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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라이트

레이브리엘×이데리하

   총애하는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레이브리엘은 가끔 자신과 가장 가까운 전사들을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었다. 호박을 보기만 해도 기겁하며 주춤 뒷걸음부터 친다던가-먹지도 않았는데 어째서?-피망을 실수로 한 입 씹었을 뿐인데 화장실부터 후다닥 달려간다거나-고작 한 입 먹었다고 죽상은. 술에 얼근하게 취하기 무섭게 갑자기 셔츠 앞섶부터 튿기 시작하는 프리드리히를 보면서 한 번은 왜 그러냐고 물은 적도 있었다. 물론 제대로 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눈 앞의 전사들은 그들 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아끼고,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전사들이었다. 오래도록 관찰을 하며 그 주변을 맴돌다보니 알쏭달쏭한 것들이 훨씬 많았다. 그 중 한 명은 불가해 영역의 행운을 지니고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앗싸! 이 몸이 또 왕!”

 

  왜 이러세요 50연패하다가 겨우 1승한 사람같이. 언제나 처음 승리했을 때처럼 좋아하는 디노의 모습에 리즈와 이데리하가 이미 계획한 것처럼 한숨을 쉬고, 콧방귀를 뀌며 푸념한다. 디노, 정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사기 치는 거 아니지? 레이브리엘이 리즈가 듣지 못하게끔 속으로만 중얼거린다. 사기급 행운은 맞겠죠. 걸핏하면 왕 패를 뽑고, 물구나무서기로 바인더를 한 바퀴 돌며 레지멘트 군가를 부르는 식의 민망함 대마왕 벌칙은 족족 피해갔으니. 손바닥에 감춘 5번이라는 번호판을 심드렁한 눈으로 바라보며 이번에는 저 천방지축 왕님께서 무엇을 내릴지를 이리저리 고민해본다. 디노의 벌주에 이미 한 방 먹어 EX라지 사이즈를 한 번에 들이켰던 이데리하는 얼굴이 발개진 채 벽에 기대 눈을 나른하게 깜빡이고 있다. 이기지도 못할 거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을 텐데.

  “으으으으으음, 으음, 좋아, 그럼 5번! 생전이든 여기 바인더에서든 좋아하던 사람이라던가 애인이라던가, 있으면 자랑해보는거다!”

  “웬일이냐. 이번엔 그래도 꽤 스무스하네, 디노.”

  “아, 살았다. 4번이었는데.”

  “아, 그럼 나 잠깐 좀 침대에서 쉬어도 되냐? 물구나무서기 한번 제대로 했더니 팔이 쑤셔.”

 

  참가한 전사들이 왁자지껄 떠들던 소리가 소녀의 한 줄기 목소리에 그대로 굳었다.

  “에, 어, 아, 네?”

  곧장 일사불란하게 제게로 꽂히는 시선을 느끼며 레이브리엘은 자기가 갖고 있던 5번 번호판을 내려놓아보였다. 디노가 벙찐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과 번호판을 번갈아보다가, 크흐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어, 음, 지시자, 그럼 지시자는 좋아하는 전사? 가 되는 건가, 맞지?”

  “뭐어…, 말 못할 것도 없으니까 할 수 있긴 한데요.”

  “…….”

 

  딱히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아가씨가 말할 그 ‘좋아하는 사람’인 즉, 곧……. 소녀에게 우당탕 거름없이 내리쏟아지다시피한 눈동자 열두엇이 이젠 한 전사에게로 향한다.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이데리하가, 뭐여, 하고 저를 요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전사들에게 물었다. 그러나 레이브리엘의 목소리가 그의 눈길마저 휘어잡았다.

 

  “잘생겼죠?”

  “…….”

 

  그뿐이면 좋으련만 구태여 그 당사자에게 눈길을 줄 필요까지 있었을까? 알코올 탓에 좀처럼 재빠르게 수습되지 않는 사고도 조금씩 이성이 윤활하기 시작하는 것인지 이데리하가 레이브리엘을 쳐다보며 눈을 느릿느릿 깜빡거렸다.

 

  “특히 입이랑 눈이 예쁘게 생겼어요. 고양이를 좋아하다보니 고양이를 닮아가는 걸까 싶을 때도 있었고, 입은…, 음, 식사할 때 자꾸 바라보게 돼요. 오물거리는 게 귀엽죠. 가끔 입에 막 딴 체리를 물려주고 싶을 때도 있어요.”

 

  아무도 그 당사자를 3인칭으로 언급한 적 없었지만 이데리하는 아가씨에서 자신으로, 자신에서 아가씨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전사들의 시선에서 곧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눈치챘다. 침대에 누워 물구나무에 혹사당한 팔을 가누던 레온이 그를 보며 킥킥 숨죽여 웃는 소리가 간질간질 다 들리었다. 어둑한 방에 달랑 하나 튼 노란 전등의 그림자들이 억지로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고 있다.

 

  “당연하지만 그것만 좋다는 건 아니에요. 탐색에 갈 때마다 싸우는 모습은 금방 어딘가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지만, 전투가 끝나면 가장 먼저 선봉에 서서 꼭 제 손을 잡아주거든요. 가끔 모의전투가 끝날 때 물을 건네면 받아서 마셔주고, 가끔 머리를 쓰다듬어줬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기분이 나쁘거나 좋지 않을 때는 말없이 끌어안아주기도 하니까. 가끔은 생각을 읽힌 것 같은 기분도 들어요.”

  “그거 정말 어떤 전사인지는 몰라도 굉장한걸.”

 

  꿈을 꾸듯 나른하게 말하는 것은 루드였다. 분명히 아가씨의 말을 받아 대답한 주제에 눈길은 벽에 박히듯 앉아있는 전사를 흘끔거리고 있다. 어딘지 서리가 감도는 눈빛. 느닷없이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하고 도게자하는 남자친구를 보는 시어머니의 눈이 무릇 저러한가? 아이자크와 디노는 그 분위기조차 눈치채지도 못하고 벌써부터 입을 모아 와 안아줬대, 사귀네, 등의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아 맞아, 전에 탐색을 갔을 때는 말이죠, 하고 술술 이야기를 풀어내는 레이브리엘의 이야기는 1년동안 말할 양을 오늘 다 해버리기로 작정한 모양인지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데리하는 앵두처럼 광대뼈 부근을 붉히며 후드를 더듬어 썼다.

by. @A760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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