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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 어때요, 잘 어울리죠?”

“잘 어울리십니다.”

 

칼같이 답변한 올가는 한 박자 늦게서야, 바네사가 물은 것은 제 손목에 달랑이는 팔찌에 관한 것이었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이런. 바네사는 일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이어 해사하게 소리 내어 웃었고, 올가는 불이 붙은 것만 같이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에 묻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잘 어울렸다. 웃는 것이, 바네사에게.

어린아이처럼 깔깔거리던 바네사는 다시 올가의 손목을 붙잡고는 팔찌 위를 두 손가락으로 감쌌다. 실룩거리는 입가에는 아직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느새 서늘해진 날씨에 두 뺨은 발갛게 달아올라 조금 얼룩덜룩했지만, 그조차 사랑스러웠으며 올가에게는 보기 좋았다. 흰 살갗 아래 선명하게 도는 연인의 혈색이,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이 올가의 머릿속을 얼마나 손쉽게 헤집어 놓았는지, 세상이 뒤집힌대도 알 리 없는 바네사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

 

“힘들게 고른 건데, 쳐다보지도 않고. 제대로 말해 주세요, 네? 어떤가요?”

 

따르기 어려운 명령은 아니었고, 바네사를 위한 것이라면 어차피 올가가 하지 못할 일은 얼마 없었다. 올가는 얕게 눈웃음을 치며 그대로 시선을 내렸다. 바네사가 답지 않은 실소를 피식거리는 것이 들리는 듯도 했다.

색노끈으로 꼬아 만든 간단한 팔찌였다. 가운데 영리하게도 매듭을 지어 놓아, 양쪽으로 비죽이 튀어나온 끄트머리를 잡아당기면 손목의 둘레에 맞게 길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올가가 어렸을 때 친구들과 몇 번 만들어 본 적도 있었을 정도로 흔한 물건이었다. 끈을 꼰 무늬가 낯선 것을 보면 알드 룬의 양식은 리브리안과 조금 다른 듯 보였지만. 중간중간 반짝이는 구슬이 끈에 꿰여 있기는 했어도, 어쨌든 그렇게 특별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걸 이렇게 솔직히 말해도 되려나, 고민하며 고개를 들려던 올가는 바네사의 손목에도 비슷한 팔찌가 걸려 있는 것을 알아챘다.

 

“같은 걸 두 개 사신 겁니까?”

 

바네사의 손목에 걸린 팔찌는 초록색 끈으로 엮어 앙증맞은 은빛 토끼 장식을 단 모양이었고, 바네사가 방금 올가의 손목에 매어 준 팔찌는 붉은 끈에 묘한 네모꼴 나무 조각이 달려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팔찌의 짜임새만큼은 공예에 흥미가 없는 올가의 눈에도 한 사람의 솜씨가 분명할 만큼 유사했다. 올가가 팔찌를 골똘히 뜯어보기 시작하자 바네사는 뿌듯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만들었어요!”

“……예?”

 

바네사는 올가의 손을 놓아 주고는 한 발짝 뒷걸음질하며 두 팔을 넓게 펼쳤다. 주변을 아우르는 듯한 동작에 올가는 저절로 바네사가 움직이는 대로 시선을 옮겼다.

 

“저쪽 가게에서 팔찌를 직접 만들어 볼 수도 있게 해 주더라고요. 올가가 생각나길래, 그냥 한 번. 잘 어울리나요?”

 

왕성을 둘러싼 도시에서는 가을을 떠나 보내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색색의 깃발이 휘날리고 길거리는 손님을 끌려는 상인들의 외침과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찬 가운데, 여염의 소녀처럼 넓은 치맛자락을 나부끼는 바네사가 한낮의 태양보다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어깨너머로 분수대의 물줄기가 푸른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살짝 기울여 쓴 밀짚모자는 눈가에 상냥한 그늘을 드리웠다. 그리 정교하지도 않은 팔찌의 은장식이 햇빛을 붙잡아 반짝 빛났다.

올가는 잠시 넋을 잃었다.

고대의 명화가 이런 모습일까, 흰 포석이 깔린 도로를 딛고 서 품을 연 채 웃는 연인의 형상이었을까. 둥근 눈매가 접히며 올가의 가슴 역시 쥐어짜이듯 벅차올랐다. 그 순간만은 바네사 뒤로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마차도, 시끄럽게 언성을 높이는 호객꾼도, 거리에 온통 북적이는 행인들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단 하나, 단 한 명. 그가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만이 그 앞에 있는 유일한 실제였다.

그리고 올가는 다른 손으로 팔찌 낀 손목을 잡으며 대답했다.

 

“잘 어울리십니다. 무척이나요.”

 

 

 

 

 

올가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왜냐 묻는다면 들 수 있는 이유는 넘쳐났다. 사랑.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먼저 용어를 정의해 보자. 사랑이 무엇인가? 애정, 좋아하는 마음, 아끼고 보듬으며 지켜나갈 이유. 어버이가 아이에게 갖고 연인이 연인에게 가지며 함께 피를 흘린 전우가 나누는 감정.

사랑의 예시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할가린 평원의 전투 때, 몰아치는 적의 마법 앞에서 그를 안고 나뒹굴었던 어린 병사의 피 섞인 비명이었다. 왜 나를 구했지, 중얼여도 돌아오는 말은 없었으나 올가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었다. 한순간의 충동과 그 충동을 이끌어 낸 오랜 경애. 전투가 끝나면 병사의 이름을 누군가에게 물어봐야겠다던 다짐은 의도치 않게 잊혔고, 올가는 다만 그 비명의 음색을 기억했다.

보라, 이것이 사랑이다. 혼란스러운 전장 한가운데에서 깨달음은 마치 폭풍우 속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너보다 십 년은 나이 어린 병사가 무작정 제 목숨을 던지게 하는 어리석음, 목숨만큼 무거운 값의 바로 그것이 사랑이다. 비명에서 배어난 핏물이 올가의 귓가를 흠뻑 적시며 흘러내렸다.

수도로 복귀하고 나서 자신이 아직 그 병사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는 사랑을 받는 것의 대가 역시 배웠다. 사랑은 원한다고 살 수도 없지만 원하지 않더라도 사게 되는 것. 깨진 심장으로 사랑의 값을 치른 젊은 장교는 더 이상 자신의 마음 역시 가볍게 내어 주지 않았다…….

 

“올가.”

 

가벼운 목소리가 상념을 깨뜨렸다. 알드 룬 왕성의 가장 높은 탑, 별을 보는 관측대 옥상에 걸터앉아 있던 올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바닥에 난 문을 돌아보았다. 문 아래 사다리를 밟고 위로 상체를 내민 바네사가 가볍게 한 손을 흔들었다.

 

“여기 있었네요? 마틀레르가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모를 뻔했어요.”

“잠이 오지 않아서 말입니다. 바네사, 당신께선 오늘 늦게까지 일이 있으시다더니.”

“으음, 군주의 특권을 행사해 위임해 버렸죠.”

 

나직하게 웃은 바네사가 올가의 옆으로 다가왔다. 올가가 천장 들보라든지, 나무 꼭대기라든지, 지금처럼 옥상의 난간에 앉아 있노라면 바네사가 조금씩이라도 내보이던 불안한 기색은 언제부턴가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바네사는 위태위태하게 두 다리를 난간 바깥으로 뻗은 올가의 허벅지에 한 손을 얹으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달이 뜨지 않은 그믐밤이었지만, 엘프의 시력은 고운 입가에 걸린 미소를 너끈히 읽어 냈다.

바네사의 손목에는 아직 며칠 전 만들었다던 팔찌가 매여 있었다.

바네사는 난간에 다른 쪽 팔꿈치를 올리고서 부드럽게 눈매를 접어 웃었다. 올가는 제 심장이 한 박자를 건너뛰는 것을 느꼈다.

 

“별을 보고 있었나요?”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시제를 고치는 대답에 잠시 눈을 동그라니 키웠던 바네사는 이내 두 뺨을 붉혔다. 제 입 밖으로 나간 말보다는 어째 그 홍조가 더 낯부끄러워, 올가는 시선을 돌리며 정말로 지평선에 걸린 별을 바라보았다. 알드 룬의 왕성은 지대가 높았고 이곳에서 보는 별은 때로는 내려다보인다는 인상을 주고는 했다.

올가가 조금 더 낭만적인 사람이었다면, 이 밤을 두고 보석처럼 빛나는 시간이라 했을 터였다. 서늘하지만 춥지 않은 공기, 끊어진 진주 목걸이처럼 반짝이는 은하수, 검푸른 공단(貢緞) 같은 하늘. 허벅지를 감싼 온기를 제 손으로 덮으며 올가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겨울바람 특유의 알싸한 향이 폐부를 채우는 가운데 송진과 잉크의 냄새가 섞여들었다. 바이올린 활과 펜, 음악가이자 알드 룬의 왕인 누군가의 흔적. 연인의 손등은 어린 짐승의 숨결처럼 부드러웠다.

금보다 값비싼 대리석을 갈아 빚고 고대의 불을 지펴 생명을 불어넣는다 한들 이와 같을 수는 없었다. 홀로 지새는 천 번의 밤도, 빛의 장막이 춤을 추는 북부의 극야도, 이 찰나의 순간에 비하지는 못할진대.

바네사는 손을 돌려 올가의 손과 깍지를 꼈다. 맨다리에 얽힌 새끼손가락 둘이 닿았다. 손가락을 펴 드러난 살갗을 슬며시 쓸며 바네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춥지 않나요, 올가?

 

“괜찮습니다. 아직 제대로 된 겨울은 아닌걸요.”

“거의 그 정도 날씨인데요? 올해는 추위가 빨리 오려나 봐요.”

“당신께서 추우시다면 내려갑시다.”

 

바네사의 손가락이 멎었다가, 다시 올가의 손 위로 겹쳐졌다. 올가는 깍지 낀 손을 들어 난간에 기대선 바네사의 뺨에 대었다. 손등에 닿는 체온이 조금 식어 있었다. 하지만 바네사는 올가의 손등에 얼굴을 살짝 비비고는 눈을 들어 올가를 응시했다.

 

“잠이 오지 않는다면서요?”

 

사랑을 정의했으니, 그렇다면 이제 믿음을 논할 차례다.

바람이 불어 바네사의 머리카락을 조금 흩뜨렸다. 문득 올가는 짧은 단발에 손을 엮어 넣고 싶다는 충동에 휩쓸렸다. 사랑스러운, 사랑하는 사람. 얼마 전 왕의 생일을 떠나보낸 알드 룬은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휘청거리고 있었고, 모든 경계는 넘기 위해서는 근거 없는 믿음을 요구했다. 어둠에 젖어 짙어진 두 눈동자가 올가를 향하고 있었다. 미묘한 행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젠 잠들 수 있을 겁니다.”

 

올가는 잠시 주저한 끝에 비로소 대답했다.

 

“당신께서 제 곁에 계신다면요.”

 

바네사의 정수리에 입을 맞춘 올가는 훌쩍 다리를 넘겨 난간 안쪽에 내려섰다. 놓친 손을 다시 잡으려 팔을 뻗자, 그제야 바네사가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작게 소리 내어 웃은 바네사는 두 손으로 천을 탁탁 쳐 펴고는, 올가가 미처 뭐라 말하기도 전에 포옹하듯 바짝 붙어서 올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쪽, 볼에 닿고 떨어지는 말랑한 감촉에 놀라 올가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은 춥지 않다고 해도, 앞으로는 쌀쌀해질 테니까. 당신이 늘 따뜻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바네사.”

“흐음, 올가.”

 

단호하게 이름을 부른 바네사가 곧이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올가는 제 어깨에 둘러진 숄의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굵은 털실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 안에 담긴 연인의 애정은 더더욱…….

사랑을 믿는다는 것은 사랑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는 달랐다. 사랑은 존재한다. 적어도,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합의된 개념이 실존할 수 있는 만큼은 존재한다고, 올가는 기꺼이 단언할 수 있었다. 정의(正義)와 자유와 희망과 국가가 존재한다면 사랑 또한 존재한다. 그렇다면 사랑을 믿는 것은 그것들을 믿는 것과 같은 일일 터였다.

올가는 정의와 자유와 희망과 국가를 믿었고 그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을 각오했다. 올가는 신은 믿지 않았기에 신을 위해 싸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올가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누군가 그에게 사랑을 위해 싸우라 명했다면 그는 사랑이 그의 의무인지를 물었을 것이다. 달리 말해 사랑은 그의 신념에 포함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올가 파블리첸코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 자신이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었던가요?”

 

바네사는 까르륵 웃으며 올가의 품 안으로 안겨들었다.

 

“글쎄요, 오늘은 이게 처음인 것 같네?”

 

 

 

그 후 한동안 알드 룬 왕성의 사람들은 진귀한 풍경을 매일같이 보게 되었다. 리브리안 굴지의 영웅, 기약 없는 장기 휴가를 즐기는 중이래도 누구 하나 감히 기강을 지적할 수 없는 군인의 정석이 조악한 숄을 뒤집어쓴 채 성안을 활보하는 모습이었다. 연보랏빛 바탕에 어설픈 줄무늬가 분홍색 갈지자를 그리는 숄은 위풍당당한 걸음걸이에 맞춰 개선장군의 망토처럼 휘날렸다.

어라, 저거 전하께서 집무실에서 뜨시던 것 같은데? 용감한 시녀 한 명의 증언에 이어 몇몇 대신들도 며칠 전까지 바네사의 무릎 위에 담요처럼 얹혀 있던 뜨갯감을 기억해 냈다. 사랑받는 왕의 뜨개질 솜씨를 욕할 국민은 존재하지 않았다. 좋을 때다, 신혼 같네, 파블리첸코 경 그렇게 안 봤는데 - 불경함을 아슬아슬하게 면하는 몇 마디가 오간 후 대부분은 입을 다물고는 했고, 덕분에 의아한 수군거림은 잦아들었다.

그렇다고 힐끔거리는 시선까지 멈춘 것은 아니었다.

 

“귀여워서 그래요.”

 

간결하게 답한 바네사가 올가의 머리카락에 다시 한번 빗을 꽂아 넣었다. 서너 번 감은 끝에 나뭇가지며 진흙은 대충 씻겨 나갔지만, 긴 은발은 혼자서는 도저히 가눌 수 없을 만큼 엉켜 있었다. 야전 저격 시범을 보이기 전, 고이 개켜 치워 두었던 숄을 꼭 끌어안고 등 없는 의자에 앉은 올가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귀엽……다고요?”

 

“그럼 제가 뜬 숄이 귀엽지 않다는 말씀이신가요?”

 

어째 처음엔 그걸 말씀하신 게 아닌 것 같은걸. 올가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바네사는 콧노래까지 불러 가며 거의 나비 꼴로 매듭이 지다시피 한 머리카락을 살살 풀어냈다. 올가는 손끝으로 숄 겉면을 쓸며 가만히 바네사의 손길대로 고개를 기울였다가, 다시 똑바로 세우며 정돈이 다 끝나기를 기다렸다. 다정하고 반복적인 행위에 모르는 새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직 젖은 감이 남은 머리끝을 손가락 사이로 집어 보며 바네사는 조금 안타까운 듯이, 하지만 밝은 말투로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머리를 묶고 나가라고 그랬을 텐데요. 전쟁 때도 항상 길게 늘어뜨리고 다니셨으니까,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올가는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펴며 부러 담담하게 답했다.

 

“전쟁 때는, 스스로 뛰어나다 여기는 검사가 흰옷을 입는 것과 비슷한 이유였습니다.”

 

빗 끄트머리가 귓등을 살짝 건드렸다. 바네사의 당황을 느낀 올가는 몸을 조금 뒤로 기울이고는 쓰게 웃었다. 의자는 꽤 높은 편이었고, 고개까지 젖히자 올가의 정수리는 딱 바네사의 가슴놀이에 닿을 위치였다. 올가는 바네사와 거꾸로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마쳤다.

 

“검은 옷에는 피가 흘러도 표시가 나지 않죠. 흰옷은 금방 물이 듭니다. 저는 사령관이자 저격수였고, 또한 게릴라전을 주된 책략으로 삼는 전술가였습니다.”

“붙잡히지 않는다는 뜻이었군요. 불패(不敗)의 증거.”

“이번에는 모처럼 잡혔지만 말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사격 시합에 대비하기 위해 훈련 중이던 바네사의 근위대는 - 정확히는, 근위대장이 - 이번에도 빼놓지 않고 올가의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시범마다 올가에게 시달려 온 근위대원들은 급기야 왕실 사냥터에 구덩이를 판다는 기상천외한 술수를 부렸고, 올가는 뜻밖의 상황에 꽤 낭패를 겪고 말았다. 필중의 저격수라는 별칭은 허명이 아닌지라, 결국 목표물이었던 허수아비에 페인트 탄을 정확하게 맞추기는 했으나 진흙 괴물 꼴을 면하지는 못했다. 시범이 막 끝났을 때 올가는 그로서는 퍽 드문 불평을 내뱉어 바네사를 깔깔거리며 웃게 했던 터였다.

제게 당했던 제국군 장교들의 심정을 알 것 같습니다. 이렇게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다니 영 불쾌한데요.

제풀에 놀란 듯 입을 막고 웃는 바네사 앞에서 상한 기분을 오래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올가는 곧 산사태에서 기어 나온 꼴로 가능한 한 기품 있게 근위대장과 악수했고, 터덜터덜 사냥터 옆의 개울로 사라졌다. 머리카락이며 옷에서 흙탕물을 쥐어 짜내고 나서야 올가는 시녀장의 허락을 받아 왕성 안의 욕실을 쓸 수 있었다.

바네사가 즐거워했으니까 됐지. 올가는 머리카락을 걸레 빨듯 주무르며 생각했었다. 어울리지 않는 숄을 걸치고 다니는 것도, 바네사가 만들었다는 점만 아니면 별 볼 일 없는 팔찌를 빼 두지 않는 것도, 그런 그를 볼 때마다 환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 별빛보다 맑은 눈에 기쁨이 서리게 하기 위해서라면 제가 가진 무엇이라도 바치고만 싶었다.

이제 바네사와 그의 침실에서, 바네사가 마저 머리카락을 빗을 수 있도록 도로 고개를 앞으로 숙이며, 올가는 곰곰이 생각을 이어 나갔다.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이 웃어 주기만 한다면 진흙탕에 백 번, 천 번이라도 구를 수 있는 것도, 무엇보다 소중한 조국을 떠나 적지 않은 시간을 온전히 내어 줄 수 있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알드 룬의 병사들에게 저격술을 가르치지는 일은 없겠지만, 근위대의 경호는 몇 주에 한 번씩 시험하고야 마는 것 역시.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올가는 문득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상이 향했던 방향을 알아차리고는 의식을 되감았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서?

 

“자, 다 됐어요!”

 

바네사는 흐뭇하게 선언하며 한 손으로 올가의 머리를 토닥거렸다. 정신을 차린 올가는 날랜 동작으로 의자에서 내려왔다가, 곧장 뒤통수를 더듬었다. 머리카락이 젖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무게감이 익숙하지 않았다.

 

“묶으신 겁니까?”

 

바네사가 배시시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보니까 나름 색다르네요? 다음에는 땋아 봐도 좋겠어요. 느낌이 어때요?”

“무엇으로…….”

 

집게 꼴 머리핀인 모양이었다. 예민한 촉각은 핀의 넓적한 부분에 박힌 수많은 둥근 돌기를 감지해 냈다. 잡히는 것들은 매끈한 자갈 같았지만, 그게 정말 돌일 공산은 크지 않았다. 올가의 표정이 흐려지는 것을 본 바네사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장식이 좀 있기는 한데, 제가 오래 쓰던 거예요! 저보다는 올가한테 더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해서, 꽂아 봤어요. 빼지 마세요, 네?”

 

걱정스럽게 찌푸려진 얼굴에 대고 더는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올가는 조금 전 바네사가 지었던 대로 따라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쁩니까? 올가의 입에서 쉽게 나오지 않는 질문에 바네사는 열성적으로 응답했다. 네! 아,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상큼해 보여요……가 아니라. 음. 으으…….

 

“사랑스러워요.”

 

적당한 단어를 찾은 바네사는 고개를 숙여, 올려 묶은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목에 짧게 키스했다.

 

“그냥 가질래요? 저는 이게 편하고 좋은데.”

 

올가는 귓가로 열이 쏠리는 느낌에 다짜고짜 바네사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푸흐흐 흘러나오는 웃음에 따라 바네사가 작게 몸을 떨었고, 그러면서도 두 손을 올가의 등 뒤로 모아 잡는 것은 잊지 않았다. 숄을 쥔 손으로 바네사의 날개뼈 언저리를 다독이며 올가는 낯익은 향을 들이쉬었다. 품 안의 온기가 애틋하다 못해 당장 삼켜 버리고 싶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마침 그들은 침실에 있었다.

정숙한 포옹이 애무로 변해 가고, 가벼운 입맞춤이 깊어지며 벌어진 입술 새로 혀가 섞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 머리를 풀려 올린 손을 바네사가 붙잡았다. 그러지 마요. 정말 예쁜데, 진짜로. 순순히 명에 따른 올가는 그대로 손을 내려 바네사를 확 안아 들었다. 허리를 잡힌 바네사가 웃음을 터뜨리며 올가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항의도 소용이 없었고, 어차피 올가는 두 눈을 감고 손까지 묶어 버리더라도 그들의 침실 안에서는 능숙하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침대에 등을 붙이고 누운 바네사가 올가의 턱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며 말했다. 저녁 식사는 어떡하죠? 대답 대신 올가는 연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잠든 바네사의 몸 아래 깔린 숄을 바라보다 말고 올가는 머리핀을 손안에서 도륵 굴렸다. 유리창으로 새어드는 저물녘의 햇살에 푸른 사파이어가 검은색에 가까운 자색으로 반짝였다.

생각의 두려움은 한 번 싹을 틔운 관념을 쉽사리 뿌리 뽑을 수 없다는 데 있었다. 화려한 머리핀에 한 번, 연인의 평온한 얼굴에 한 번,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 써 온 침실에 한 번, 정처 없이 옮겨 가던 시선은 끝내는 무겁게 감긴 눈꺼풀에 가로막혔다.

사랑을 믿지 않았을 때는 고려할 필요조차 없던 의문이었다. 올가는 이제 사랑을 믿는다. 그를 위해 목숨을 걸 수도, 아예 내던져 버릴 수도 있었다. 한데 당신의 사랑은. 당신의 사랑을, 내가.

믿어도 될까?

 

 

다음 날 점심때, 바네사와 식사하기 위해 집무실을 찾은 올가가 그 핀으로 머리를 고정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바네사는 환하게 웃음 지었다. 올가는 하마터면 그 반짝거리는 기세에 눌려 샌드위치가 담긴 쟁반을 통째로 떨어뜨릴 뻔했다.

 

“오늘도 묶었네요?”

“마음에 들어 하셨던 것 같아서 말입니다.”

 

쟁반을 내려놓을 자리를 만들어 주며 바네사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봐도 잘 어울려요! 와, 맛있겠다!”

 

순간 발이 꼬였던 올가는 두 번째 말은 샌드위치를 가리킨 것이었다는 점을 뒤늦게 깨닫고는 티 나지 않게 입매에 꽉 힘을 주었다.

식빵 사이에 얇게 저민 치즈를 끼우고, 올리브와 매운 소스를 잔뜩 얹은 샌드위치는 바네사가 점심으로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올리브 대신 짭조름한 햄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베어 물며 올가는 그날 아침 바네사가 처리해야 했던 일에 관한 이야기를 엷은 미소와 함께 경청했다.

바네사는 알드 룬을 무척 아꼈고, 알드 룬의 사람들은 그만큼 바네사를 우러러보았지만, 일국의 왕으로서 백성에게 털어놓지 못할 일들은 늘상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올가는 때때로 바네사가 타국의 고위 장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데는 거리낌이 없는 까닭을 고민하다가도, 공사를 철저히 구분하자는 다짐을 되새기고는 했다. 어차피 바네사도 국가 기밀을 올가 앞에서 흘리는 식으로 올가에게 부담을 지울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내무대신의 끈질긴 고질병이라는 건망증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바네사는 잽싸게 샌드위치 한 쪽을 해치웠다. 잠시 말을 멈추고 볼이 불룩해지도록 빵을 씹는 모습이 꼭 겨울 양식을 저장하려는 다람쥐 같았다.

 

“천천히 드십시오, 바네사.”

“다른 건 다 참아 주겠는데, 왜 그렇게 국혼 이야기를 해 대는지! 제가 결혼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기라도 하나요?”

 

저격수의 소양은, 신중함. 가까스로 책상을 걷어차는 꼴을 면한 올가는 후다닥 입안에 든 음식을 씹어 삼키고는 되물었다.

 

“국혼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죠? 어처구니가 없어서 정말. 나이 드신 분이니까 참고는 있지만, 조만간 심한 말을 해 버릴지도 모르겠어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바네사는 쟁반 위의 주전자를 들어 빈 커피잔을 채웠다. 하지만 올가는 그만큼 대수롭잖게 이 주제를 넘길 수는 없었다. 절반 남짓 먹은 샌드위치가 접시 위에 도로 내려 놓였다.

그리고 올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매일 내게 사랑을 속삭이는 당신께 그저 고백해 버릴까, 실은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두렵다고? 말도 안 되는 의심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상식적인 생각을 떨쳐 내기가 그렇게 쉽다면, 세상의 수많은 오해며 갈등은 애초에 생겨나지를 않았을 테지. 이런 일로 불안해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올가는 불안했다.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저 스스로 한심하기만 했다.

그래, 정말로 멍청한 짓이었다. 사랑을 믿지 않았을 때조차 올가는 바네사를 믿었었다. 지리멸렬한 항쟁의 도중에 흘러오는 소문의 주인공, 전설 같은 승리의 여신을 믿었다. 바네사는 사랑을 논하며 거짓을 말할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을 믿는 것과 사람의 사랑을 믿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만약 바네사가 몇 달이면, 몇 년이면 끝날 감정을 그저 착각한 것뿐이라면 올가는 진실을 버텨 낼 자신이 없었다. 당장 가슴에 구멍을 내며 질겅거리는 불안조차 가누지 못하는 꼴이었다.

말도 안 되는 불안, 말로 풀어낼 도리가 없는 불안이었기에 올가는 다만 침묵을 지켰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데, 이제는 그 사랑을 믿는데. 나의 사랑은 확언할 수 있되 당신의 사랑은 오직 당신의 증언으로써만 믿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으, 그래도 뒤에서 욕하는 건 하면 안 되는 일이겠죠.”

 

바네사가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올가의 마음속이야 어떻든 바네사는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올가 파블리첸코는 상황이 심각하게 치달을수록 제 표정만큼은 쉬이 다스리는 철저한 군인이었으므로.

그 사실이 갑작스레 못 견디도록 원망스러웠다. 올가는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이 남긴 샌드위치가 올라 있는 접시와 커피 주전자를 정리했다. 원래 바네사와 함께 조금 더 오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어지러워 도저히 바네사를 곧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주전자를 쟁반 위로 올리는 손은 총을 겨누던 때와 마찬가지로 좀처럼 떨리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진득하니 늘어졌다.

 

“벌써 가게요? 할 일이라도 있……. 올가!”

 

손이 미끄러지며 주전자가 파삭 깨져 부서졌다. 올가는 얼떨떨하게 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일부러였나? 미처 답을 찾기도 전에 뜨거운 커피에 젖은 오른손을 감싸는 무언가가 있었다. 바네사가 흰 손수건으로 다급하게 커피를 닦아냈다.

 

“세상에, 괜찮아요? 다쳤어요? 이럴 게 아니라, 찬물에라도 식혀야…….”

“아뇨.”

 

무작정 바네사의 말을 끊은 올가가 손수건을 빼앗다시피 건네받고는 오른손을 벅벅 문질렀다. 끓는 물은 아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부끄러움과 약간의 죄책감에 저절로 동작이 거칠어졌다. 그는 빠르게 책상 위로 엎질러진 커피까지 닦은 후 도자기 조각을 정리하려 손을 뻗었다. 시녀를 부르면 될 것을, 그러나 바네사 역시 직접 부서진 파편을 종이 두 장으로 모아 쟁반 위로 옮기고 있었다.

 

“화상을 입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따 살펴보고 필요하다면 냉찜질을 하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베이실지 모릅니다.”

 

바네사는 올가를 올려다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제가 어린아이도 아닌데요, 뭘. 그나저나…….

 

“아쉽게 됐네요. 원래 다음 주에 주려고 했었는데.”

“예?”

“손수건 말이에요. 자수는 다 놓았지만, 그래도 알맞은 때라는 게 있으니까. 시합 날에 드리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더러워졌으니…… 어휴, 버려야겠어요.”

 

올가는 손에 쥔 손수건을 한 번 힐긋거리고는 저도 모르게 다시 내려다보았다. 젖지 않은 부분의 접힌 선이 명확하게 각이 져 있는 것을 보니 새것이었고, 아마 바네사가 한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듯했다. 올가는 손가락이 조금 따끔거리는 것마저 잊고 손수건을 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야 할 텐데, 떨리는 목소리는 좀처럼 그의 의지를 따라 주지 않았다. 어리석은 한 마디가 제멋대로 흘러나왔다.

 

“요즘 자주 챙겨 주시는군요.”

“부담스러운가요?”

 

바네사의 어조는 방금까지 깨진 주전자에 놀라 있었던 것을 참작한다면 퍽 평온했다. 선물에 대한 심드렁한 반응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선물이 부담스러운지를 알고 싶어서 하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올가는 솔직한 심사를 고백할 수 없었다.

갈색 얼룩이 진 손수건에는 낯선 문장(紋章)이 수 놓여 있었다. 알드 룬 왕가의 방패 위로, 올가가 이끌었던 리브리안 저항군의 단순한 상징이 은빛 실로 합문(合紋)된 모양이었다. 바네사가 묻는 부담은 단지 한 뼘 남짓의 비단에 대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올가는 쉬이 넘겨짚었다. 그는 귀족 출신이 아니었으나 연인을 위해서라면 귀족사회의 예법쯤은 기꺼이 익힐 수 있었고, 지금 이 순간, 그 지식은 날카로운 가시로 변해 올가의 양심을 쿡쿡 찔러왔다.

문장의 결합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올가는 단호하게 말하고는 젖은 손수건을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선물로 주고받는 용도의 손수건은 원래 사용되는 법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바네사가 분명 공을 들여 준비했을 물건이 버려지게 둘 수는 없었다. 바네사가 조금 커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올가는 다시 한번 단언했다.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전혀요.”

 

그러나, 이토록 여상히 건네어지는 증거에도, 응어리가 진 듯 목을 메게 하는 불안은 어째서 사라지지 않는가. 올가는 주머니 속에서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쓸데없는 잡념이 잦았다.

 

 

 

“올가, 잠시만요!”

 

사격장으로 향하는 올가를 멈춰 세우고서 바네사는 올가에게 작은 상자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평소에는 관리인들만이 오가던 사냥터는 오늘만큼은 윤이 나게 차려입은 귀족과 제복을 갖춘 기사들로 북적였고, 그 틈바구니에서 관도 쓰지 않은 채 올가를 찾으러 온 바네사는 장난꾸러기 꼬마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단 상자를 건네받은 올가는 까슬한 천으로 덮인 겉면을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수건은 받았습니다만…….”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걸 드리고 싶었어요.”

“감사합니다, 바네사.”

 

올가는 저번의 결례를 교훈 삼아 일단 인사부터 한 후 상자의 고정 장치를 찾아 풀고 덮개를 들어 올렸다. 상자의 내용물보다 바네사의 안색을 살피는 데 더 정신이 팔려, 상자 속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보려니 두어 번 눈을 깜박여야만 했다.

 

“……브로치입니까?”

 

바네사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수건에 자수 되어 있던 것과 똑같은 문양이 은으로 만든 브로치에 정교한 솜씨로 구현되어 있었다. 아침 햇빛이 거울처럼 티 없는 금속에 무지개 같은 광택을 입혔다. 올가는 반쯤 홀린 듯이 엄지로 브로치 한가운데 박힌 작은 단백석을 눌렀다가, 매끄러운 감촉에 일어난 작은 충격을 눌러 삼켰다.

이미 올가는 바네사가 주었던 손수건을 최선을 다해 - 보다 못한 세탁부가 차라리 자신이 할 테니 파블리첸코 경은 올라가 쉬시라고 할 만큼 - 박박 빨아 지니고 있었다. 옛 기사들처럼 투구 뒤쪽에 매달지는 못하더라도 갖고 다니는 것쯤은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혼자 가끔 꺼내 보는 손수건과 명확하게 내보일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브로치는 경우가 달랐다. 올가가 브로치를 꺼내지도 않은 채 망설이자 바네사는 흥 참을성 없는 소리를 내고는 직접 브로치를 집었다.

 

“가슴 대 봐요, 올가.”

“제가 할 수 있습…….”

“에이, 얼른!”

 

능숙하게 겉옷 옷깃에 브로치를 달아 버린 바네사는 올가의 어깨를 탁탁 치고는 밝게 미소 지었다.

 

“가서, 우승하고 돌아오세요.”

“왕께서 명하시는 대로.”

 

나의 왕. 난데없이, 어쩌면 바네사의 악동 같은 분위기 덕분에 솟구친 충동에 따라, 올가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손으로 권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바네사는 깜짝 놀라 제 입을 가렸다. 맑게 터져 나온 연인의 웃음소리는, 그가 바네사와 헤어져 사격장까지 남은 길을 마저 걷는 동안에도 내내 즐거운 음악처럼 그의 귓가에 남아있었다.

 

 

매년 초겨울이면 열리는 시합을 위해 한동안 왕성은 내내 분주했었다. 행여나 위험이 있을까, 사냥터에 함정까지 파 가며 - 올가는 머리카락에 덕지덕지 엉켰던 진흙이 떠오르자 짐짓 몸서리를 쳤다 - 훈련한 근위대는 물론이고, 시합에 참여하든, 참여하지 않든 이를 축제처럼 여기며 잔뜩 기대해 온 사람들 덕에 무사히 열린 시합은 그에 걸맞게 몹시 성대했다.

올가가 시합에 참여하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었다. 짐승을 사냥해 본 적은 없는 까닭에 과녁을 세워 두고 하는 경기에만 발을 들일 테고, 애초에 몇 번 총을 쏜다고는 해도 우승은 양보할 셈이었었지만……. 그의 왕은 우승을 명했다. 그의 국가의 왕이 아니라 그의 왕, 그의 바네사가. 올가는 설핏 웃으며 겉옷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대부분 사람의 관심이야 실제 사냥이 이루어지는 벌판이나 사교의 장이 된 막사 쪽에 쏠려 있었으나, 사격장에도 적지 않은 수의 참관객이며 경쟁자들이 자리했다. 그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든 올가는 사격장 한쪽의 대기석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두 팔에는 키클롭스 대신 흔히 쓰는 경기용 소총이 안겨 있었지만,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그의 실력 가장 뛰어날 것은 대 볼 것도 없이 자명한 사실이었다.

긴장은 되지 않았다. 설사 표적을 놓친다 해도 그의 위치를 잡아내고 응사할 적군은 없었고, 더군다나 그는 제 실력을 자신했다. 그가 이길 것이다, 반드시.

이겨야지. 명하셨으니.

 

“아, 파블리첸코 경!”

“마틀레르 경?”

 

대기석에서 참가자들을 통솔하던 마틀레르가 올가를 보고는 반색했다. 가볍게 목례한 올가는 마틀레르가 성큼성큼 걸어 그에게 다가오자 조금 주춤하고는 허리를 세웠다. 마틀레르에게는 어째서인지 올가에게 연인의 부모님이라도 뵙는 기분을 갖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탓이었다. 올가야 굳든, 말든, 능청스레 그에게 접근한 마틀레르는 올가의 등을 시원하게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브로치를 받으셨군요?”

“알고 계셨습니까?”

“제가 소개해 드린 세공장에게 의뢰하셨으니까요. 이렇게 보니 꽤 멋스럽습니다.”

 

올가는 머쓱하게 브로치를 한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마틀레르가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토끼풀도 아직 달고 계시고요.”

“예?”

 

마틀레르는 올가가 팔을 들며 소매가 내려가 드러난 손목을 가리켰다. 팔찌 말입니다. 올가는 처음 받았을 때부터 그저 묘한 네모꼴이라고만 생각했던 나무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많이 조악하기는 하지만, 토끼풀이라고 해 줄 만한가? 바네사의 예복 모자에 달린 잎사귀를 떠올리자 문득 따스한 느낌이 왈칵 솟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느슨해진 올가는 조금 전보다는 약간 풀린 어조로 말했다.

 

“이것저것 챙겨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마틀레르는 호탕하게 웃었다.

 

“베푸는 걸 즐기는 분이시죠. 그래도 파블리첸코 경을 만나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늘 받기만 하는 것을요.”

“글쎄요, 파블리첸코 경의 생일이 곧이니, 그날에 맞춰 시합 날짜를 옮길까 하는 말씀까지 하셨었는데.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흔히들 그랬으니까요. 경께서 내키지 않아 하셨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만.”

“그렇습니까.”

 

올가는 도로 딱딱하게 돌아와 대답했다. 그 대화, 기억났다. 제가 정말로 국왕의 비인 것도 아니니 지나치다 싶어 만류했던 것이, 이렇게 재차 화제로 떠오를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마틀레르는 그것이 퍽 재미있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남모를 민망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낯선 만족에 휩싸여 올가는 마틀레르가 크게 껄껄 웃는 것조차 제대로 듣지 못하고 말았다.

 

“……하여튼 이 마틀레르, 전하께서 행복하신 것을 보니 아주 기쁩니다!”

“행복해 보이십니까?”

 

아차. 그는 멋대로 툭 튀어나간 물음에 지레 놀라 입을 다물었다. 마틀레르가 긴 세월 바네사를 보좌해 온 노신이라는 데 마음이 흔들려 그의 판단을 구하고 말았다. 별 것 아닌 질문이었다고 무마해야 할까?

그러나, 올가는 자신이 마틀레르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평해 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음을 자각했다. 그가 과연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지, 타인의 입으로 확인받고 싶었다.

마틀레르는 젊은 군인의 고뇌 따위 손쉽게 읽어낼 수 있다는 듯 싱긋 웃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경께서 알드 룬에 오신 이후로 전하께서는 늘 행복해 보이셨지 말입니다.”

“과분한 말씀이시군요.”

 

그러면서도 노장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마음이 휘둘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누구보다도 바네사를 잘 알 사람, 바네사에게 직접 물어볼 만한 용기를 내지 않는 한 가장 진실에 가까운 답을 줄 수 있을 만한 사람. 이런 식으로 기대는 것이 염치없이 느껴지기는 했으나, 하필 이곳에서 마틀레르와 마주쳤다는 점부터가 올가에게는 때를 맞춘 기회 같아 보이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올가는 한참을 말을 고른 끝에 적당한 물음을 찾았다가, 그때까지 마틀레르가 그의 곁을 떠나지도, 다시 말을 시작하지도 않은 채 저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게 뭐라고 위안이 되는지.

 

“그분께서 저를…… 그러니까, 전하께서, 저를. 사랑하는 것 같으십니까?”

 

일견 난데없이 들릴 만한 질문에도 마틀레르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잖아도 혼잡한 대기석에서, 기껏 다가와 준 사람을 붙잡고는 한다는 질문이 웬 싸구려 희극에나 나올 듯한 대사나 마찬가지라니. 그것이 더 무안해 올가는 옷소매를 털며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아니, 됐습니다. 바쁘실 텐데 가 보셔야지요, 경. 시합이 곧 시작…….”

“그게 중요하십니까?”

 

알드 룬의 사람들은 모두 이런 식일까? 바네사가 마틀레르를 닮은 것일까, 아니면 그저, 이 나라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다 무엇이든 정점으로 되돌려 놓는 능력을 타고난 것이려나. 마틀레르의 표정과 말투는 며칠 전, 손수건을 건네며 선물이 부담스러우냐 물었던 바네사와 거울 상처럼 엇비슷했다. 잠시 머리가 멈추는 듯한 기분에 주춤했던 올가는 곧 생각에 잠겼다. 중요한 것이라, 그렇다면.

마틀레르는 답을 독촉하지 않은 채 올가를 기다려 주었다. 임계온도에 달하기 직전의 물 속에서 하나둘씩 기포가 생겨나듯, 보글거리며 피어났다 이내 스러지는 상념이 하나둘씩 쌓여갔다. 침묵은 혼란을 깎아내어 쉴 곳을 빚는 힘을 지녔다. 주위가 온통 소란스럽고 시끄럽더라도, 마틀레르는 올가가 제 답을 갈무리해 내놓을 때까지 그 곁에 기둥처럼 묵묵히 서 있었다.

올가는 이전보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히, 중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마틀레르가 그를 떠보듯 운을 띄웠다. 바네사가 주었던 브로치는 옷깃에 달린 지금은 모양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같은 문양의 손수건을 이제 며칠째 갖고 다닌 셈인 올가는 손끝으로 금속을 짚는 것만으로도 서늘한 감촉이 어떤 형상을 이루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손목에 매인 팔찌의 노끈이 새삼스러운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올가는 그날 아침 사냥터로 내려오기 전, 침실의 벽난로 옆 의자에 접어 걸쳐 두었던 숄을 기억해 냈다. 들고 올 걸 그랬어. 그다지 말이 되는 생각이 아님을 알고 있더라도 바네사가 건넨 온기를 향해 뻗어 나가는 갈망은 떨쳐 내기 어려웠다.

세차게 한 번 고개를 젓자 마틀레르는 그가 더는 말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듯 입술을 약간 오므리더니, 곧 올가의 어깨에 한 손을 얹으며 나직이 말했다.

 

“고민하시는 바는 이해합니다, 파블리첸코 경. 늙은이의 조언을 구닥다리로 여기신들 별수 없는 일이겠으나, 한 말씀 드리지요.”

“말씀하십시오, 경. 새겨듣겠습니다.”

“불안하신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지 않으셨다면 제가 더 경과 전하를 걱정했을 터.”

“연인 사이의 관계란 본래 이러하다 하시려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조금 불손한 마음일지는 모르나 올가는 관심의 절반 남짓은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을 것이었다. 하지만 마틀레르가 그런 상투적인 말을 조언이랍시고 내놓을 것 같지도 않아, 올가는 바네사가, 또 마틀레르가 그랬듯 오직 호기심만을 담은 질문으로 다음 말을 유도했다. 마틀레르는 점잖게 웃으며 눈가에 주름을 잡았다.

 

“그것도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파블리첸코 경. 저는 단지 경께서, 경 본인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시기를 권하려 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차피 지금 제가 전하께서 경을 사랑하신다 해 보았자 경은 믿지 못할 것 아닙니까? 뼈가 있는 말로 조언을 끝맺은 마틀레르는 순식간에 다시 표정을 가다듬더니 덧붙였다.

 

“이런, 너무 오래 지체한 듯합니다. 마저 준비하시지요. 저는 경기장에 한 번 나가 봐야 하겠습니다.”

 

올가는 각 잡힌 경례로 마틀레르를 배웅했다. 어쩐지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올가는 마틀레르의 말을 두어 번 더 곱씹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사랑은 전쟁과는 달랐다. 잠시 고민을 미뤄 둔대도 큰일이 나지는 않을 터였고, 일단은 경기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했다. 손가락으로 대충 늘어진 머리카락을 모아 올린 올가는 핀을 단단히 꽂아 넣고는 소총을 집어 들었다. 그의 왕이 명하였으니, 나아가 승리할 시간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는 우승했다. 그가 이겨 온 트로피를 받아 들고서 바네사는 무척 다정하게 웃었고, 올가는 바네사의 미소에 세상을 다 얻은 듯 온 마음이 행복에 겨웠다.

 

 

 

 

올가의 생일은 그 자신이 바랐던 대로 조용히 지나갔다. 거창한 대회는 물론이고 연회도 무엇도 없이, 그저 바네사와 함께하는 하루로서. 바네사의 이마에 입술을 누르는 것으로 시작한 생일은 여느 날처럼 흠 하나 없이 잔잔하기만 했다.

작은 가족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왕과 왕의 연인은 시내를 굽어보는 작은 테라스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유리 덮개를 씌운 촛불과 자그마한 꽃다발, 달콤한 치즈케이크와 향긋한 백포도주를 사이에 둔 밤이었다. 탁자의 양옆으로 끌어온 안락의자는 밤공기에도 지지 않고 꿋꿋이 온기를 품었고, 무릎에 두른 담요며 올가가 억지로 바네사에게 넘겨 준 숄도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밤이 깊어지는 중이니 그리 오래 머물지는 못하겠지만, 잠깐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위해서라면 나쁘지 않은 장소였다.

바네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의자 등받이에 폭 몸을 파묻었다. 다리를 접어 끌어안고 그 위로 담요를 덮은 데다, 숄까지 꽁꽁 싸맨 모습이 다람쥐처럼 귀여워 올가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던 바네사가 허공에 포크를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이걸로 괜찮아요? 제 생일 때는 이것저것 많이 했었는데.”

“바네사, 당신께서는 왕이시잖습니까.”

 

바네사는 부루퉁하게 입술을 오므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올가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었을 거예요. 제 욕심으로 올가를 알드 룬으로 데려와, 외롭게 만든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들 올가를 많이 좋아한다고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올가가 처음 왔을 때는 제 시녀들은 올가에게 말도 못 걸고 수줍어했었는걸요?”

 

그런데 요즘은 제게 올가가 귀엽다고까지 이야기하고. 뭐, 당신이 귀엽긴 하지만요. 올가는 잠시 자신이 귀엽지 않다며 항의할까 했다가도 싱글거리는 바네사가 무척 사랑스러워 저도 마주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포크를 내려놓은 바네사는 올가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쉬웠는지 토라진 아이처럼 입을 비죽이고는 다시 물었다.

 

“그래도 많이 친해진 건 맞잖아요?”

 

그런가? 올가는 맹랑하게도 저를 진흙탕에 빠뜨렸던 근위대원들이나, 숄을 두르고 다니는 중에 제게 흐뭇한 눈길을 보내던 사용인들을 떠올리고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알아채지도 못하는 새 그는 얕으나마 의미 있는 친분을 쌓아온 터였다. 바네사는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했던 듯 술잔을 드는 손을 잠시 멈추었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올가는 좀 더 확실하게 소리 내어 말했다.

 

“말씀대로일지도, 모르겠군요.”

“다행이에요.”

“제가 바네사의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십니까?”

 

바네사는 잔에 입술을 대고는 흐음, 소리를 내며 눈을 가슴츠레 떴다. 씩 웃은 올가는 제 잔을 들어 올려 바네사의 잔에 부딪혔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맑은 유리 소리와 함께 노란 술이 찰랑거리며 사방으로 아른아른한 빛을 뿌렸다.

테라스 난간 너머의 알드 룬은 보석함에 한가득 담긴 패물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리브리안의 풍경과는 당연히 많은 점이 달랐지만, 올가는 어쩐지 이런 모습이라면 알드 룬 역시도 아끼게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면, 적어도, 애틋이 여기기에는 충분했다. 그가 알드 룬을 향해 느끼는 감정은 어디까지나 바네사를 향한 마음에 뒤따라 오는 부차적인 것이겠으나, 그렇다고 진실하지 않다 단정 짓는 것 또한 적절하지는 않았다.

이 관계가 꼭 일방적일 필요도 없었다. 올가는 그렇게 생각하며 포도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달곰한 디저트용 와인의 향이 입안에 한가득 피어올라 배부른 고양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바네사가 말을 이으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던 덕에, 정작 바네사가 그의 질문에 답했을 때 하마터면 그는 사레가 들릴 뻔하고 말았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서도 사랑받는 것이, 어찌 달갑지 않겠어요. 당신의 기쁨이 나의 즐거움이고, 당신의 외로움은 내 슬픔인데.”

 

올가는 술을 삼켰다.

 

“당신의 걱정을 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적응하세요. 당신께서 이미 가지신 것이니까.”

 

어조는 진지했지만, 얼굴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바네사는 유리잔의 가는 기둥에 가운뎃손가락을 톡톡 부딪치며 이야기했다.

 

“마틀레르가 제게 그러더군요. 제가 이렇게 소유욕이 있는지 몰랐대요.”

“소유욕이라니요?”

“제가 준 것을 하고 다니는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담백하게 읊은 바네사는 곧 화악 두 뺨을 붉혔다. 올가는 어쩔 줄 모르고 시선을 피하다가 끝내는 애먼 케이크를 포크 살로 푹 찔렀다.

사랑에는 수많은 면모가 있었고 연인의 얼굴은 그보다도 다양했다. 그 순간 올가는 사격장에서 마틀레르가 했던 질문의 답을 끝까지 쫓지 않은 것을 조금이나마 후회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뭐지? 그러나 그 답이야 어쨌든, 그에게 욕심을 내는 바네사가 싫을 리 없었다. 한 입보다 약간 많은 케이크를 입안에 욱여넣는 그를 향해 바네사가 싱긋 웃었다.

 

“올가, 작년 이맘때 기억나나요? 제가 알드 룬에서 함께하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 당신이 뭐라고 했는지.”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리브리안 군의 휴가 규정을 말씀드렸을 터입니다. 꽤 재미있어하셨지요.”

“그리고 전 이렇게 되물었어요. 괜찮겠나요? 당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버리고 제게 오더라도. 제가 갚아 드릴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시잖아요.”

 

언제 묻혀 있었냐는 양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에 올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네사가 다가가고자 하는 결론을 궁금해하면서도 그는 재촉하지 않았다. 혀끝에는 단맛이 감돌고 시원한 바람이 두 뺨에 입 맞추는, 그런 상냥한 저녁이기에 가능한 참을성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두드러진 고분고분함의 원인을 짐작한 듯 바네사가 좀 더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에 했던 대답도 기억나요, 혹시?”

 

그리고 올가는 잠시 숨을 쉬는 법을 잊었다.

마틀레르가 말했던 걸까? 아니면 제가 지나치게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었나? 좀 더 눌러 두었어야 했나, 그래서 질책을 받는 것인가, 갖은 생각이 두서없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기억이란 원래 새로이 꺼내 볼 때마다 매번 그 순간만의 감상을 끌고 나오는 법이라, 올가는 갑작스레 밀어닥치는 소용돌이에 마른침을 삼키며 바네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가, 가까스로, 의식적으로 폐부를 키워 찬 공기를 들이쉬었다. 내쉰 숨이 밤하늘을 향해 투명하게 퍼져 나갔다.

 

“예, 바네사.”

 

연인의 얼굴에는 이 여유로운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올가는 호흡을 조절하려 애를 쓰며 바네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바네사 역시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은 어색한 정적이 짧지 않게 지난 후의 일이었다. 올가는 그를 철저한 군인으로 만들어낸 훈련에 감사하며 흔들림 없는 어조로 말했다.

 

“저는 그때 당신께 괜찮다 답해 드렸었습니다. 갚음을 바라고 드리는 마음이 아니라 하였었지요.”

 

그러나 확신만은 바라고 있는 것을. 올가는 뒷말은 속으로 삼킨 채 바네사와 눈을 마주쳤다. 동그란 눈매 안에서 사랑스러운 눈동자가 별빛처럼 밝게 그를 응시했다.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아릿하니 아파 왔다.

자그마한 선물이 쌓이고 쌓여 어느새, 돌이킬 수 없는 무게를 만들어냈다. 갚음을 바라지는 않는다 해도, 결국 인간의 본성은 받는 것을 즐길 수밖에 없었으니까. 손에 잡히는 사소한 애착의 표시에 마냥 행복해하지 않는 법이라곤 알지 못했다. 올가는 분명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을 기나긴 순간 내내 바네사만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바네사는 탁자 한가운데의 꽃다발을 향해 흰 손을 뻗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기름한 손가락은 이름 모를 꽃송이 사이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상자를 끄집어냈고, 올가는 또 한 번 숨이 탁 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드려도 될까요? 상자를 연 바네사가, 조금은 장난스럽고 조금은 두려움이 어린 물 같은 얼굴로 올가를 향해 말했다.

 

“아, 올가, 그런 표정은 짓지 말아요.”

 

붉은 벨벳에 파묻힌 백금이, 그 여린 광택이 눈이 부셔 눈물이 났다. 올가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네사는 주저하며 덧붙였다. 올가.

 

“묻기에는 너무 이른 질문인 것 알아요. 이제 겨우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러니까 그냥…… 내키는 대로 생각해도 좋아요. 아니, 제 작은 선물이라고만 여겨 주세요.”

 

올가는 반지를 받아 들었다.

아.

가느다란 고리 겉면에는 아무런 보석도, 장식도 없었지만, 안쪽에 걸린 손끝에는 요철이 만져졌다. 굳이 살펴보지 않더라도 무슨 말이 적혀 있을지는 예언처럼 선명히 알 수 있었다. 지나친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 동시에, 가장 중요한 뜻을 택한 의도가 뚜렷이 드러났다.

무엇보다 확실한 증명이 그의 손 위에 놓여 있었다.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랑을 믿는, 사랑을 믿지 못하는 올가 파블리첸코를 위한 증명. 이 땅의 관습에 얽매여 살아가는 사람이 바랄 수 있는 가장 견고한 약속을 붙들고 올가는 문득 깨달았다. 폭풍우 속에서 내리꽂히는 번개처럼, 어느샌가 옷자락을 적시며 스며드는 빗물처럼 필연적으로 이해는 찾아 왔다.

 

“바네사.”

 

처음부터 필요 없었다.

 

“……네, 올가?”

 

가슴이 벅차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사랑을 두고 믿음을 논하다니, 이 얼마나 거대한 오만이었단 말인가. 이것이 사랑이었다. 당신이 품은 마음이 나의 것에 미치는지 알 수 없다 여기면서도 나는, 내 감정은 조금도 덜해지지 않았다. 내어 주는 일조차 송구스럽고 돌려받았음에 그저 감격하고 마는 바로 이것이 사랑이니, 보라. 올가는 무작정 탁자 위로 손을 뻗어 바네사의 두 손을 부여잡았다. 손바닥과 손등 사이에 둥근 반지가 단단하게 눌렸다.

바네사가 말을 잇기 전에 올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시선 끝의 손마디가 차마 더 힘을 주지도 못한 채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경직된 목소리를 움직여 올가는 한 음절 한 음절을 끊어 발음했다. 기꺼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것을 내걸겠다는 다짐을 맹세했다.

 

“제가 묻겠습니다. 언젠가, 때가 온다면…… 제가 전하께 묻겠습니다.”

 

경계를 넘어서게끔 하는 믿음에는 근거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 끝이 거절이라 한들 이 마음이 변할 일은 없겠지만, 그러지 않으리란 가능성은 또 어쩌면 이리 달콤한지. 바네사의 사랑은 그에게 축복이었고 희망이었으며 신을 믿지 않는 그에게는 절대자나 다름없었다. 올가는 이 사랑을 믿을 수 있었으며, 또한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을 길이라고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고개를 들어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 바네사는 물기 어린 눈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기다릴게요, 올가. 그리고…… 생일 축하해요,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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