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8.png

 

 

“손 뻗으면 잡아줄래?”

소라가 무심히 그 한 마디를 던졌다. 평소 같았다면 뜬금없는 질문에 익숙하다는 듯 가볍게 무슨 소리냐는 둥의 대답을 했을 요카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소라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 휘 어보인 눈은 자신의 시선과 어긋나 있었고, 줄곧 호선을 그리고 있던 입술 또한 어색해 보였다. 평소와 같은 듯 다른 질문과 그 질문을 던지는 소라의 표정에서 요카난은 불안을 보았다. 다른 세계에서 온 자신의 연인은 아무런 준비 없이 맞닥뜨린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 과정 중에 소라가 모든 것을 경계하고 불안해해야 했다는 걸 요카난도 아는지라, 그 시선이 유독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는 잔잔한 목소리로 소라를 부르며 팔을 벌렸다.

"소라, 이리와요."

그의 부름에 소라는 순순히 그의 품에 들어왔고, 요카난은 그런 소라를 숨기듯 감싸 안았다. 뭐가 그렇게 당신을 불안하게 합니까.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말아요. 나에게 당신의 불안을 나눠줘요.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자신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소라는 입을 다물고 있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짧은 한 마디만을 입에 담았다.

"무슨 일입니까."

"그냥. 갑자기 궁금했어"

역시나 소라에게서는 마음을 감춘 대답이 돌아왔고, 결국 요카난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소라를 안고 토닥이는 것 밖에 없었다. 적어도 서로 기대고 있는 동안에는 침묵 속에서도 자신의 온기로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알려줄 수 있었기에 요카난은 빈틈없이 소라를 감쌌다. 소라는 그 침묵이면 충분하다고 말했었고, 자신은 그 말이면 충분했다. 그렇기에 소라가 먼저 침묵을 깨지 않는 한, 요카난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소라는 대답하는 요카난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요카난이 소라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면, 그건 소라도 마찬가지였다. 가라앉은 푸른 시선이 안타깝다는 감정을 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요.' 자신을 위해 한 발 물러서 주겠다는 대답이었다. 상냥하디 상냥한 나의 연인. 너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자신의 불안이 무엇이든 꽁꽁 숨기고만 있는 것은 옳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소라는 요카난에게 자신의 불안을 말하는 것이 무서웠다. 자신의 불안이 연인을 흔드는 것도, 지치게 할 것도 전부. 그래서 항상 묻어두려 했는데. 하지만 불안은 언제나 그렇듯이 불현듯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자신이 우연히 이 곳에 떨어진 것처럼 우연이 다시 자신을 데려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그 날, 가현의 집에 들르지만 않았더라면, 교통사고를 당하지만 않았더라면, 자신은 여전히 지구에 있었을 텐데. 어쩌다,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어쩌면 그 사고는 자신의 가혹한 운명이 자신의 삶에 일부러 만들어 낸 흠집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제 와선 그런 원망이 무색하게도 소라는 이미 원더랜드에 떨어진 지도 몇 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리고 두 세계에 몸담게 되어버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원더랜드에 막 오게 되었던 때의 자신은 돌아갈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채 살아남는 데에만 열중했었다. 죽은 사람에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니까, 살아남으라는, 행복하라는 친척 언니의 유언대로 필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억지로 웃고 지쳐가면서도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저편에서 어쩌면 자신을 찾아낼지도 모른다는 쓸데없는 희망에 모든 것을 걸고 끊임없이 발버둥 쳤다. 자신에게 상냥하지 않은 세상에서 유일한 안식처는 추억이었다. 자신이 힘들 때 함께 해준 사람들의 응원, 원더랜드에 떨어지기 전 내일 어디서 만나자던 약속, 헛소리에도 바보같이 웃던 순간들. 두고 온 그 모든 것이 사무치게 그리웠고 돌아갈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 곳, 원더랜드는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인 곳이고 자신이 있을 곳은 지구라고, 그러니 반드시 돌아갈 것이라고 머릿속에 밖에 남지 않은 추억들을 지겹도록 되뇌며 그렇게 버텼다. 정말 그 생각들에만 충실해야 했다. 다른 것들은 돌아보지도 말고 그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어야 했다. 그 어리석은 희망에 미래를 기대하다가 결국엔 진실에 혼자서 절망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긋지긋한 원더랜드에서 행복을 찾고 말았다. 리, 마치, 도르는 가족을 하루아침에 잃은 자신에게 새로운 가족이 되었고 이제는 따스함 그 자체였다. 그리고 또 다른 소중한 사람, 요카난. 너무나도 사랑하게 되어버린 자신의 연인. 이렇게 깊이 사랑하게 될 줄은, 그리고 사랑받게 될 줄은 미처 몰랐는데, 몰랐어야 했는데.

떠나야 하는 세상에서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자신이 두고 가야 할 이 사람들이 지독히도 눈에 밟혔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언제나 지구였는데, 그래서 돌아가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이제 나는. 소라는 지금 자신을 안고 있는 온기에 씁쓸한 기분이 감돌았다. 내가 떠나면, 너는 괜찮을까? 지금도 내가 불안해하면 자신이 아프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너는, 나를 너무 사랑하게 되어버린 너는, 내가 떠나간 이후에 버틸 수 있을까? 갑자기 내가 사라져 버리면 어떡하지? 다시는 만날 수 없다면? 어쩌면 사실, 지구에 있는 사람들은 괜찮을지도 몰라. 오랫동안 지켜봐 온 그 사람들은 사실 강한 사람이라 나 없이도 괜찮을 거야. 잘 버텨낼 거고 잘 이겨낼 것 같아. 하지만 내 사랑, 가끔은 세상에 나 밖에 없다는 듯이 구는 너는, 내가 없어도 괜찮을까?

소라가 답을 묻듯 요카난을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 요카난도 금방 소라와 눈을 맞추었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마치 자신에게 '이미 알고 있잖아요.'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소라는 자신의 상상 속의 대답에서 눈을 돌리고자 요카난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 속에서 내려진 대답을 외면하지는 못했다. 그래, 맞아. 사실은 말이지, 이미 알고 있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은 너야. 너는 내가 사라져도 잘 이겨낼지도 모르고, 어쩌면 내가 너에게 새로운 사랑이었던 것처럼 또 새로운 사랑이 찾아올지도 모르지. 그런데 말이야 요카난, 사실 내가 괜찮지 못할 것 같아. 이제는 내가 견디지 못할 것 같아. 너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이별을 극복하는 것도, 아니면 전부 잊어버리고 새로운 사랑을 만드는 것도, 모두 하지 못할 것 같아.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이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원더랜드 같은데. 그런데, 어느 날 불현듯 내가 이곳에 뚝 떨어져 버렸던 날처럼 다시 원래 세계로 떨어져 버리면 어떻게 해야 해? 그래서 여기에 두고 간 모두가 보고 싶으면, 네가 너무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해? 너는 나를 계속 기억해줄래? 나를 찾으러 와줄래? 떠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줄래? 그리고,

"손 뻗으면, 잡아줄래?"

생각이 깊어질수록 감정은 점점 목까지 차올라왔다. 떨어지려는 눈물을 가두려는 것처럼 눈을 감아버리려던 순간, 소라의 비어있던 손에 요카난의 손이 포개어지고 이윽고 단단히 깍지를 꼈다. 겹쳐진 자신의 손에 전해져 오는 힘은 마치 자신에게 무언가를 맹세하는 것만 같았다.

"잡고 절대 놓지 않을게요."

평소라면 믿지 않았을 그 절대라는 말이 오늘따라 참 달콤하게도 들려왔다. 우스운 일이지. 사랑하는 사람의 한 마디와 작은 행동에 그저 그를 믿어버리고 싶어 진다는 게, 그래서 방금 전까지 휘몰아치던 감정이 한순간에 잔잔해져 버린다는 게 말이야. 하지만 이 순간엔 이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우리가 이렇게 지독하게 사랑하고 있는 이 순간엔 그저 믿어버리는 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방금 전까지 불안에 먹혀가던 소라는 연인의 대답 하나에 안심해버린 자신을 자조하며 요카난에게 기대어버렸다.

"그래."

그래.지금의 나는 이거면 충분한 것 같아. 네가 없으면 안 되는 나는 네 그 한마디면 충분한 것 같아. 어쩌면 지금까지 나는 돌아가버리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그 날 네가 날 향해 손을 뻗지 않을 게 두려웠던 걸지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이제 나는 괜찮은 것 같아. 그 한 마디면 나는 아직 버틸 수 있어. 자신의 생각에 마침표를 찍은 소라는 방금 지은 미소와는 다른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잡고 있는 그 손을 단단히 맞잡고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자신을 안고 있는 다른 손이 자신을 다시 천천히 다독였다. 그렇게 소리 없이 저물어가는 시간 속에서 소라는 언뜻 작은 웃음소리가 들은 것도 같았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