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 뻗으면 잡아줄래?”
양전은 양랑이 그렇게 말했던 날을 기억한다. 서로 말을 놓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 아직 서로를 향해 신뢰도 신용이라고 할 만한 것도 그다지 없이 그저 ‘스승님의 친우의 제자’정도의 수식어로 서로를 정의하는 게 더 편하던 때. 수련을 마치고 돌아가려던 길에, 앞 뒤 따라 붙는 말도 없이 갑자기 저런 질문을 했었던 것을.
‘갑자기?’
왜 그가 이런 말을 했는지 몰라서 입을 다문 건 아니었다. 아니, 이유라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어린 것에게는 제 편이 필요했던 거겠지. 제대로 제 편이라고 할 만한 이가 한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으며, 그 조차도 확실하게 신뢰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신뢰밖에 할 줄 모르는 아이기에. 그나마 연이 있다고 생각되는 제게 확인을 받고 싶었던 거겠지, 양전은 그 모든 진의를 쉽게 꿰뚫어봤고, 당연하게 모른 척 해주었다.
“뭐. 필요할 때라면.”
“…필요할 때?”
“그래. 네가 위험해지거나, 스승님이나 비렴진인 님이 부탁하시거나 했을 때라면 얼마든지. 그 정도는 어렵지 않으니까.”
“그거…, 결국 스승님들이 시켜야 하겠다는 거 아냐?”
“이런, 들켰네.”
‘양전!’ 능청을 떠는 자신에게 버럭 화를 내던 그때의 양랑은 얼마나 어리고 미숙했던가. 그때는 그게 귀엽다고 하기 보다는 가소로워서 웃어버렸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양랑은 퍽 귀여웠던 것 같다. 적어도, 지금의 양랑에 비하면 말이다.
“양랑, 괜찮아?”
여악의 습격 후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맑은 날. 양랑이 보이지 않는 것을 눈치 챈 양전은 좋지 않은 예감에 근처를 둘러보다가, 근처의 계곡에서 주저앉은 채 일어나지 못하는 그를 발견하였다.
평소라면 모른 척 하고 지나갔을지도 모르지만, 이번엔 짚이는 것이 있어 무시하고 갈 수가 없다. 효천견을 차고 가던 양전은 잠깐 상황을 지켜보려다가, 결국 아래로 내려가 양랑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
꺼림칙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양랑이 한숨을 내쉰다. 양전은 상대의 노골적인 불평에 헛웃음이 나와 버렸다. 아마도 누구하고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제가 나타나 싫은 거겠지. 남에게 손 벌리는 걸 싫어하는 양랑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어깨를 으쓱인 후 슬며시 손을 내밀었다.
“일어설 수 있어? 천화 군을 불러올까?”
“됐어. 나 혼자 일어설 수….”
내밀어진 손을 무시하고 자력으로 일어서려던 양랑은 몸을 제대로 펴기도 전에 다시 주저앉고 만다. 아니, 정확하게는 주저앉을 뻔 했지만…. 재빨리 팔을 낚아채 잡은 양전 덕분에 넘어지는 걸 면할 수 있었지.
“이런.”
‘조심해야지.’ 무덤덤하게 덧붙인 양전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춘 양랑을 완전히 일으켜 주고 그를 놓아주었다.
“무리하지 마. 아직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무리한 적 없어.”
“…하아, 어쩌다가 이렇게 귀염성 없게 컸을까.”
“뭐…?”
물론 양랑만을 탓할 생각은 없다. 아무도 그에게 홀로 설 것을 강요하진 않았지만, 상황과 흐름이 양랑에게 여유를 빼앗아 간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게다가 어떻게 보면, 이건 제 잘못도 있을지 몰랐다. 그때 순순히 ‘손 잡아줄게’ 라고 하지 못하고 짓궂은 대답을 한, 자신의 탓.
“그러는 양전도 하나도 안 귀엽거든.”
“그래, 잘난데다가 귀엽기 까지 하면 좀 반칙이니 귀엽진 않아도 돼.”
“…우와. 옥정진인 님이 이걸 보셔야 하는데.”
황당하다는 듯 말하는 양랑의 얼굴에 그제야 미소가 번진다. 그 희미한 미소를 본 양전은 그제야 되었다는 듯, 안심하고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