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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생 AU + 대학생 CC AU

 

 

손 뻗으면 잡아 줄래?

 

잠에서 깨어난 채은은 그의 그 한 마디만을 기억해 냈다. 이윽고 머리가 쨍하고 아파왔다. 흔한 숙취 증상이라는 것은 옆에서 채은의 상태를 살피던 어느 선배에 의해 알게 되었다. “산책 좀 하고 나아진 줄 알았는데, 들어와서 한 번 게워내더니 금방 잠들더라고.” 걱정 섞인 고은의 말에, 채은은 고개를 푹 숙이며 간밤에 민폐를 끼쳐 죄송하다며 사과의 말을 했다. 고은은 웃으며 그럴 수도 있다며 손사래를 쳤다. 여전히 머리가 띵했다. 세상이 핑핑 도는 느낌 역시 여전했다. 이렇게나 많은 양의 술을 마신 것은 대학에 들어온 후 처음이었다. ‘마시고 토하고’, 이른바 MT의 참뜻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저 누구랑 산책하고 들어온 거예요?”

“허묵 선배랑. 맞아, 너 그 선배랑 아는 사이야?”

“아, 네. 고등학교 선배님이세요.”

“그렇구나. 난 또.”

 

 

그 선배가 누굴 그렇게 챙기는 건 처음 봤거든.

고은은 제가 그동안 알고 있던 허묵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자상하지만 누구에게나 거리를 두던 학생회장의 모습. 그의 친절을 받은 그 누구도 허묵에게 더 가까이 가지 못했다. 허묵이 그만큼의 선을 철저하게 긋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허묵이 채은을 업고 방에 들어온 것은 학과 사람들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마침 이야기의 주인공이 방에 찾아왔다. “채은이 있어?” 그 말에 채은은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선배, 좋은 아침. 걱정과는 달리 멀쩡해 보이는 모습에 옅은 한숨을 쉰 허묵은 그녀에게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채은은 저를 둘러싸고 청문회를 열려는 듯 득달같이 달려들던 선배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허묵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요. 어제부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은 나고?”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침묵으로 대신했다. 은폐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 탓이었다. 허묵과 함께 산책을 하고 그의 등에 업혀 왔다는 것도 고은의 말이 없었다면 기억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허묵은 들고 있던 초코 우유에 빨대를 꽂아 채은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든 그녀는 다소 쑥스러운 얼굴로 우유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나 없으면 어쩔 뻔했어? 하여간 걱정 시키는 건 여전해.”

“그래서 선배 있는 학과로 왔잖아요. 여기 오려고 성적 올리느라 고생한 거 선배는 알아줘야 해.”

“그래, 잘했어. 설마 정말 올 줄은 몰랐거든.”

“저에 대한 신뢰가 너무 없는 거 아니에요?”

“나한테 과외 받던 때 생각해 보면 납득이 될 만도 한데.”

 

 

두 사람은 일 년 만에 다시 조우했음에도 마치 바로 어제도 만난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주 보고 투닥이는 것이 마치 다시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책에 낙서를 주고받던 그때가 불과 며칠 전의 일처럼 생생했다.

 

 

“어제 내가 무슨 말 했는지 하나도 기억 안 나겠네.”

“네, 하나도요. …아, 하나는 기억난다.”

“…….”

“선배가 저한테 손 잡아달라고 한 거.”

 

 

동시에 ‘손 뻗으면 잡아 줄래?’라고 물었던 것까지. 꿈이 아니었다. 길가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허묵은 제게 손을 내밀었었다. 휘어지게 웃음을 지으며, 제게 다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었다. 허묵은 제 속마음을 간파당한 아이처럼 드물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표정을 본 것은 고등학생 시절에도 없었는데.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기억 못 하는 거였으면 그대로 모른 척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어? 왜요?”

“그냥, 서로 취중진담으로 생각하고 넘어가면 편할 것 같아서.”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난 선배 보려고 여기까지 왔다니까?”

“채은아.”

 

 

허묵이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내 이름이 이렇게나 듣기 좋은 단어였나? 채은은 그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한참의 정적. 허묵은 커다란 손을 들어 채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침 햇살을 머금은 따스한 온기가 그녀의 피부 끝자락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래서, 손 잡아줄 거야?”

“무슨 뜻인지는 제가 맘대로 해석해도 되죠?”

“마음대로 해. 어차피 같은 생각일 것 같으니까.”

 

 

허묵의 입가에 미세하게 미소가 떠오른 것은 채은만이 알아볼 수 있었다. 채은은 손에 들고 있던 초코 우유를 내려두고 그 손으로 허묵의 손을 잡았다. 우유의 냉기가 곧 허묵이 가진 온기로 스르르 녹아들었다. 동시에 채은의 얼굴에도 수줍은 미소가 떠올랐다. 볼에 그려진 홍조는 아무래도 허묵과 제 손의 온도차 때문일 것이다. 애써 그렇게 변명하며 채은은 허묵과 잡은 손을 꼬물거렸다. 허묵은 그 귀여운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우며 꽉 잡았다.

 

 

“이제 아무 데도 못 가.”

“…….”

“이 손, 안 놔 줄 거야.”

 

정말이지 하나도 변한 게 없네, 고등학생 때랑.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자상하면서, 제 것에게는 욕심이 지나친 남자. 그 모습은 채은만이 볼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녀만이 볼 수 있는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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