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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모대학교는 매해 4월, 벚꽃이 가장 아름답게 흩날리는 날 첫 졸업사진을 촬영했다. 벚꽃이 피는 날이 다가올수록, 채은의 마음도 나뭇가지에 매달린 꽃망울처럼 천천히 부풀었다. 졸업사진이다, 드디어 졸업이다! 말간 웃음은 푸른 하늘을 닮아 산뜻했고, 화장대 앞에 앉아 스스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어느 때보다 심혈을 기울이는 듯 진중했다. 그녀의 뒤에 서서 머리를 가지런히 빗질하던 허묵이 거울 속의 아내를 보고는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열 시부터라고 했죠? 구경 가도 괜찮나요?”

“상관없어요. 조금 부끄럽긴 하겠지만.”

“하하, 뭐 어때요. 당신이 가장 예쁠 텐데요.”

“…그런 말 제 친구들 앞에선 하지 마세요. 분명 놀릴 거란 말이에요.”

 

채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에 미스트를 한 번 뿌린 허묵은 코끝을 잠시 대고 있다가, 이내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머리칼이 흩날리며 풍기는 달콤한 꽃향기와 새빨갛게 물든 두 볼까지. 잘 익은 앵두 알을 연상케 했다. 쪽. 허묵이 그 틈을 참지 못하고 짧게 입 맞췄다. 채은도 못 이기겠다며 고개를 살짝 내젓다가 입술 사이로 웃음을 흘렸다.

 

끝나고 먹고 싶은 게 있냐는 허묵의 물음에 채은은 주저하지 않고 치킨이라 답했다. 오늘을 위해 몇 주간 혹독하게 다이어트를 했던 그녀였다. 머릿속에는 그간 다양한 이유로 실패했던 수많은 졸업 사진들이 스쳤다. 이번에야말로 성공하고 말 거야! 그 굳은 각오와 다짐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는지, 촬영 당일인 오늘의 그녀는 볼에 붓기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이었다. 허묵은 채은의 마른 볼을 살짝 잡고는 말했다. 목소리에는 걱정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바보. 살 안 빼도 예뻐요, 당신은.”

“그렇지만 카메라는 가끔 사람을 배신하곤 하니까요.”

“당신이 그렇다니 그동안은 말리지 않았지만, 이제는 끼니도 든든하게 챙기도록 해요. 한참 중요한 시기기도 하잖아요.”

 

다정한 말에 채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새끼손가락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곧 당연하다는 듯 허묵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 위에 걸렸다. 자, 그럼 약속도 했으니 이만 가 볼까요? 벽에 걸린 시계의 짧은 침은 어느덧 9를 향해가고 있었다. 채은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교 전, 오롯이 단둘이서 나눌 수 있는 다정하고 따뜻한 시간. 바야흐로 봄이었다. 이다지도 그들을 닮은 계절이었다.

 

*

 

     명색이 졸업사진이니 학사복과 학사모는 필수였다. 채은은 친구들과 함께 대여한 학사복을 몸에 걸치고는 어색한 듯 웃었다. 졸업이라니, 멀게만 느껴졌던 단어와의 거리가 성큼 가까워진다는 것은 역시 어색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설레기도 했다. 프레임에 담길 학사복 차림의 제 모습은 또 어떨까? 다른 때보다 조금 더 의젓해 보이려나? 기대감으로 똘똘 뭉친 생각들이 뭉게구름이 되어 머릿속을 유영했다.

 

“어? 채은아, 저기 허 교수님 오신 거 아니야?”

 

그때, 채은의 친구들이 한 곳을 응시하더니 채은을 불러 세웠다. 그들의 말대로 허묵이 근처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그녀의 시야에 닿았다. 멀리 떨어져 있던 채은은 그를 힐끔 보더니, 그와 눈이 마주칠세라 급히 고개를 홱 돌렸다. 이렇게 당당히 와서 대놓고 볼 생각이었던 거야? 흔들리는 동공은 당혹스러움을 채 다 감추지 못했다. 한편 채은의 곁에 있던 친구들은 그녀의 표정을 다 읽어낸 것인지, 서로 장난스러운 눈빛을 주고받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양쪽에서 채은을 붙잡았다. 양팔이 붙들린 채 허묵에게 끌려가는 채은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야, 너희들 뭐 하는 거야, 지금?

 

“자요, 교수님! 여자친구 배달 왔어요.”

“하하. 고마워요. 분명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친구들은 제게 주어진 임무를 마쳤다며 손을 흔들고는 저만치로 재빠르게 사라졌다. 채은이 다급하게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야, 야, 너희 어디 가! 허나 그들의 뒤통수에는 닿지 않을 구조 신호였다. 허묵이 빙긋 웃으며 그녀의 볼을 매만졌다. 그녀를 향한 눈빛과 미소에는 적당한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피해 있을 생각이었나요? 조금 서운한데요.”

“그, 그게 아니라…! 어차피 카메라 앞에 서면 볼 거였잖아요!”

“그렇지만 미리 보고 싶었는걸요. 역시, 잘 어울리네요.”

 

말이나 못 하면… 채은은 볼을 뾰로통하게 부풀렸지만 내심 그 말이 싫지는 않은 듯 입꼬리를 위로 올려 웃었다. 귀여워라. 허묵이 고개를 숙여 그녀와 눈을 맞추고는 볼 위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아직 조금 어색한 것도 있어요. 새내기였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러게요.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가 그때였죠? 당신이 이만큼 성장했다는 게 눈에 보여서 좋네요. 한편으로는, 조금 양심도 찔리고.”

 

이렇게 어린 신부를 벌써 낚아채 가도 되는 건지.

허묵이 장난스레 말하고는 웃었다. 그의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작은 돌부리이기도 했다. 채은은 허묵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예쁘게 휘어진 곡선의 눈꼬리와 빛나는 동공이 햇빛처럼 따사롭고 사랑스러웠다.

 

“그런 생각은 더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저는 교수님, 아니, 허묵 씨가 너무 좋은걸요.”

“나 또한 그래요. 나의 사랑스러운 신부. 늘 고맙고 좋아해요.”

 

바람은 계절마다 다른 공기를 싣고 찾아왔다. 여름의 두터운 바람, 가을의 선선한 바람, 겨울의 매서운 바람. 그리고 봄의 바람에게 이름을 붙이자면 그것은 포근함일 것이다. 벚꽃과 함께 만물의 생명을 싣고 불어오는 바람은 더없이 따스했다. 채은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여기서 사진 한 번 같이 찍을까요? 허묵 씨와 찍는 졸업 사진도 있어야죠.”

“그래요. 잘 부탁할게요.”

 

찰칵. 학사복과 학사모를 갖춰 입은 채은의 모습과 연구실 가운을 단정히 차려입은 허묵의 모습이 작은 프레임 속에 담겼다. 두 사람의 행복한 미소까지도. 새파란 하늘과 연분홍빛의 만개한 벚나무는 그들의 시간을 다채롭고 화사하게 장식했다. 다신 되돌아오지 않을 봄. 그들의 계절이 조금 더 깊게, 아름답게, 달콤한 색깔로 스며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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