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 뻗으면 잡아줄래?
민필리아가 말이다. 그러니까 만약에. 어디까지나 만약에. 돌아와서 손을 네게 뻗는다면 잡아줄 거냐? 산크레드가 병을 기울여 투명한 잔에 술을 가득 채우며 물었다. 에델은 그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 그거 내 잔이었는데. 산크레드가 작게 투덜거렸다. 잔을 단숨에 비운 에델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다시 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채우십시오, 에델이 그를 힐긋 바라보았다. 더 마시게? 꽤나 독한 술인데……. 아무리 젊다 해도 훅 간다. 그러면서도 산크레드는 에델의 잔을 채웠다. 에델은 다시 차오른 잔을 들어 넘치지 않을 정도로, 살짝 흔들더니 다시 단숨에 들이마셨다. 앞선 질문에 답을 해야겠지요. 당신은 제 대답을 듣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저와 같은 마음이겠지만요. 에델은 테이블 위로 고개를 숙였다.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드리웠다. 술기운 때문일까, 흐느끼는 목소리가 그 사이로 흘러나왔다.
산크레드. 우리는 절대 민필리아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그녀가 결코 그런 요구를 우리에게 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지요. 우리는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민필리아의 부탁은 세계를 위한 것이지,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실이 저를 절망하게 만듭니다…….
쿵. 에델의 머리가 그대로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쯧, 산크레드는 혀를 차며 에델의 어깨를 몇 번 흔들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천천히 마시라고 했는데. 정말 제멋대로라니까. 아직 해가 지기도 전이었다. 산크레드는 축 늘어진 에델을 둘러업고 여관 주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는 익숙하다는 듯 방 번호가 적힌 열쇠를 받아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늘 그렇듯, 울다하의 무더위 속에서.
* * *
쓰러졌던 빛의 전사가 일어났다.
에델은 선택받은 하이델린의 아이가 아니었다. 새벽의 혈맹 안에 소속되어 있기는 했지만. 뛰어난 실력으로 영웅과 함께 숱한 위험을 헤쳐나가기는 했지만. 그저 그 뿐. 민필리아가 납치당했을 때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 몰려오는 무력함에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영웅이 그녀를 구출해낸 뒤였다. 크리스탈 브레이브 사건이 터지고 새벽의 혈맹이 뿔뿔이 흩어질 때도. 에델은 민필리아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그저 다음번에는 꼭 그녀를 지키리라 다짐하며 자신을 갈고닦았다. 그렇지만 결국은,
민필리아는 빛의 대변자로서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어.
항상 한박자 늦게 그녀의 선택을 듣게 될 뿐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네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하는지 알아.
이번에도 그녀의 선택을 전해들을 뿐이었다.
괜찮아? 빛의 전사는 조심스럽게 에델에게 물었다. 에델은 빛의 전사의 가장 친한 동료였다. 오랜 시간을 함께했고. 빛의 전사는 에델이 민필리아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에델은 태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먹먹함을 감추지 못하고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에델은 입술을 깨물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던가. 민필리아와 관련된 일에 한해서는 한없이 약해질 수밖에. 우직하고 굳건하던 댐에 한 번 구멍이 나기 시작하면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사랑합니다.
언젠가 에델은 담담하게 민필리아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했다. 그 말에 민필리아는 웃음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요. 저도 당신을 사랑하는 걸요.
평소처럼 친절한 말투였다. 에델은 자신이 그 한마디로 결코 만족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녀는 모두에게 친절했다. 그 누구보다 세계를 사랑했다. 그런 그녀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이끌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를 위해 자신을 버릴 수는 있어도 단 한 사람을 위해 세계를 버리는 짓은 하지 않을 테지. 비참한 행복 속에서 민필리아는 누구보다 빛났다. 그녀는 에델의 빛이었고 모험의 원동력이었으며 신념이었고 규율이었다.
있잖아요, 에델. 나를 사랑한다면…….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에 에델은 고개를 숙인다. 아무리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도 영웅 앞에서는 울지 않으리라 몇 번을 다짐했는데. 아. 말도 안 되는 소리. 애초에 감정이 그리 쉬이 조절되는 거라면 이 답이 없는 감정을 시작하지도 않았으리라. 눈에서 손등으로 두어 방울 떨어진다. 그마저도 사랑이다.
저는 민필리아를 위해… 방패를 버리고 대검을 잡았습니다. 지키고 싶어서.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차서.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사랑할 수 있었으니까. 원초세계니, 1세계니 하는 것들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만날 수 있으리라.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버텼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당신이란 사람은……! 새파랗게 내지르는 절망은 울음 속에 묻히고 만다. 양손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삼키려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다. 그때, 두 세계를 구한 영웅이 입을 연다. 민필리아가 네게 남긴 말이 있어. 전에 네게 했던 부탁을 들어달라더라.
순간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 등에 진 대검이 무겁다. 그제야 자신이 할 일을 깨닫는다. 영웅을 도와 이 세계를 지켜내는 일. 그 어떤 시기보다 평화롭게 만드는 일.
먼 옛날, 민필리아가 다정하게 손을 뻗으며 제게 했던 부탁. 그 부탁은….
……나를 사랑한다면 세계를 나보다 더 아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