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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뻗으면 잡아줄래?

 

 

앨리스 블레어가 라케티카의 나무 위에서 한가로이 쉬고 있는 에메트셀크를 향해 물었다. 에메트셀크는 눈을 아래로 깔고, 나무 아래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빛의 전사에게 답했다.

 

 

아니, 절대 안 잡아. 위대하신 영웅 나으리. 이 정도는 스스로 극복해내지 않으면 곤란하지. 괜히 사람 귀찮게 만들지 말라고.

 

 

에메트셀크는 벌레를 쫓듯 손을 휘휘 휘둘렀다. 그녀는 아직 나무 아래서 가만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못 올라가는 게 아냐. 에메트셀크. 네가 손 내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지. 그 말에 에메트셀크가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올라오지 못해 누군가가 손을 뻗어주기만을 바라면서 나약한 존재면서 애써 포장하려 들기는. 그는 눈을 감았다.

 

 

손 내밀어 줘.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앨리스 블레어는 뻔뻔하게 에메트셀크를 찾아왔다. 언제나처럼 뻔뻔한 요구를 했고 언제나처럼 거절했다. 마치 어제의 일은 없었던 것처럼. 다시 한 번 같은 대화를 반복했다. 내가 먼저 네 손을 잡는 일은 없을 거다. 그렇게 단언했지만 학습 능력이 없는 건지. 항상 나무 아래서 자신에게 손을 뻗기를 요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은,

 

 

있지, 나는 소환사지만 나무를 꽤 잘 타.

 

 

기어코 나무 위의 제 쉼터를 침범해왔다. 반대편의 굵은 가지에 털썩 앉아서 누워있는 에메트셀크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취소해. 나약한 존재라는 말. 전에 그가 했던 말이 퍽 고까웠던 건지. 그녀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말했다. 네 도움 없어도 올라올 수 있단 말이야.

 

 

그럼 왜 손을 뻗어 달라고 했던 거지?

 

 

에메트셀크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내 도움 없이도 올라올 수 있다면 그냥 올라오면 되잖아. 굳이 내 손을 잡고 올라올 필요가 있었나?

 

도망갈 거잖아. 영양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내가 귀찮다는 핑계로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칠 거면서. 앨리스는 나무의 작은 가지를 꺾어 그를 가리켰다. 자꾸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군. 내가 도망쳐? 네가 두려워서? 어림도 없는 소리. 빛을 흡수하더니 미쳐가는 모양이야. 이래서 써먹을 수나 있겠어? 조롱 섞인 말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망치지 마. 너는 나를 곁에 두게 될 거야. 되레 그렇게 말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에메트셀크는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아래 또다시 눈을 감았다.

 

 

* * *

 

 

앨리스 블레어는 폭풍우 치는 바다 속으로 향했다. 몸 안에는 빛이 넘실거렸다. 아모로트. 검푸른 바닷물 속 빛나는 심해의 도시. 에메트셀크의 흔적을 하나하나 좇아가면,

 

찾았다.

 

아모로트의 유일한 주민을 만날 수 있었다. 공활한 내부를 높은 천장의 샹들리에 빛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방 한가운데 오직 에메트셀크만이 있었다. 무표정으로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앨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앨리스는 에메트셀크를 만난 순간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네 꼴 좀 봐! 내 손 절대 안 잡을 거라며? 그런데 지금 네 꼴은 이게 뭐야. 완전히 곁에 있어달라고 애원하는 꼴 아냐? 이런다고 내가 네 곁에 있을 것 같아?

 

 

난 네가 누구보다 강력한 이해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에메트셀크는 낮은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린 후 자신을 바라보는 앨리스의 눈을 응시했다. 무대 위에 오른 배우처럼 과장되고 우아한 몸짓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고 손을 내밀었다. 앨리스 블레어는 그 손을 잡았다. 흐르는 음악도, 관객도 없는 무대 위의 둘만의 왈츠. 앨리스 블레어가 작게 속삭였다.

 

 

그거 하나 때문에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을 없애버렸어?

 

 

합을 맞춘 것도 아닌데 발걸음은 자연스러웠다. 에메트셀크가 몸을 좀 더 바싹 붙였다. 네게 필요한 일들이었다. 그 말에 그의 손을 붙잡은 앨리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걸 왜 네가 정해? 잠시 떨어져서 한 바퀴 빙글 돌고, 다시 품에 안겼다. 지금이라도 내 손을 잡으면 영원히 잃지 않을 것을 하나 주지.

 

 

착각하지 마. 몸을 뒤로 젖히며 앨리스 블레어가 말했다. 에메트셀크는 그녀의 등을 단단히 붙들었다. 머리카락이 아래로 쏟아지고, 앨리스 블레어는 제 얼굴 위 에메트셀크를 바라보았다. 영원은 없어. 불멸도. 아모로트와 고대인의 몰락을 지켜봐 온 너라면 알잖아?

 

 

되찾을 수 있다. 낮은 중얼거림이 앨리스의 귀에 들어왔다. 절대 안 되지. 나는 네 모든 걸 빼앗으러 왔어. 네가 내게 그랬듯. 네 곁의 모든 것을 내가 무너뜨릴 거야.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원망하도록 해. 내게 손을 내밀고, 내 손을 잡은건 너였어.

 

앨리스 블레어는 에메트셀크의 손을 놓았다. 방 안을 비추던 불빛이 순간 사라졌다. 잠시 후 다시 불이 들어왔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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