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주, 저랑 꽃 보러 가겠습니까?”
“꽃…? 어디로?”
“이 손찬오가 아무도 모르는 장소를 알아냈지요.”
다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바로 낭주에게 말해주는거라며 너스레를 떠는 손찬오의 모습에 채유하는 한참 눈을 꿈벅였다. 오늘은 아버지의 상태도 나쁘지 않고, 봄이 왔다는 걸 알려주듯 저절로 들뜨는 마음과 흩날리는 꽃잎들에 자연스레 발걸음이 바깥으로 향하기 좋은 날이었다. 무작정 걸음을 옮기며 우연히 제가 사모하는 이를 만나게 되길 기대하고 상상하게 되는 어느 봄날. 그가 바쁜 걸 알면서도 자주 다니던 길가에 서성거리자 마치 작은 소원 하나 이루어진 듯 불쑥 고개를 내민 손찬오를 마주할 수 있었다. 제 시선에 닿는 환한 웃음이 그에게 좋은 일이 있었는지 예상할 무렵, 그는 마치 엄청난 사실을 알았다며 과장스런 손짓과 목소리를 내어 꽃구경 하자는 말을 제게 권하였다. 그의 말에 먼저 나온 건 의문이었다. 서라벌에 아무도 모르는 장소라니, 그 말이 거짓처럼 느껴지는 건 아니었으나 꽃을 볼 장소라면 제가 사는 집 근처에도 널려있는 것인데 따로 장소까지 알아냈다는 말을 영 이해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저와 꽃을 보려면 집 근처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아무도 모를 장소라 강조하는 걸 보니 단 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건 저만 원하는 일도 아닌 듯 하고. 어찌됐든 그가 권하는 걸 거절할 만한 이유가 제게 없었다. 그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으니까. 그가 원한다면 무얼 해도 좋으니까. 게다가 당당하게 보이는 웃음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얼굴이니 결국 저도 좋다며 웃을 수밖에. 그가 제 생각을 하며 꺼낸 이야기라면, 그저 저 웃음에 넘어가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제 대답을 마냥 기다리며 내밀고 있는 손을 잡았다. 따스한 봄바람에 얹어지는 따스한 손길이 퍽 익숙했다.
“그대가 하는 권유를 내가 어찌 거절하겠나요.”
*
“아무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상하네… 저번에는 사람이 퍽 없더니만!”
“저번에 온 게 언제인데?”
“사흘 전? 아니, 벌써 나흘이 흘렀던가…”
그 정도면 입소문은 금방이잖아요. 그의 반응에 채유하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확실히 그의 말 따라 언덕을 올라 작은 산길까지 지났으니 아무도 몰랐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일부러 산 속만 골라 다니는 게 아닌 이상 누구든 쉽게 오지 못 할 장소 덕분인지 이곳까지 오는 길에도 마주한 이가 없어 사람 하나 없는 넓은 풍경을 절로 기대하게 되었다. 제게도 조금은 벅찬 길 끝에 기대와 달리 보이는 건 적지 않은 사람들과 그에 맞는 목소리들이었다. 발걸음을 하기 영 쉽지 않아도 이 봄날, 화려하게 핀 꽃나무와 들판에 사람 하나 없기도 영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제 집 주변에도 이곳만큼 꽃이 화려하게 핀 것은 본 적이 없었다. 누구든 봤다면 쉽게 지나갈 수 없는 풍경은 아마 그가 알아낸 이후에도 사람들의 시선을 끈 모양이었다. 좋은 풍경이 있다면 누구든 혼자 보기 아까운 법이지. 사람이 모인다면 이야기가 퍼져나가기 쉽상이고. 저였어도 지금처럼 꽃이 만개한 풍경을 봤다면 바로 손찬오를 불러 가자고 했을 터였다. 그와 볼 수 있는 꽃놀이라니… 날도 화창하고 친우들 없이 오로지 단 둘이다. 지금 상황에 아쉬운 게 있다면, 오가는 사람들의 말 속에서 채유하는 손찬오를 흘긋거리다 결국 시선을 내렸다. 시장판처럼 북적거리는 상황은 아니었으나 소란스러움에 오로지 풍경만을 감상하기도 쉽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제 예상보다 많은 이들 속에 어색한 기분을, 아무리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어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어느 곳에 있든 사람 많은 곳은 달갑지 않다. 그도 이런 저를 모르는 건 아니겠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는 사람이 있어도 개의치 않겠다 싶었다. 그는 가끔 저를 혼자 두지 않으려 하니까. 홀로 서있는 모습을 탐탁치 않아 했으니까.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잖아?”
예상했듯이 손찬오는 채유하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익숙한 이끌림. 손을 잡는 것부터 자신을 잡아당기는 모습까지. 발걸음은 이미 우리가 향할 길이 정해져 있다는 듯 당당히 걷는 걸 보면 저는 결국 따라가고 마는 것이었다. 낯선 이들은 그리 달갑지 않으면서도, 마치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냐며 그가 말하는 기분이 들어서, 잡은 손을 내칠 수 없었다. 그도 알고 있으니 더더욱 나서는 발걸음이 당당할 테지. 잡고 있는 손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 더더욱 사람들 틈에 저를 데려가는 것이고. 모를수가 없었다. 손찬오는 유독 채유하가 타인들과 어울리는 날이면 손을 잡으려 하는 날이 많았다. 그게 그가 데려온 친우들이든, 채유하의 지인들이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잡고 있으니 네가 신경 쓸 건 하나 없다는 듯, 제가 있으니 괜찮다는 듯, 원래 그의 의도는 모르겠어도 채유하에게 있어서는 그리 느껴졌다. 이유를 붙이는 건 제가 그에게 마음이 있는 탓일지도 모른다. 친우 하나 걱정하는 걸 멋대로 의도를 넣어 혼자 설레는 걸지도 모르고. 그런 생각이 들게 되면 채유하도 마찬가지로 손찬오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나는 오로지 네가 있어서 괜찮다고, 이 손길 하나로 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니 나는 네가 없다면, 이렇게 꽃이 핀 곳도 사람이 많은 곳도 오지 않았을 거야. 내가 좀 더 당당한 성격이었으면 이 손도 내가 먼저 잡았을 텐데.
그렇게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나란히 꽃길을 걷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꽃잎을 잡아본다거나 나뭇가지에 달린 꽃을 머리에 꽂아주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찬찬히 내리는 어둠에도 사람은 영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이거 원, 다들 꽃을 못 봐서 한 맺혔나!”
“그렇게 말하면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저야 원래 낯을 가리니 지금 상황이 영 껄끄러워도, 사람들 속에 잘 파묻히는 손찬오가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제 팔짱을 낀 채 고개만 연신 기울였다. 그의 고갯짓에 따라 흔들리는 나뭇가지도 살랑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 길에 떨어진 꽃을 주워 방에 놓기 딱 좋은 꽃이라 말하니 손찬오가 제게 더 어울리는 꽃이라며 고개를 기울인 탓에 귓가에 꽂아준 꽃이었다. 그의 말에 보통 이런 건 나한테 해주지 않냐며 대꾸하자 제게 더 어울리는 걸 어찌 하냐며 돌아오는 답까지, 평범하면서도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작은 일상이었다. 그러니 채유하에게는 지금 상황이 꽤 만족스러웠으나…
“으음… 역시 이대로는 뭔가 아쉬운데…”
“아쉬워요? 난 지금도 괜찮은데.”
“낭주께서 그렇게 포부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의미를 모르겠네…”
자, 갑시다! 손찬오는 그의 답에도 결심했다는 듯 다시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러니까, 포부가 무슨 상관인 건데? 하며 던지는 의문은 이미 손찬오의 귓가에는 닿지 않는 말이었다.
*
그렇게 한참 걸음을 옮기자 산의 중턱에 걸렸던 해는 이미 그보다 더 내려간 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주변이 어둡다 해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으니 지금 느끼고 있는 긴장감은 어둠으로 인한 감정이 아니라 제가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은 탓에 느껴지는 두근거림이었다. 이렇게 오래 손을 잡은 적은 없었는데. 각자의 생활이란 게 있으니 저녁 노을이 지면 헤어지는 게 일상이었고, 만난다면 친우들도 간혹 있었으니 오늘만큼 오랜 시간, 단 둘이 보는 건 어렸을 적 이후로 겨우 가져보는 시간이었다. 이대로 집에 가지 않고 계속 걸어도 좋을 텐데. 하지만 시선을 굴려 주변을 살펴보면 지금 걷고 있는 길은 제게도 익숙한 길이었다. 넓은 들판에 작은 꽃들이 널려있고, 쭉 내려가면 분명 저의 집이 나올 터인데. 채유하는 잡고 있던 손을 살짝 흔들었다. 아쉽다던 말은 어디 가고 제 집으로 향하는지…
“저, 찬오야… 근데 우리, 혹시 집 가는 거야?”
“뭐?”
“어, 아냐?”
“일부러 둘만 있을 곳으로 데려왔더니…”
낭주도 참, 눈치가 없지… 손찬오의 말에 채유하는 곧장 눈을 둥글게 떴다. 집에 가는 게 아니었어? 뒤늦게 생각해보면 들판에 오기까지 만난 이는 하나도 없었다. 낮게 어둠이 깔린 이 시각, 들리는 건 바람이 풀을 스쳐지나는 소리와 걷고 있는 두 개의 발소리와 오가는 목소리였다. 그제야 아쉽다는 말이 어디서 나온 마음인지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 길은 마을로 향하는 길이 아니니 늦은 시각에는 다른 이들이 지나가지 않으니까. 손찬오는 일부러 어두워질 시간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는 건 역시, 둘만 있고 싶었던 건 저 혼자만의 마음이 아니었다.
“나랑 둘만 있고 싶었어?”
“하여튼 꼭 입으로 뱉어야 알아주지.”
“그치만 사람들이랑 있는 쪽이 더 즐겁잖아.”
“그거랑 이거랑 같아?”
“그런가…”
“둔해빠져서는… 이쪽으로 와봐.”
제 반응에 한참 투덜거리던 목소리는 어느새 장난스런 목소리로 뒤바뀌었다. 넓은 들판 한 가운데 서있는 건 오로지 그들 뿐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봄바람만이 존재하고 있었고, 맞잡고 있던 손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손찬오가 저를 당기자 그의 품에 들어간 거리에서 그가 건넨 건, 아니, 직접 손을 뻗어 제 귓가를 스치고 간 것은 둘만 남았을 때에도 여전히 그의 귓가에 걸려있던 꽃이었다. 채유하는 손으로 꽃을 살짝 건드린 후에 다시 그를 마주하였다. 들렸던 목소리와 달리 손찬오는 조금 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때? 마음에 드나?”
“…네가 지금 내 앞에 있잖아. 난 그것만으로 좋아.”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잖아.”
바보같긴. 작게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도 채유하는 웃어보였다. 그치만, 사실인걸. 네가 나랑 있어서, 봄이 봄 같고, 여름이 여름 같아. 이어지는 말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무얼 그리 겁내는지 손찬오는 이따금 입을 다무는 때가 있었다. 채유하도 마찬가지로 이를 알고 있다는 듯 그에게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네가 있어 여전히 따스한 봄날이 네게도 따스한 봄날로 기억되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