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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왔다.

칼처럼 날카로웠던 바람은 가고 점점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무들도 봄을 맞아 새 단장을 하고 동물들도 잠에서 깨어나 바삐 움직였다.

바쁜 것은 동식물만이 아니었다.

로벨리도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잡초를 뽑고 엉망이 된 땅을 정리했으며 계절에 맞는 씨앗을 뿌리곤 조금이라도 상할까 매일매일 꼼꼼하게 살피는 등 숨 돌릴 새 없이 바쁘게 봄을 맞이했다.

그렇게 모두가 바쁜 초봄이 지나고 어느 정도 농장이 안정되었을 때, 봄이 온 이후 처음으로 마법사의 탑에서 마음껏 뒹굴거리던 로벨리가 문득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스승님, 저희 봄인데 데이트를 한 번도 안 갔네요.”

“데이트? 그것이라면 지금도 하고 있지 않느냐.”

“아이, 이건 그냥 같이 있는 거고요. 데이트는 밖에 나가서 노는 거죠. 근데 저희 최근엔 바빠서 놀러 가지도 못했잖아요! 봄인데! 데이트하기 딱 좋은 계절인데! 저흰 아직 한창인 연인인데!”

로벨리가 불퉁한 목소리로 와다다 말하고서 뒤늦게 “물론 제가 바빠서 그랬던 거지만…….” 하고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람과의 교류가 적어 그런 쪽의 지식은 거의 전무한 마법사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가. 요즘 사람들은 까다롭군. 그럼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 있느냐.”

“글쎄요. 딱히 가고 싶은 곳은 없지만, 스승님과 함께면 어디든 좋아요!”

막상 가려니 딱 떠오르는 곳이 없어 로벨리가 그저 웃으며 말하자 마법사도 마주 웃으며 로벨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괜찮다.”

“정말요? 아! 그럼 꽃놀이는 어때요? 주주시티에 정말 예쁜 곳이 있거든요! 사람은 좀 많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이 인정한 곳이라는 거죠!”

“으음…….”

좋은 생각이라는 듯이 꺼낸 로벨리의 말에 마법사는 그닥 내키지 않는 제안인지 미간이 좁아지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벨리가 명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장난이에요. 스승님이 사람 많은 곳 싫어한다는 걸 아는데 가자고 할 리가 없잖아요. 저도 꽃놀이하러 주주시티까지 가긴 귀찮고요. 그러면 여기에서 해야 할 텐데…… 여기는 꽃나무가 그리 많지 않으니 꽃놀이보다는 역시 피크닉이겠죠? 사람들 눈에 안 띄려면……. 그렇지! 여기 탑 뒤에 있는 숲은 어때요? 사람도 없고 피크닉 하기에 좋을 것 같은데요.”

자신을 놀린 것에 대해 뭐라 해야 할지 배려를 해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지 고민하던 마법사는 결국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로벨리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슬라임이 좀 걸리지만, 미리 치워놓으면 되겠지. 풍경은 괜찮은 편이니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그쵸? 헤헤, 그럼 도시락은 뭐가 좋으세요? 피크닉 도시락의 정석은 샌드위치인데……. 샌드위치 괜찮으세요? 그리고 혹시 뭐 싫어하는 거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최대한 빼서 만들게요.”

“샌드위치면 충분하다. 먹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싫어하는 건…… 새먼베리나 살구 버섯정도겠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마법사의 말을 듣던 로벨리가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새먼베리랑 살구 버섯 싫어하세요? 의외네요. 자연에서 난 것들이라 좋아하진 않더라도 괜찮으신 줄 알았어요. 그러면 둘 다 안 넣을게요. 그 외에 뭐 따로 드시고 싶은 음식은요?”

“음식은 딱히 신경 써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군. ……로벨리, 넌 있느냐?”

“저요? 글쎄요. 웬만한 음식은 다 좋아해서요. ……아, 혹시 스승님이 만들어 주시려고요? 저 완전 감동이에요!”

로벨리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감격한 듯한 눈빛으로 마법사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음, 그러면 샌드위치에 어울리면서 스승님이 만들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음식이 뭐가 있을까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 오랜 시간 끙끙거리던 로벨리가 좋은 것이 생각이 났는지 탄성과 함께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스승님이 샌드위치를 만들고, 제가 후식을 만들게요. 샌드위치는 만들기 간단한 편이니, 스승님도 충분히 만드실 수 있을 거고요. 그럼 후식까지 다양하게 즐길 수 있으니 좋지 않을까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구나. 네가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샌드위치를 만들어 가도록 하지.”

“스승님이라면 분명 가게를 차려도 괜찮을 만큼 맛있는 샌드위치를 만드실 수 있을 거예요. 재료가 필요하시면 언제든 가지러 오세요. 저희 농장에서 가장 신선한 것들로 준비해놓을 테니까요.”

“그래, 알았다. 그럼 언제 갈지 정해야겠군.”

“한 3일 뒤는 어때요? 3일간 급한 일은 전부 해치우고 가면…….”

계획을 세우고 서로 힘내라며 인사를 한 뒤 바쁘게 일을 하자 순식간에 3일이 지나, 피크닉 당일이 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비가 올 것처럼 우중충해 피크닉을 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당일이 되자 언제 우중충했냐는 듯이 하늘은 무척이나 맑게 개었다.

로벨리는 눈을 뜨자마자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보더니 우려와 달리 날이 맑자 신나서 옷을 갈아입고 전날 밤 미리 챙겨둔 바구니와 돗자리를 한 손에 든 채 집을 나섰다.

바구니를 앞뒤로 흔들고 콧노래를 불러가며 흥겹게 마법사의 탑 앞에 도착한 로벨리는 자신의 얼굴에 핀 미소만큼이나 활짝 문을 열었다.

“저 왔어요, 스승님! 어제까지만 해도 날이 안 좋아서 피크닉을 못 가면 어쩌나 엄청 걱정했는데, 날이 개어서 다행이에요! 빨리 피크닉하러 가요!”

“그래, 알았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평소보다 배는 신나있는 로벨리를 보며 피식 웃은 마법사가 식탁에 둔 바구니를 챙겼다.

“가자꾸나. 슬라임들은 미리 치워났으니 오늘은 더 나오지 않을 거다.”

“앗, 가자마자 슬라임부터 없애려고 칼 가지고 왔는데……. 필요 없게 됐네요. 여기다 두고 가도 되죠?”

“당연하지. 몬스터와 싸울만한 것들은 다 두고 가도 된다. 여차하면 그동안 배운 마법을 쓰면 되니까.”

“그건 그렇죠. 마법은 언제든 쓸 수 있으니 편하네요.”

로벨리는 말아놓은 돗자리 펼쳐 안에서 칼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고는 돗자리를 다시 돌돌 말아 들었다.

“그럼 이제 진짜로 가요. 뭐 더 챙기실 건 없으시죠?”

“그래. 다 챙겼다.”

둘은 다시 한번 빼먹은 물건은 없는지 확인하곤 탑을 나와 탑 뒤에 있는 숲으로 향했다.

자주 들락거렸던 숲이었기에 로벨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로벨리의 얼굴이 놀람과 감탄으로 물들었다.

예상치 못한 풍경에 로벨리가 감탄사를 뱉으며 눈을 크게 뜬 상태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은 사시사철 봐오던 푸르른 녹음 대신 익숙지 않은 분홍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와아……! 이거 어떻게 하신 거예요? 여기 있던 나무들 벚나무 아니었잖아요. 마법이에요? 아니면 나무를 새로 심으셨나? 으음, 그치만 마법이면…….”

갑자기 바뀐 풍경에 놀라기도 잠시. 금세 진정한 로벨리는 나무에 가까이 다가가 감촉 등을 확인하며 진짜인지 마법인지 알아내려고 했지만 결국 알아내지 못한 채로 마법사의 옆으로 갔다.

“스승님, 저거 진짜 마법이에요? 꽃잎이라든가 감촉이 엄청 생생한데……. 혹시 나무를 뽑아서 바꾸신 건 아니죠? 아니지, 원래 있던 것도 나무니까 잎 부분만 환각 마법을 걸면……. 아, 그래서 정말 어떻게 하신 거예요?”

“그건 다음에 알려줄 테니 우선 돗자리부터 펴자꾸나. 지금 알게 되면 열심히 준비한 선물의 감동이 떨어질 테니까 말이야.”

마법사가 한번 말한 것은 지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로벨리는 호기심을 애써 억누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꼭 알려주셔야 해요. 꼭이요!”

“그래, 그래. 네가 수업 듣기 싫다고 도망가면 억지로 붙잡고서라도 알려주마.”

다시 한번 확답을 받은 로벨리는 그제야 만족한 듯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좋아요! 그러면 스승님을 말대로 돗자리를 펴죠. 위치는…… 연못 근처로 할까요?”

“원하는 대로 하거라. 어차피 이 근방의 나무는 모두 벚나무로 바꿔놨으니.”

“여기서 보이는 부분만이 아니라요? ……이게 마법이면 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들 것 같네요…….”

미간을 찌푸리면서 자신이라면 얼마나 버틸지 생각하던 로벨리는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고 연못 근처에 돗자리를 깔았다. 각 모서리에는 바람에 돗자리가 날아가지 않도록 바구니와 돌 따위를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돗자리를 다 깔자마자 신발을 벗고 올라가 앉은 로벨리가 문득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는 벚나무를 보더니 물었다.

“스승님, 그러고 보니 이 나무들은 왜 준비하신 거예요? 스승님도 꽃이 보고 싶으셨어요?”

“……내가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아 꽃놀이를 가지 못한 것이 신경 쓰여서 준비했다. 이제 그 주주시티란 곳보다 훨씬 아름답지 않나?”

마법사가 평소와는 달리 으스대며 말하자 로벨리가 유쾌하게 웃었다.

“그야 당연하죠. 거긴 사람이 나무보다 많았는데 여긴 나무밖에 없잖아요. 게다가 스승님이 절 위해 준비해주신 것과 어떻게 비교 할 수가 있어요. 만약 여기 있는 벚나무가 단 한 그루였어도 주주시티보다 훨씬 예뻤을 거예요.”

로벨리의 말에 작게 미소지은 마법사가 로벨리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준비한 보람이 있군. 뭐든 보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거라. 세상에 없는 것이더라면 만들어서라도 보여주마.”

“진짜요? 그럼 제가 가지고 싶은 건요?”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한다면 안 되지만 내게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주마.”

“그거면 충분해요! 헤헤, 스승님도 원하는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구해다 드릴게요!”

“무리하지는 말아라. 법을 위반하지도 말고. 내 제자가 범법자로 끌려가는 것은 보고 싶지 않으니.”

“그러면 좀 힘들겠지만…… 노력은 해볼게요!”

로벨리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자 마법사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 그나저나 슬슬 점심 먹을까. 조금 출출하구나.”

“좋아요! 스승님이 만드신 샌드위치 엄청 기대돼요!”

“샌드위치가 한 종류면 질릴 것 같아 인터넷 검색…… 이란 것을 해서 햄과 치즈가 들어간 샌드위치와 핫치킨 샌드위치 두 종류로 준비했는데 뭐가 더 좋으냐.”

얼마 전에 배운 인터넷 기능이 아직 익숙지 않았는지 마법사가 어색하게 말하자 그 모습이 귀엽게 보인 로벨리가 조그맣게 웃었다.

“빈속에 바로 매운 건 안 좋을 테니까 햄치즈로 주세요!”

“알았다. ……그러고 보니, 샌드위치의 종류가 그렇게 많았는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 내가 모르는 이상한 이름의 재료와 소스도 많더군. 그것들을 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요즘 사람들은 요리 한 번 하는 것도 참 고생이겠어.”

마법사는 바구니에서 샌드위치 두 개를 꺼내 하나는 로벨리에게 건네며 말했다.

재료를 찾아 가능한 사람이 적은 곳에서, 원하는 재료를 찾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었었기 때문에 그것을 떠올리며 말하는 마법사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렇지도 않아요. 한 번에 살 수 있는 곳이 있거든요. 여긴 시골이라 없지만 주주시티만 가더라도 그런 식료품점이 두세 개는 있을걸요? 아니면 인터넷 배송도 있고요. 말씀해주셨으면 제가 구해다 드렸을 텐데.”

“그러면 네게 뭘 만들지 알리는 것이니까. 나도 이 정돈 만들 수 있다고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다. 식료품점이면 사람이 많을 테고. ……그런데 인터넷 배송은 또 뭐냐. 그걸로 물건도 살 수 있는 건가?”

“네에, 뭐……. 그치만 스승님은 카드나 핸드폰이 없으셔서 못 사실 거예요. 제 카드를 빌려드릴 순 있지만요. 빌려드릴까요?”

로벨리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먹으며 묻자 마법사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됐다. 제자의 것을 빌리는 건 스승으로서 내키지 않는구나. 인터넷 배송이란 것은 나중에 더 익숙해지면 부탁하마.”

“네, 알겠어요. 그런데 이 샌드위치 정말 맛있네요! 나중에 레시피 적혀있던 사이트 알려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지. 네 입에 맞는다니 기쁘구나. 열심히 찾은 보람이 있군.”

“아, 그렇지. 샌드위치만 먹으면 목이 막힐 테니까 주스랑 같이 드세요. 딸기가 잘 익었길래 주스로 만들어 왔어요.”

로벨리가 바구니에서 컵과 주스 병을 꺼내 주스를 따라 마법사에게 건네자 마법사는 바로 한모금 마시더니 조그맣게 미소지었다.

“무척 맛있구나.”

“그렇죠? 정말이지, 전 농사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고 너무 대단한 것 같아요.”

로벨리가 우쭐거리며 말하자 마법사는 본업이 농부라는 사실을 일러줄까 하다가 포기하곤 뜨듯미지근한 눈으로 로벨리를 보았다.

“……그래. 대단하구나.”

“후훗, 제가 좀 그렇죠.”

허리에 손을 얹어 의기양양한 포즈를 취하더니 뭔가 떠올랐는지 마법사를 보며 말했다.

“스승님. 혹시 괜찮으시면 이참에 스승님도 식물 키워보실래요? 허브 종류를 키우시면 굳이 살 필요도 없이 필요할 때 뜯어서 쓰면 되니까 편하지 않을까요?”

“허브라……. 뭘 키우는 건 자신 없어서 키우겠다 확답은 할 수 없지만, 한번 생각해보마.”

“네! 키우실 마음이 생기면 말해주세요. 모종도 드리고 키우는 법이랑 알려드릴게요!”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이다 어느새 샌드위치를 다 먹었는지 로벨리의 손이 빈 것을 확인하고는 샌드위치가 든 바구니를 로벨리 앞에 두었다.

“나한테 달라고 하는 것보다 직접 꺼내 먹는 게 더 편하겠지. 넉넉히 만들어 왔으니 많이 먹거라.”

“앗, 감사해요.”

로벨리가 핫치킨 샌드위치를 꺼내 한 입 먹고서 엄청 맛있다며 마법사를 칭찬하자 마법사가 무척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그 뒤로도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며 점심을 먹은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점심 식사를 마쳤다.

“하아, 배부르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뒷정리를 마친 로벨리가 돗자리 위에 벌러덩 눕자 쓰레기 정리를 하고 있던 마법사가 타박했다.

“먹자마자 바로 누우면 몸에 안 좋다. 일어나거라.”

“에이,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요.”

그리 말해놓고 로벨리가 아예 팔까지 베자 마법사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면서도 딱 10분 만이라며 로벨리를 두었다.

로벨리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눈을 감으며 자연을 만끽했다. 마침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자 로벨리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여유롭고 너무 좋네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잡초 뽑느라 정말 뼈 빠지는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은 여유가 있어야 해요.”

“그래. 그래도 이제 어느 정도 정리되었으니 한숨 돌릴 수 있겠지. 수고 많았다.”

“더 칭찬해주세요, 더. 앞으로 힘낼 몫까지요. 너무 힘냈더니 정말 손가락 까딱 할 힘도 없는 것 같아요.”

로벨리가 칭얼거리자 마법사는 그 모습이 부모에게 어리광부리는 아이 같아 보여 작게 웃으며 말했다.

“잠시 팔 좀 풀어 보거라.”

로벨리가 의문을 품으면서도 팔을 풀자 마법사가 로벨리 옆에 눕더니 로벨리의 목 아래에 왼쪽 팔을 집어넣었다.

“이거면 만족하나?”

“……네, 네, 네, 네. 완전요.”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라 굳었던 로벨리가 뒤늦게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잠시 마법사를 쳐다보더니 조심스레 마법사에게 바짝 다가가 오른쪽 팔을 자신의 등에 두르곤 헤헤 웃었다.

“부담스러우시면 말씀하세요. 고개 숙일게요.”

“떨어진다곤 안 하는구나.”

“그야 당연하죠. 마음 같아선 이대로 평생 붙어있고 싶은걸요.”

“……네가 원하면 언제든 해주마. 대신 때와 장소는 가리거라.”

마법사가 살짝 부끄러워하며 말하자 로벨리가 충격받은 듯이 입을 쩍 벌렸다.

“저, 저 오늘 생일인가요? 아니면 꿈인가? 스승님이 왜 이렇게 다 받아주시지? 평소였으면 10분 지났다고 일어나라 하셨을 텐데.”

“……우린 연인 아니냐. 가끔은 이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을 뿐이다.”

“뭐예요, 진짜……. 스승님 완전 귀여워요. 완전 사랑해요, 스승님!”

부끄러워 괜히 틱틱거리는 마법사가 참을 수 없이 귀여웠던 로벨리는 마법사의 품에서 부르르 떨다가 마법사를 꽉 끌어안았다.

“진짜 스승님 저랑 평생 살아요. 저 버리고 다른 사람 만나면 평생 용서 안 할 거예요. 제가 돈도 벌어오고 밥도 해드릴 테니까 스승님은 마법 연구만 하세요. 마법 연구에 필요한 것들 전부 구해드릴 테니까 저랑 평생 같이 살아요. 저 말고 다른 사람 좋아하면 평생 저한테 쫓길 각오하세요. 절 이렇게 꼬셨으면 응당 책임을 져야죠. 진짜 너무 귀여워요. 제가 그렇게 쉬운 사람 아닌데 스승님 앞에만 서면 완전 너무 쉬운 사람 되어버리잖아요. 스승님 탓이니까 스승님 인생으로 그 값 받아낼 거예요. 각오해요, 진짜. 평생 안 놔줄 거야.”

로벨리가 랩 하듯 쉬지 않고 말하자 처음엔 익숙하다는 듯이 조용히 듣던 마법사가 중간부터는 무척이나 떨떠름한 얼굴로 변했다.

“……로벨리, 하니 짚고 가자면 난 네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네가 날 보더니 끈덕지게 달라붙은 것 아니냐.”

“그런 세세한 부분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제가 스승님 앞에선 완전 맥도 못 추고 쉬운 사람이 된다는 거죠. 하아……. 절 쉬운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스승님의 얼굴은 언제나 최고예요. 아, 물론 인품도 그렇고 성격도 완전 최고죠. 틱틱거리면서도 세심하게 챙겨주시는 스승님은 언제나 너무 귀여워요.”

로벨리가 마법사를 보며 부담스러울 만치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마법사는 이해할 수 없지만 로벨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한참을 로벨리와 대화를 나누던 마법사는 로벨리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자 낮잠이나 자자며 로벨리의 등을 토닥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벨리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깨어있을 때와는 달리 잠든 로벨리의 얼굴은 무척이나 얌전하여 신기하다는 듯이 구경하던 마법사도 전날 밤늦게까지 연구하느라 피곤했었기에 곧 잠들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마법사보다 먼저 일어난 로벨리는 아까 마법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잠든 마법사의 얼굴을 구경했고, 충분히 구경하고도 마법사가 일어나지 않자 잠든 얼굴을 더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마법사를 깨웠다.

자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두 사람은 파랗던 하늘이 붉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서둘러 짐을 챙겨 일어났다.

짐을 다 챙겨 마법사의 탑으로 가는 길에 오랜만의 데이트였음에도 한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던 로벨리가 투덜거렸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저녁이라니 아쉬워요……. 스승님이랑 더 놀고 싶었는데…….”

“올해 봄은 이제 막 시작이고, 내년도 있으니 다음에도 또 가자꾸나. 그러니 너무 아쉬워하지 말거라.”

“……그렇죠. 다음에 또 피크닉 가요, 스승님. 제가 더 좋은 곳을 알아볼게요!”

축 처져있던 로벨리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씩씩하게 말하자 마법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장단을 맞춰줬다.

“그래. 나도 다음엔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마.”

“여기서 더 맛있으면 정말로 가게 차리셔야 할 것 같은데요. 스승님은 저랑 살아야 하니까 안 돼요.”

“……그럼 오늘만큼만 맛있게 만들도록 하마.”

“좋아요! 다음 피크닉까지 여러 가지 요리 알려드릴게요. 피크닉이니까 간단하고 먹기 쉬운 것들로요!”

탑으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로벨리는 끊임없이 재잘거렸고,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게 대답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탑에 도착하자 마법사는 짐만 두고 나와 다시 저녁을 먹기 위해 로벨리의 집으로 향했다.

저녁은 두 사람이 함께 준비했는데, 마법사가 만든 빵은 모양은 이상했지만,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으며 로벨리가 만든 야채스튜는 맛도 외관도 훌륭해 마법사의 요리를 배우겠다는 의지에 불을 지폈다.

배부르게 저녁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한 침대에 같이 누워 책을 읽거나 로벨리의 웃긴 얘기를 듣거나, 다음 피크닉 때에는 뭘 하는 게 좋겠다고 구상하는 등 둘만의 느긋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 새벽이 되어서야 간신히 잠들었다.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무척이나 행복하고 즐거웠던 올해 첫 데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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