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영원이라는 걸 믿나?"
"영원…이요?"
"그래."
채유하는 그의 질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백지한이 저런 질문을 한다는 건 정말 제게 원하는 대답이 있다기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아는 탓이었다. 그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본론부터 꺼내는 게 아니라 상대를 떠보는 듯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간혹 가다 그중에 맞는 의견이 있다면 티나게 좋아하고, 아니라면 한 차례 망설이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아마, 지금도 제게 늘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질문으로 시작한 모양이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그래, 믿지 않는다. 영원한 건 없다. 어떠한 사실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가 한 말의 의도를 모르지도 않으니 빙빙 돌려 답하지 않기로 했다. 저는 그처럼 제 의견을 내놓기 위해 길고 긴 서론을 말하지 않는다. 확실하게 제 의견을 말하는 것. 그게 그나마 제가 가진 장점이었다.
"믿지 않아요."
"그래? 난 믿는데."
"…설마 우리의 운명이 영원하다거나 그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죠?"
"맞아. 그거. 왜. 싫어?"
"그런 문제가 아니라… 요즘 누가 그런 말을 해요."
저럴 줄 알았다. 믿지 않는다는 말에 짧은 고민 뒤로 툭하니 제 할 말을 내뱉는다. 정말 옛날 사람이라 저러는 건가? 그가 오랜 세월을 살아온 건 맞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사자의 삶보다 인간의 삶을 선택한 백지한이었다. 그러니 요즘 어떤 말이 유행하고, 낯간지러운 말인지 알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백지한은 그러지 않았다. 잘못 배운 개그마냥 그가 내뱉는 사랑이나 연애에 관련된 말은 제가 듣기에 어색하고 낯간지러운 말 뿐이었다. 더 듣다가는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는 말들. 애써 듣지 않은 척 하기에는 백지한이 가진 특유의 눈이 그를 피하게 하지도 못했다. 금색인데도 붉게 타오르는 듯한 시선. 피한다고 피하는데, 집요하게 따라와 저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영원을 믿고 싶지 않은 저를 영원히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러면 저도 모르게 사실 그가 저를 영원히 사랑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기고 만다. 설화로 엮인 저와의 관계가 영원할 거라 말하는 등, 우리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는 등 채유하가 백지한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운명이었다. 넌 내 반려가 될 거야. 그런 운명이니까. 하고 말하는 백지한은 강압적이고 단호한 목소리를 내었다. 처음에는 무조건적인 반항심이 들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운명이라는 게. 그런 건 정해져 있는 게 아니야. 내가 정하는 거야, 하고. 상대가 싫다기보다 강압적인 태도에 굴할 수 없다는 마음이 컸었다. 그런데 계속 듣게 되니까. 난 믿고 싶지 않은데. 믿을 수가 없는데.
"진짜 연애 안 해봤어요? 어디서 그런 촌스러운 말만 들어서는…"
"이렇게 말하면 좋아할 거라고 활이 그러던데."
"백지한 씨가 활 씨의 말을 믿어요?"
"아니, 안 믿어."
"예? 그치만 나한테…"
"뭐라도 해봐야 하잖아."
"…그런 말까지 안 해도 돼요."
"아니, 해야 돼."
아, 또 저런다. 또 자기 할 말만 하지. 듣는 내 입장은 왜 생각해주지 않는 거야? 한 차례 따지려고 들자 여전히 제게서 시선을 피하지 않은 그가 저를 빤히 바라본다. 그리고 그의 말에 나는 원래 하려던 말을 잊고야 말았다.
"영원하길 바라잖아, 네가."
*
영원이라는 단어는 언제 쓸 수 있는 말일까. 신의 사자인 제가 영원히 살 때? 아니, 나조차도 영원히 살 수 없다. 그럼 달의 신이 영원히 신을 유지할 때? 이미 깨져버린 상황이다. 자신이 긴 세월을 살아가는 동안 사라진 존재들도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러니 영원하다는 말은 신의 사자인 저같은 존재가 잘 쓰지 않는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지한은 영원이라는 말을 가볍게 담았다. 저는 그럴 수 있었다. 영원히 너를 기다릴 수 있고, 영원히 너를 사랑할 수 있다. 우린 그런 운명이다. 이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한 적이 없었다. 너를 다시 만난 이후, 그게 비록 제가 원하던 상황은 아니었다고 해도, 변함없는 마음이었다. 그래, 처음에는 네가 나의 반려라는 말을 했을 때 단호하게 그런 건 원하지 않는다는 답을 듣고 불안한 마음이었다. 네가 싫다고 해도 우리는 맺어질 운명이고, 이를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 네게 강요한 것처럼 행동한 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정말 뭐든 할 수 있어. 너와 이어질 수 있다면.
그러기 위해 네 앞에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다. 운명을 이뤄내기 위해. 너와 영원해지기 위해. 고맙게도 누구 덕분에 엉망이 되었지만. 생각과 다름 없는 만남이었어도 이미 너를 만난 이상,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너는 정말, 내 생각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내가 널 사랑하게 만들었다. 무언가에 홀린 탓이라면, 그래도 좋다. 너란 존재에 홀린 채 살아가면 그만이다. 영원히, 영원히.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너를 만나는 하루하루마다 나는 고민해야만 했다. 네가 살아온 삶을 모르지 않아서 네가 나와 '영원'을 바라지 않는다면, 무얼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 너에게 영원한 건 없다. 영원한 건 오로지 저의 몫이다. 나의 영원은 너와 같은 '인간'으로 살아갈 때 시작된다. 그보다 더 바라는 건 없었으므로. 흔히 모두가 생각하는 영원과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저, 마지막까지 너와 있고 싶었을 뿐이기에. 그런데 너는 제 생각과 다르게 영원이란 단어에 흔들렸다. 아, 그랬지. 너는 한 번도 제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지. 그럼 기대해도 되는 건가? 비록 제 앞에서 영원을 믿지 않는다 말해도, 한순간도 너를 놓친 적 없는 나는 알 수 있다. 영원이란 단어를 꺼낼 때마다 너는 망설인다. 제게 영원이란 걸 줄 수 있는지, 나를 믿어도 되는 건지. 나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 네가 원한다면 그깟 영원이라는 단어, 네 삶에 있어 당연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나란 존재가 이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그저 말 한마디면 되는데, 역시나 쉽게 말하지 않았다.
'믿지 않아요.'
믿고 있으면서.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어요?'
네가 바라니까. 찾아봤어.
'그런 말까지 안 해도 돼요.'
아니, 해야 돼.
"네가 바라는 일이잖아."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 제 말에 말문이 막혀 변하는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 좋았다. 제 말에 네가 변하는 일이. 결국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부정할 수 없으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성격임을 알고 있다. 그마저도 좋다고 말하려다 이번에는 화를 낼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좋다. 영원히, 영원히. 그 정도의 일 따위 이뤄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