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 뻗으면 잡아줄래?
적막에 잠식되어가는 순간, 뜬금없는 말을 내뱉은 목소리는 다정하기만 했다. 그것에 섞여드는 녹녹한 공기에도, 하즈키 아리아는 미간을 구길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썩 귀찮은 일에 얽혔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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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 너 남자친구 있는 거 맞지?”
하즈키 아리아는 이미 다 마신 음료수 팩에 꽂혀있는 빨대를 씹어댔다. 방과 후의 교실, 그녀는 어째서 자신의 친구가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에 대해 잠시 고민하다 이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없는데? 대신 날 좋아하는 사람은 많아.”
친구는 아리아의 말에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꽤나 진지한 그녀의 말을 농담으로 생각한 탓이었다. 아리아가 쓰레기를 버리고 올 동안 겨우 진정한 친구는 턱짓을 하며 교실 문쪽을 가리켰다.
“그럼 너 저 선배 좋아하는 거 아니야?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아리아는 그 선배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했음에도 당연하지, 라는 대답을 한 뒤에야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그 끝에 서있는 이를 확인한 아리아의 표정이 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나 이만 가볼게, 라고 말하며 자리를 벗어났고 그런 아리아를 보는 친구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카나메! 왔어?”
“응, 늦어서 미안해. 집에 가자.”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타누마 카나메의 뒤를 따랐다. 오늘 상담이 조금 길어져서. 아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는 카나메의 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음 넓은 내가 용서해줄게, 라고 대답하며 그가 뒤를 돌아보지 않기를 바랐다. 장난스러운 목소리와는 다르게, 자신의 표정이 덤덤하기 그지없음을 스스로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 건지, 카나메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뒤를 돌아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아리아는 꽤나 진지하게 친구가 어째서 그런 질문을 했는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집에 가니까? 가끔 손을 잡거나, 뺨을 누르며 장난을 치는 모습을 봐서? 그것도 아니라면, 카나메가 매일 같이 나를 보러 우리 반에 와서?
아리아는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함께하는 이 순간의 공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지며 불편해진다. 그녀는 인상을 쓰며 평소보다 훨씬 더 더디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에 따라 카나메의 걸음도 느려졌지만, 아리아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카나메와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 건지 생각할 뿐이었다. 진지한 것을 썩 잘 견디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아리아는 결국 앞서 걷고 있던 그를 불러 세웠다.
“있지, 카나메.”
“응.”
이제야, 타누마 카나메는 뒤를 돌아본다. 늦은 오후의 공기가 부드럽게 가라앉는다. 아리아는 자신이 먼저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갈 생각이 없는 건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릴 뿐이었다. 이런 적이 자주 있었기에, 카나메는 그저 그녀를 기다렸다. 그는 그것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되었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간다. 카나메는 아리아가 언제쯤이면 입을 열까 생각하면서도,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자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티를 내기 싫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정말로, 세심한 배려였다. 하즈키 아리아가 그런 것을 눈치 채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한참이나 깊은 곳에 잠겨있던 그녀가 겨우 다시 입술을 떼었다.
“너는 아직도 나를 좋아해?”
참으로 무심한 질문. 그 말을 내뱉은 아리아 자신조차도, 스스로를 썩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한 마디가 카나메의 마음을 찌르고 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불편해하는 기색 없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하즈키 아리아는 본디 그런 이였다.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치를 보지 않았고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그런 사람. 좋게 포장하면 당당한 것이었지만, 나쁘게 말한다면 무례하게 굴 때가 있었다. 나중에 가서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그녀는 자신의 그런 점을 고칠 생각이 전혀 없었고, 타누마 카나메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언제나 마음의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상처 받거나, 당황하지 않을 준비를 말이다. 그것이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아리아의 질문에 잠시 눈을 크게 뜬 그였지만, 금세 표정을 가라앉히고 대답을 내보냈다. 심장 소리가 시끄러웠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나직하게 목소리를 낸 탓인지 그는 꽤나 담담해 보였다.
“응. 나는 아직도 너를 좋아해.”
한결 같은 답변이었다. 수없이 물어본 그 질문에, 언제나 똑같은 감정이 담긴 말이 돌아왔다. 그것이 이해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마음이 술렁거렸다. 아리아는 이 고요한 공기를 통해 울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 심장의 언저리에 손을 가져다 대어보았다. 묘하게 빠른 고동 소리가 전해졌다. 어쩌면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을지도 모를 감정의 감각이었다.
“좋아해, 아리아.”
“나도 좋아해. 우린 친구니까.”
아리아는 해맑게 말했다. 그런 의미가 아닌 것을 다 알면서도, 그녀는 언제나 어물쩍 상황을 넘기곤 했다. 그렇게 하여도 카나메는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지을 뿐, 더 이상 말을 얹지 않았기에 그녀는 그의 감정이 꽤나 가벼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니 자신의 숨을 막히게 하는 이것들도 어느 한순간에는 지나갈 것이라고, 종국에는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한 채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고.
그녀는, 사랑을 믿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멍하니 걸어가던 아리아를 조금 불안하게 지켜보던 카나메는 어느 지점에 다다라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상황을 이해하려는 듯 눈을 깜빡이다 조심해, 라는 카나메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고맙다는 말을 하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조금 속이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계단에서 넘어질 뻔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얼떨덜한 표정을 짓는 아리아를 보며, 카나메는 한숨을 내쉬고 손을 내밀었다.
“자, 넘어지면 안 되니까.”
“됐거든. 동생 취급할 거면 이따 집 가는 길에 과자나 사줘.”
“···아리아, 내가 너보다 1살 많다는 걸 좀 알아줄래?”
아리아는 혀를 내밀며 일부로 장난스런 표정을 짓고서는 후다닥 계단에서 내려갔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카나메의 손을 붙잡고 실없는 얘기를 했을 것이었다. 그저, 오늘은 머릿속에서 그가 했던 말이, 그 목소리의 열기가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미세하게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아리아는 중얼거렸다.
“짜증나.”
그녀는 쓸데없이 떠오른 과거를 곱씹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때와 같이 불만이 가득 담긴 자신의 말에도, 제 앞에 있는 이는 어째서인지 미소 짓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진 건 노을 때문이라고 말하려다, 그것이 더 구질거리는 것 같았기에 아리아는 걸음을 옮겼다. 잠시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물어봐놓고서, 아직도 좋아하고 있다는 카나메의 말에 제대로 된 답변은 하지 않은 채였다. 이런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이라고 생각하는 와중,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카나메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리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그를 바라보았다. 고요한 강가에 노을로 물든 가을 하늘이 선명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지금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대신, 깊게 고민해줘. 내가 아니라, 너에 대해서. 생각이 정리되고나서는, 그때는 손 뻗으면 잡아줄래?”
저번처럼, 피하지 말고. 카나메의 다정한 말에도 아리아는 미간을 잔뜩 구길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귀찮은 일에 얽혔다고 생각했다. 확신하고 나면 되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깨닫기 전에 피하는 게 좋을 것이었다. 이런 말 따위는 듣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럼에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이유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어린 감정을 모른 척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려나. 하즈키 아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고 꽤나 부드럽게 웃어주는 카나메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끄러운 고동소리가 들린다. 아직 여름을 온전히 떠나보내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하며, 가을의 공기가 뜨겁다고 느꼈던, 그해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