 되찾지 못한 땅, 수복하지 못한 명예와 무너진 성읍이 아직 눈에 선함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눈떠본 적 없는 현실에 밀어넣은 자들이 숨을 쉬고 무기를 쥐는데 맛있는 음식을 먹고 편안한 잠을 청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전쟁터의 모두가 이해합니다. 그러나 무례하게도, 저는 왕녀이자 군인이며 전쟁 속의 인간인 당신에게 정정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불꽃으로 점화하여 적군의 심장에 박혀 죽기 전까지, 모든 삶은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저는 리브리안의 군인으로, 총을 들도록 태어나지도 타인에게 강요당해 키워지지도 않았으나 오로지 제 자신의 선택으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적 또한 누군가의 가족이자 웃고 울 줄 아는 사람임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고, 동시에 어떤 마음도 총구를 흔들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결핍된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전쟁이 당신을 마모되게 했고 이미 잃은 것들을 되찾기 전까지는 타인을 갈구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네사 경, 알고 계십니까? 어쩌면 내포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 속에서 군인의 위치를 점하고 삶을 살아나가게 된 저도 당신과 같이 채워질 수 없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군화발에 짓밟혀 다치는 이들은 연약하고 힘이 없지만, 한 번 살아나면 들풀처럼 생명력을 되찾습니다. 뿌리를 박고 살아 온 대지와 그 위로 쌓아올린 집이 있기에 그들은 소박한 삶을 잃어버렸다가도 금세 되찾거나 가공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 거대한 것을 잃었습니다. 당신에게 가족은 국가였고 내게 가족은 전우였습니다. 한 번 무너진 국가는 다시 세워도 이전의 것과 동일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듯, 새로 충원되어 생사를 함께하게 된 군인들은 저마다 다른 사람들일 뿐입니다. 제가 잃은 이들은 황량한 마음 어딘가에 비석처럼 세워져 그 수를 늘려갑니다. 그것은 분명 결핍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군인이며 생존보다 보호를 우선하기에 타인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개인에게 사랑받아서는 안 되며 온전히 이 한 몸을 바쳐야만, 그래야만 승리의 여신이 아군의 깃발을 휘날리게 만들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네사 경.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함께 남은 삶을 일구어나가기를 원하는 마음을 잘못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에게 공존하는 가책이 당신의 마음에, 그리고 저의 마음에 쉴 새 없이 창궐하더라도 그것을 끌어안아 한 발의 총알로 발포할 용기가 저에게는 있습니다.
저라는 사람의 결핍은 선택으로 인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지키고 터전을 보전하겠노라 맹세했던 순간조차 저의 선택이었습니다. 한 발의 총알과 고장나기 직전의 무기를 들고 절벽 위에서 전우들의 죽음을 가능성 삼아 숨죽이던 것 또한 저의 선택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 다정하고 잔인한 당신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멈추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 거절을 거부하는 행위로 당신을 외롭고 결핍된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까지. 비록 제가 선택했던 모든 지표들이 옳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숨쉬고 있는 뜨거운 심장을 느낍니다. 겨울의 눈발과 전쟁터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올가 파블리첸코의 불타는 숨과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을 향한 멈추지 않을 갈망을 느낍니다.
그러니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을 내버려두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을 개인으로서 사랑받지 못하는 상태에 안주하도록 그저 응시하지 않겠습니다. 사랑이 내게 오길 기다리다 미련하게 잃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제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승전보와 함께 돌아가겠습니다.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리라는 선언보다 당신과 이 전쟁을 함께 살아가겠노라 약속하고 싶습니다.
부디 사랑이 당신의 마음에 들어앉아 죽어가도록 두지 마십시오. 아직 그것을 직접 만지고 달랠 수 없어 아쉽습니다.
올가 파블리첸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