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있네.”
하즈키 린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느릿한 움직임을 멈춘 그녀의 눈동자에 계절을 알리는 꽃송이들이 들어온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멈춰있다가 결국 그것들을 조심스레 주워들었다. 살랑이는 바람에 아직은 낯설게만 느껴지는 호의가 실려 든다. 꽃망울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봄이었다.
夏葉
그것은 고작 2주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메마른 땅을 적시고 들던 가랑비는 조금 차가웠고, 흙덩이에서 돋아나는 생명의 초록빛이 선명했던 그런 날. 계절이 막 시작되는 사월의 하루는 왜인지 모르게 조용하기만 했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경쾌한 빗방울 소리가 정적을 채우는 것도 아주 잠시뿐이었지만.
“나츠메 군?”
이제는 익숙해진 그 이름의 울림이 썩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부른 이가 그 사람이 아닐 리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잠시 기다리면, 곧 시선이 맞닿는다. 린은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우산을 기울여주었다.
“이런 곳에서 뭐해요? 비까지 맞으면서.”
“아, 찾을 것이 있어서. 하즈키 상은 지금 집에 가요?”
나츠메 타카시는 그렇게 대답했다. 조금 어색한 웃음을 내보이다가도,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린의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면서. 그는 우산 손잡이를 쥐고 있는 린의 손을 감싸며, 다시금 우산을 그녀 쪽으로 기울여주었다. 아마도 제 대신 비를 맞는 그녀가 신경 쓰인 탓이리라. 린을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 손을 잡은 것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체온이 전해지고, 자신을 빤히 올려보는 린의 얼굴을 본 후에야 그는 다급히 손을 떼었다. 서투른 사람. 하즈키 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생각했다. 조금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눈을 마주하는 것을 피하지 않는 그 점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표정을 숨기는 것도, 거짓말을 하는 것도 어설픈 그는 자신과 다르게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었다. 이상하리만치 낯선 감각에 마음이 술렁거린다. 금세라도 이름이 붙어버릴 것만 같은 감정들을 꾹꾹 눌러내며 이어가는 불안한 호흡에 열기가 담긴다. 지금의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온도였다. 더 이상 지금의 뜨거운 공기에 수몰되어가고 싶지 않았기에, 린은 분위기를 바꾸고자 느리게나마 입을 열었다.
“또 요괴의 일?”
“…눈치챘어요?”
나츠메 군은 얼굴에서 다 티나는 걸요. 린은 작은 웃음을 흘리고 자신도 돕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타카시가 괜찮다고 대답할 것까지 예상하고, 그 후에 할 말까지 생각해두었건만, 그런 것은 하등 쓸모 없어질 만큼 명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너도 날 도와서 씨앗을 찾게 해줄게!”
씨앗? 당황한 타카시와는 다르게, 린은 무척 담담한 얼굴로 어느새 나타난 요괴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리에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춰주자 요괴는 설명을 시작했다. 그 요괴는 자신이 모시는 산의 주인을 위해 신비한 꽃의 씨앗을 가지고 가고 있었다고 했다. 100년에 한 번밖에 피어나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그런 꽃. 중간에 다른 요괴의 방해만 없었더라도 멀쩡히 들고 갔을 거라는 요괴의 말에 쓰게 웃으며, 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막막한 기분이 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산은 넓었고, 수도 없이 많은 것들이 있으니까 그 속에서 작은 씨앗을 찾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도와주겠다며 약속까지 하는 자신은, 이곳에 물들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상냥한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는 따스함을 배운 것이라고. 무리할 필요 없다는 걱정을 건네는 타카시를 바라보며, 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언젠가는, 자신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막연한 기대를 품으면서.
夏葉
“있지, 아까 나츠메한테 우산 같이 쓰자는 말을 하려했지?”
“…그런 거 아니야.”
린은 바닥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씨앗을 찾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씨앗의 크기가 무척 크다는 것과 기이한 빛이 난다는 걸까. 옆에서 재잘거리며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요괴의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린은 방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빗줄기는 약했지만, 계속해서 맞는다면 분명 감기에 걸릴 테니까. 그것이 걱정되었을 뿐이었다. 사실은, 나츠메 군이 가지고 오지 않았을까봐 챙겨온 작은 우산이 가방 안에 하나 더 있다는 얘기와 함께 우산을 쓰자는 얘기, 둘 중 어느 하나 부끄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자신은 이쪽을 찾아보겠다는 타카시를 붙잡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보니, 어느새 비가 멎어들었지만. 린은 한숨을 쉬다가도 자신의 양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서는 다시금 씨앗을 찾는 일에 집중했다. 이질감 하나 없는 그녀의 모습에, 요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츠메를 좋아해?”
“네 물건을 찾는 일이니까 조금 집중해주지 않을래?”
“아니, 그게 아니라면 너는 퇴치사인데 왜 요괴를 도와주지?”
요괴를 좋아하는 퇴치사 같은 건 모순적일 뿐이니, 린은 그저 미소 지었다.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세상에 발을 딛고 서있는 일은 언제나 위태롭기만 하다. 그 고독함에 휘둘리지 않을 때도 된 것 같은데. 아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감정을 부정하기만 하고, 나중의 이별이 두려워 타인의 선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미숙한 자신에게는. 린의 표정을 빤히 올려다보던 요괴는 무언가 잘못 말했다고 생각했는지 급히 화제를 돌렸다. 다음에 오는 것들은 나츠메와 관련된 것도, 그리 무거운 것도 아니었기에 둘은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산을 둘러보았다. 씨앗을 찾은 것은 한참이 지나, 어둠이 내려앉은 후의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잃어버리지 마. 예쁜 꽃이 피었으면 좋겠다.”
“응, 둘 다 도와줘서 고마워. 저기, 하즈키. 꽃을 좋아해?”
린은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순 좋은 생각이라도 난 건지 밝아지던 요괴의 표정을 눈치 챘어야 했는데. 끝까지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그녀는 그저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아마 요괴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면 그런 일은 하지 말라며 말렸을 게 분명했다.
夏葉
“그래서, 오늘도 받았어요?”
린은 제 옆에서 걸어가는 타카시를 힐긋 쳐다보았다. 그는 지금의 상황이 즐거운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무언가를 말하려다가도, 린은 그저 입술을 삐죽거릴 뿐이었다.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요괴를 도와준 그 일 이후 매일 같이 현관 앞에 작은 꽃들이 놓여 있는 것이, 자신은 이런 따듯함을 받을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닐 텐데. 잠시 제자리에 멈춰선 린은 허공을 부유하는 분홍빛의 꽃잎을 멍하니 응시했다. 세상의 색채를 한가득 담아내는 꽃송이들에게서는 생명이 피어나는 포근한 향기가 난다. 누군가가 자신을 생각해주는 일은 아직 생소하기만 해서, 묘하게 마음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꽃을 말리는 일은 은근 힘들고, 책갈피로 만드는 것도 한두 번이니까 보관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에요. 꽃이 싫은 건 아니지만…”
하핫,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쏟아지듯 흩날리는 빛깔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제 앞에서 웃고 있는 이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보였다. 타카시는 손을 뻗어 린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작은 꽃잎을 떼어주었다.
“미안. 그래도 역시, 하즈키 상은 다정한 사람이구나 해서. …그런 작은 꽃들, 무시하려면 무시했을텐데.”
여전히 웃는 게 다정한 사람이구나, 하고. 린은 타카시의 눈동자에 자신이 담기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조심스러운 손길과 유한 목소리, 작은 행동과 말 사이사이에서 묻어나는 애정이 단순히 친구를 대하는 우정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나 열기 담긴 감정을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는 자신은 역시 당신 같은 상냥한 사람은 되지 못하겠구나 싶었다. 성장하지 못하고, 미숙하고 치기 어린 그대로, 닿을 수 없는 여름을 동경하면서.
“그 요괴가 지내는 곳을 알아요. 이번 주말에 같이 갈까요? 벚꽃이 아름답게 피는 곳이니, 함께 꽃구경도 하고 싶은데. 우리 둘이서.”
나츠메 타카시는 아주, 아주 부드럽게 웃으며 린의 손끝을 매만졌다. 사실,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맞닿은 피부에서부터 아로새겨지는 감정과 시끄러운 심장 박동 소리는 그 무엇보다 뚜렷하게 느껴져 오곤 했으니까. 그러니, 여러 가지 의미로 많은 것들이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으리라. 단 한 번도 꺼내지 못하고 꽃향기 뒤에 숨겨두기만 했던 이 마음도, 지금의 계절이 지나가면 확실하게 드러날 것이었다. 작열하는 태양의 빛살이 닿지 않는 곳은 없으니까. 하즈키 린은 타카시를 따라 마주 웃었다.
“그래요, 같이 가요. 우리 단둘이서.”
봄, 사랑이 피어나는 그 계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