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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뻗으면 잡아줄래?

 

 

나츠메 타카시는 눈을 뜨며 느릿하게 숨을 내뱉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교실의 풍경이 일그러지다가도 금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는 몇 번이고 눈꺼풀을 깜박거리고 난 후에야 자신이 아직 학교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업은 이미 끝난 뒤였고,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되는 교실에는 오롯이 정적만이 맴돌았다. 그 속에서 타카시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방금 전 꾸었던 꿈을 곱씹어보았다. 무언가가 어렴풋이 기억날 것만 같은 기분에 인상을 쓴 그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힌다. 분명 자신이 한 말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어렸던 시절, 자신이 그런 얘기를 할 정도로 친한 누군가가 존재했던가. 그것에 대해 잠시 고민을 하던 그는, 베고 있던 팔이 저려오는 느낌에 결국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엎드리고 있던 몸을 완전히 일으키고서, 타카시는 아직 묻어있는 잠을 씻어내기라도 하듯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제야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던 고요가 깨진다.

 

 

“일어났어요?”

 

 

노을빛이 가라앉는 그 창가 자리, 타카시의 시선이 닿는 곳에 그녀가 있었다. 하즈키 린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어둠이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주홍색이 스며든 그녀의 샛노란 눈동자가 긴 속눈썹 아래서 반짝이다 부드러운 눈웃음을 자아내며 이내 그 모습을 감춘다. 단둘만이 존재하는 교실의 시간이 느리게, 느리게 가라앉았다. 옅어지는 공기 속에서 화한 계절의 향기가 코끝에서 맴돈다. 그것은 쉬이 사라지지 않고, 그 언젠가의 뚜렷한 날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

 

 

 

“나츠메 쟤는 또 왜 저래?”

“또 거짓말 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거 아니야?”

 

 

호의가 담기지 않는 웃음소리를 듣는 것은, 어린 타카시에게는 이미 낯선 일이 아니었다. 그때의 그는 혼자인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자신의 양친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었다. 그런 그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수시로 밀려드는 쓸쓸함도, 친구 하나 없이 보내던 학교생활도 아닌, 자신에게만 보이는 요괴의 존재였다.

타카시는 그 이질적인 존재들이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신이 수도 없이 외쳐본, 여기 있다는 그 말에도 사람들은 그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공포나 불안, 당황스러움, 그리고 가끔은 분노가 섞여있는 얼굴을 하곤 하였다. 그런 반응을 꽤나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겪으며 타카시는 더 이상 요괴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하였다. 자신의 얘기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줄 이도, 믿어줄 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갑작스레 달려들거나 모습을 드러내는 요괴는 어린 그에게 여전히 무서운 존재였고, 오늘과 같은 일이 자주 벌어지는 것이었다.

이 상황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타카시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서 고개를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괴와 눈이 마주쳤기에 다시 바닥을 바라보았지만 말이다. 그는 길바닥에 쭈그려 앉아서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들의 시선이나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아이들의 말에 신경을 쓸 여유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들이마시는 공기는 텁텁했고, 뜨거운 계절의 온도에 눈물이 마르는 듯한 뻑뻑한 느낌이 들었다. 이 길을 지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한참을 안절부절 못하던 그는, 일순 자신의 발밑에 어느 그림자가 생기는 것을 보았다. 그와 동시에 옅은 바람이 불어온다. 짙어지는 녹음을 가득 담고서, 잠시 멈추어있던 잎들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처음 맡아보는 향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마음이 진정되는 것만 같았다.

 

 

“왜 그러고 있어?”

 

 

이 눈부신 햇살을 가득 담은, 은빛의 파도가 부서지는 듯한 깊은 여름의 목소리. 그 다정함에 타카시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살랑이는 검은빛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소녀와 시선이 맞닿는다. 왜인지 모르게 울컥, 무언가가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유리컵에 가득 담긴 물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던 것이 바닥에 엎질러지는 기분. 그 묘함에 타카시는 대답하는 것을 머뭇거리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소녀는 그를 기다려주었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멎어든다. 시끄러웠던 주변이 고요에 휘감기는 이유는, 제 앞에 있는 소녀의 탓임이 분명했다. 상냥한 미소와는 다르게, 그녀를 감싸고도는 공기는 서늘하기만 했다.

서늘하다. 타카시는 문득 떠오른 그 단어를 다시금 곱씹으며, 그것이 그녀에게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녀는 나이에는 맞지 않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이는 아주, 아주 차분하고 기이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이 어째서인지 이상하게도 외로워보여서, 타카시는 도착지도 모른 채 저도 모르게 손을 뻗는다. 그 작은 선의, 어쩌면 위로가 됐을지도 모를 마음이 닿기도 전에, 소녀는 그 손을 붙잡아서는 그를 끌어당겨주었다. 앗, 하고 짧은 소리를 내며 타카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끝에서부터 아릿하게 새겨져오는 감정은, 어린 아이가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그저 소녀의 따듯한 손을 바라보며 이 아이도 사람이 아니면 어쩌지, 라고 생각했던 걱정을 버렸다.

 

“고마워. 그, 집에 가야하는데 이 길을 지나갈 수가 없어서···.”

 

겨우 말을 내뱉은 타카시는 끝말을 흐렸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입안이 텁텁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소녀의 대답을 예상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왜 못 지나가는데? 라는 말을 들으면, 분명 가슴이 먹먹할 것이었다. 결국에는 이 아이도 자신과는 다른 세상을 본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숨이 막혀오곤 했다. 아주 잠시 가졌던 희망이 무너지는 느낌, 아마도 평생 익숙해지지 못할 감각이었다. 입술을 꾹 닫은 채 오도카니 서있는 타카시를 바라보다, 소녀는 작은 웃음을 흘렸다.

 

“너, 저기 있는 요괴가 무서웠구나? 그렇지만 나랑 같이 있으면 괜찮을 거야!”

 

꽤나 자신만만한 태도. 타카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너도 보여? 턱 끝까지 차오른 그 질문은, 어서 가자며 자신을 이끄는 소녀의 행동에 타이밍을 놓쳐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어딘가에서 망연히 울려오는 짙은 후우링 소리에 메마른 숨을 한 번 내뱉고서 소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키 차이는 얼마 나지 않았음에도, 소녀의 손은 자신보다 훨씬 작았다. 타카시는 괜스레 힘을 주어 그 손을 꼭 마주잡으며, 전해지는 온기에 안심을 하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길 바랐다. 알 수 없는 것들을 가득 담고서, 바람이 불어온다. 달아오른 계절의 열기 속에서, 흩날리는 소녀의 검은 머리카락에 부드러운 갈색이 감돌았다. 짙은 밤빛이었다.

타카시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무더위 속에서 고민했던 것이 허탈해질 정도로 빠르게 요괴를 지나쳤다. 그럼에도 그는 앞장서 걸어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쯤이면 됐지? 저 길목에 있는 요괴는 험악하게 생겼어도 아무것도 안 하니까 걱정 말고 지나가도 돼.”

 

소녀는 더 말을 이으려던 것을 멈추고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었다. 그 잠깐의 머뭇거림을 알아챘음에도, 무어라 해줄 말을 찾지 못했기에 타카시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붙잡았던 손을 놓은 것이 아쉽다고 생각하며. 어느덧 선연한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나릿하게 흘러내리는 여름의 색채 아래, 오도카니 서있던 소녀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타카시는 갑작스레 고개를 돌린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보며 작게 웃고서는, 소녀가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것에 대답하는 대신, 타카시는 소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꽤나 부끄러운 짓이었다. 소녀를 찾고 있는 듯한 목소리에 초조해진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먼저 입을 움직였다.

 

“···오늘 고마워. 저기, 다음에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때도, 오늘처럼 손 뻗으면 잡아줄래?”

 

차라리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랬다면 소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있을 테니. 그가 내뱉은 뜬금없는 말에, 소녀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도 금세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좋아, 다음에 또 보자. 약속!”

 

맞잡았던 손에서 전해졌던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고, 노을은 짙어지고 있었다. 손가락을 걸며 약속했던 일은 꼭 지켜야한다고 생각하며, 타카시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아직 어렸던 그 해 여름, 다정히 웃어주던 소녀의 얼굴은 눈부시던 햇살에 가린 탓인지 이상하게도 흐릿하기만 했다.

 

 

 

-

 

 

 

“타카시 군, 집에 안 갈 거예요?”

 

나츠메 타카시는 어느새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 린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않는 타카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망울을 빛내는 린의 모습에 타카시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쓸어주었다. 천천히 어스러져 가는 노을도, 시끄러운 심장의 고동 소리도 전부, 온전한 지금 이 순간만의 것이 분명한데도, 그 작았던 소녀의 모습이 린에게서 보인다고 생각하면 역시 이상한 걸까. 타카시는 잠시 머뭇거리다 제 손을 뻗었다. 일말의 설명도 없는 난데없는 행동에도, 린은 그가 어리광을 부린다고 생각한 건지 작게 웃으며 이를 붙잡았다. 익숙한 감정의 울렁거림, 이제와 그것의 이름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분명 대답할 수 있으리라. 이미 수도 없이 확신한 사랑이었다. 타카시는 여전히 또래 친구들과 비교될 정도로 작은 린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함께 맞춘 반지가 약지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것도,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는 것도 썩 마음에 들었다. 그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요즘에는, 길에 요괴들이 있어도 무서워하지 않고 혼자서 잘 지나가요.”

 

린은 응, 이라는 짧은 대답을 내뱉으며 그가 붙잡고 있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창을 통해 내리쬐는 주홍색의 빛살을 받는 타카시의 옅은 금빛 머리카락이 반짝였기에, 무심코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잠깐의 적막이 흐르는 동안, 타카시는 린의 손을 매만지는 것을 그만두고 손가락들이 엇갈리게 바짝 맞추며 깍지를 끼었다. 그것이 조금 쑥스러운지 린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역시, 린이 내 옆에 있어주면 좋겠어요. 다음에도, 앞으로도 내가 손을 뻗으면 잡아줘야 해요. 약속했으니까.”

 

그런 약속을 했었던가, 라고 고민하다가도 타카시의 다정한 애정이 가득 담긴 웃음에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내가 타카시 군의 곁에 있으니까, 분명 괜찮을 거예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리 대답하는 린이 사랑스럽기만 했다. 타카시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를 살짝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잠시 숨을 멈추는 린과는 달리, 그는 웃으며 가볍게 입을 맞춰주었다. 당황하여 자신을 올려보는 린을 바라보다 타카시는 고개를 숙여 다시금 그녀의 입술에 뽀뽀를 할 뿐이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것을 들키기 싫은 건지, 제 품 안으로 파고드는 린의 행동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조심스레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타카시의 손길에, 린은 손을 뻗어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타카시 군, 악몽이라도 꿨어요?”

“아뇨. 그냥 어릴 적에 있었던 일이었어요.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그런 추억이요.”

“그럼 아무 일도 없었어요?”

 

타카시는 방금 전의 상황과는 반대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린과 눈을 마주쳤다.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었기에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거라고 생각한 걸까? 타카시는 이상한 곳에서 무던한 듯한 린의 머리카락을 쓸어 정리해주고서는 또다시 입을 맞추었다. 린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모른 척하며, 그는 조금 장난스레 웃었다.

 

 

“응. 이건 그냥, 린이 좋아서 한 건데.”

 

그 말에 린은 타카시를 밀어내며 그 품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무언가를 얘기하려다가도, 결국에는 뒤를 돌아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귀 끝까지 새빨개진 그녀를 바라보며 작게 웃음을 흘리고, 타카시는 짐을 챙겨 그 뒤를 따랐다. 짙은 밤빛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을 빤히 바라보다, 그는 린의 이름을 몇 번 불렀다. 그때는 알 수 없었던 그 다정하던 이의 이름을. 그 이름에 너무도 많은 감정들이 담긴 탓인지, 이상하게도 열기가 올라왔다.

린은 그 목소리에도 멈추지 않았지만 보폭이 그리 큰 편이 아니었기에 타카시가 그녀를 따라잡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속도를 맞춰 나란히 걸으며, 타카시는 린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괜히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린을 보며 웃고서,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만지작거렸다. 다행히도 그 행동은 입맞춤이나 포옹보다는 익숙해진 것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린이 먼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어린 시절, 그 여름의 만남을 기적이라 불렀다면, 지금의 인연은 운명일 것이랴. 아득한 후우링 소리와 함께 화한 여름의 향기가 난다. 이 짙은 계절의 색으로 함께 물들어가며, 타카시는 몇 번이고 고백했던 그 감정을 다시금 이야기하였다.

 

 

“린, 사랑해요”

 

그에 잠시 머뭇거리다가도 린은 나도 사랑해요, 라는 작은 대답을 내뱉었다. 사랑, 그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절대로 변하지 않을 단둘만의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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