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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데드

대릴 딕슨x 송 윤

*현대 AU

*약간의 욕설 주의

 

1.

 

  “지금... 지금 시간이 몇 시냐.”

 

  목소리 끝이 죽죽 늘어졌다. 릭은 술잔을 여전히 오른손에 든 채로 더듬더듬 시간을 물어보는 대릴을 재밌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옆에서는 글렌이 웃음을 감추느라 숨을 죽이고 힉힉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시간... 시간이 몇 시냐고. 너저분하게 굴러다니는 초록색 병들-대릴이 들고 왔던 문샤인을 두 잔 마셨다가 숙취로 이틀 내내 바닥을 기었던 글렌이 이를 악물고 한국에서부터 들여온 한국산 술병들을 하나하나 바르게 세우면서 타이리스가 글쎄, 열 한시 쯤 됐을까, 하고 친절하게 운을 뗐다. 대릴은 시벌겋게 달아오른 눈꺼풀을 손등으로 마구 문지르더니 비틀비틀 식탁을 짚었다. 옆에 앉아있던 아브라함이 워, 하는 소리를 내면서 대릴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두툼한 팔뚝이 허공을 휘저었다. 아, 이거 놔 봐. 글렌이 기어코 입술을 깨물어가며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꼬맹이.... 꼬맹이 데리러 가야돼. 걘... 걘 너무 예뻐서 누가 채 가니까, 어....”

  “어이쿠, 대릴!”

 

 

  제법 넓은 어깨가 기우뚱 한 구석으로 기울었다. 타이리스와 아브라함이 반쯤 몸을 일으켜 낚아채자 겨우 중심을 잡는 나이 든 사냥개를 닮은 얼굴에는 평소에는 찾아보기 힘든 몽롱함이 무해해 보이는 순한 무표정과 엉망진창으로 섞여 떠올라 있었다. 술이 세다고 소문난 대릴이 취한 모습을 한 번 보려 대릴의 술잔만 계속 채웠더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취해버린 모양이다. 릭은 식탁의 건너편으로 몸을 기울여 대릴의 어깨를 두드렸다. 윤은 매기네 집으로 무비 올나잇을 하러 갔잖아. 걱정은 그만 둬. 그러나 평소같았으면 릭의 눈빛만으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챘을 대릴은 여전히 대체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얼굴로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웅얼거렸다. 입술 사이로 꼬맹이, 시간, 늦어서, 밤, 같은 단어들이 토막나 바닥으로 뚝뚝 무겁게 떨어졌다. 바람 새는 소리에 가까운 단어들에 귀를 기울이던 타이리스가 사람 좋게 웃었다.

 

 

 

  “그렇게 좋은가, 옛날 대릴 딕슨 아는 사람들 다 뒤집어지겠군!”

  “어디가 그렇게 예쁘나? 올해로 1년 쯤 연애한 걸로 아는데, 아직도 그렇게 예쁜가보구만, 어?”

 

 

  아브라함이 콧수염에 달린 술방울들을 손등으로 꾹꾹 닦아내며 대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옆의 글렌이 야, 이거 윤한테 한 한 달 생활비 정도 받고 팔아도 안 놀랍겠다, 하며 나직하게 탄식했다. 릭은 타인의 무방비한 모습을 촬영해 파는 것은 법을 넘어서 도덕적으로도 문제라고 글렌에게 이야기해줄까 하다가(어쨌든 그는 보안관이었다!), 실상 그걸 팔아봤자 저 주변 사람들을 꿀로 파묻어 죽여버리려고 하는 커플의 애정전선에 도움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곤 조용히 침묵했다. 아브라함의 튼튼한 팔꿈치에 찔린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대릴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눈 밑이 술기운 때문에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뭐 당연한 걸 말하고 있어. 흐릿하게 비틀거리는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걔가 안 예쁘면 세상에 예쁜 여자가 어딨어, 당연한 걸 묻고 자빠졌냐... 아 저리 비켜, 나 꼬맹이 데리러 갈 거야.”

  “아니 글쎄, 그 꼬맹이 무비 올나잇한다니까. 매기랑 베스랑 같이 영화보고 있다고.”

 

 

   그러니까 앉아서 얘기나 좀 더 해봐, 윤이 그렇게 좋아? 짓궂다 싶을 정도로 올곧게 찔러오는 아브라함의 질문에 대릴은 눈을 굼뜨게 꿈벅였다. 보통 같았으면 굳이 그런 걸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을텐데, 아브라함도 제법 술이 돌아 사고의 필터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대릴은 꼭 물에 젖은 몸을 푸르르 떠는 사냥개처럼 고개를 털었다. 귓바퀴를 덮을 정도로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이 그 서슬에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꼬맹이는... 대릴은 윤을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드물었다. 꼬맹이, 꼬마, 계집애 같은 애칭 아닌 애칭들이 대릴이 윤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들이었다. 내 꼬맹이는. 꾹꾹 눌러 씹는 듯한 악센트가 끝에 따라붙었다. 타이리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젠 소유격도 붙는구만.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녀석이야.”

 

 

  세상에서 제일, 제일로 다정한 녀석. 주변이 온통 조용해졌다. 쑥스러운 것인지 시선이 부담스러운 것인지 대릴은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팔을 들어 목덜미를 벅벅 거칠게 긁어댔다. 당연히 예쁜 건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걔가 안 예쁘면 세상에 예쁜 여자가 어딨어? 긁던 목덜미며 귓가가 온통 울긋불긋 새빨갛게 물이 든 채로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예쁜 것도 예쁜 거지만, 그 녀석은 세상에서 제일 착해. 씨발, 이거 진짜 반칙 아니야? 그렇게 예쁜 애가, 세상에서 제일 다정하다고. 역시 처음 봤을 때 천사 같았던 건 진짜 천사여서 그런 걸지도 몰라.”

 

 

  아브라함이 고요한 가운데에 헛웃음을 치면서도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대릴 딕슨이 제 어린 연인에게 껌벅 죽어나간다는 것은 제법 알려진 이야기였지만 이렇게 남들에게 직접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자랑하겠다 나서는 것은 또 낯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그는 대부분, 내가 굳이 자랑하지 않아도 네가 직접 보면 알겠지, 같은 말로 윤에 대해 말해달라는 사람들의 질문을 넘어가고는 했다. 눈치 좋게 타이리스가 아직도 대릴이 손에 쥐고 있는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글렌이 탄식했다. 이 사람들 진짜 남의 연애담 못 들어서 억울해 죽은 귀신 붙었나 봐(물론 릭은 거기다 대고 네 핸드폰 녹음 어플이 아직도 번쩍이고 있다고 이야기 하려던 것을 참았다).

 

 

  “그래, 그럼 어디 그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아가씨 얘기나 들어보자. 얼마나 다정한데?”

  “그러니까, 이게 좀 복잡한데, 내가 걔랑 처음 만났을 때... 그러니까 그게... 거버너 일이 있고나서 한 반 년 쯤 뒤에...”

  “뭐? 뭐, 잠깐, 그 때 아니랬잖아?”

  “아, 산통 다 깨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보쇼!”

 

 

  아브라함이 냅다 호통을 쳤다. 걸걸한 목소리가 벽력같이 호통을 치자 괜히 어깨가 찔끔했다. ‘거버너 일’이라는 얘기가 들리자마자 글렌도 타이리스도 체면 다 잊고 귀부터 대릴에게 들이밀었다. 거버너의 갱단에게서 형을 잃고 약 두 해 정도 서를 떠나있었던 대릴은 그 시간 동안의 일을 하는 것을 질색했다. 좋은 것도 아닌데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느냐 미간부터 와작 소리가 나도록 구기고 봐 다들 입 안으로 말을 숨기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때의 이야기라니, 사람들 눈이 빛날만도 했다. 릭은 일단 조용히 입을 다물고 쭈그러 들기로 했다. 절대 아브라함이 모가지를 뽑을 것 같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대릴은 아브라함이 벽력같이 화를 낼 때 잠깐동안 정신이 든 듯 짧게 헛숨을 들이켰다가, 곧 다들 조용해지자 술기운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하고 고개를 꾸벅꾸벅 떨궜다가 푸르르 털기를 반복했다. 그 서슬에 술잔에 따라놓은 술이 손가락을 적셨다. 그 때 난 열심히 길바닥에서 구르고 있었는데. 발음이 자꾸 꼬이기 시작하자 그는 얼굴을 확 구겼다가 곰살궂게 술잔을 비우라고 부추기는 타이리스의 말에 비실비실 술잔을 들어 목구멍 안 쪽으로 털어넣었다. 훅 내뱉는 숨결에서 알콜 냄새가 훅 풍겼다.

 

  “그 때 꼬맹이는 카페에서, 스콧... 그러니까 밀러 영감님네 카페에서 일할 때였는데, 길 가다가 왠 쓰레기 새끼한테 붙들려서, 아니 그 때 그 새끼 손목 말고 모가지를 분질렀어야-”

  “오케이! 오케이, 알겠으니까 거기까지만!”

 

 

   이 카운티 진짜 괜찮은거야? 글렌이 기겁을 하며 손을 휘저었다. 릭은 아주 조용하게 카운티의 안위를 걱정하는 글렌에게서 눈동자를 돌렸다. 타이리스가 다시 대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그래서, 윤이 붙들렸는데? 하고 끊긴 말을 끌어왔다. 대릴은 목이 타는 것처럼 큼, 하고 숨을 골랐다가, 한쪽 손을 허공에 흔들었다.

 

 

  “아무튼 나는 그 때 마켓에서 술을 사서-그 때는 만 날이고 천 날이고 술에 술을 처먹었으니까-알콜에 쩔어서 길을 걷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봤단 말이지. 평소 같았으면... 그러니까, 알잖아, 난 술을 마시면 개새끼가 되고 그 땐 진짜 머리 끝까지 술에 취해서, 그러니까 뭐가 됐던 간에 모르는 척 하고 가버릴 수 있는 쓰레기 새끼가 되어버릴 정도로 취해있었다고. 그런데 그 날 왠지...”

 

 

  술잔을 틀어쥔 손이 쑥 앞으로 내밀어졌다. 아브라함이 눈치 좋게 술병을 기울여서 대릴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글렌이 두 박스를 들여온 술병은 이제 거진 3분의 2가 빈 병이었다. 그리고 그 중 대부분이 대릴이 마신 것이었고 말이다. 대릴은 목까지 쭉 뒤로 젖혀 술잔에 고인 술을 탈탈 털고 나서야 고개를 느릿하게 내렸다. 핏줄이 선 것처럼 붉게 달아오른 눈동자가 제게로 고개를 들이민 장정 여럿을 보며 즐겁게 휘었다. 왠지... 하고 웅얼웅얼 반복하는 소리에 타이리스가 Hey, 그만 하고 쭉 얘기해봐!하고 대릴의 등을 팡 소리가 나도록 두드렸다. 평소 같았으면 누구 죽일 생각인가보다 하고 빈정거렸을 대릴은 낄낄 웃으며 다시 한 번 손목을 허공에 휘둘렀다. 무해한 소년 같은 웃음소리가 식탁 주변을 담배연기처럼 빙 둘러 맴돌았다.

 

 

  “왠지 모르게 절대 그러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단 말이야, 물론 씨발 당연히 안돼는 일이었고 그 다음부턴 아무리 술에 취해도 그런 생각은 안 들지만... 아무튼 그래서 그 때 꼬맹이 손목을 틀어잡고 있던 새끼를 끌어냈는데, 이 새끼가 나한테 다짜고짜 주먹부터 들이대길래 같이 바닥 좀 굴렀지. 몇 번 후려갈기니까 도망가긴 했는데 나도 발목이 삐어서-웃지마라, 애송아, 너도 한 번 반 년동안 술독에 빠져있어보면 그게 어떤 느낌인 줄 알 걸.”

 

 

  실실 웃으며 듣고 있던 글렌은 제가 뭘 어쨌냐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릭은 등 뒤에서 다른 술병의 뚜껑을 돌리고 있던 글렌의 손등을 툭 쳤다. 그만 먹여, 저러다 우리집 바닥에서 토한다. 당장 여동생의 대부가 엉망이 된 바닥에 구르고 있는 모습을 볼 칼을 떠올린 글렌이 얌전하게 반 쯤 뚜껑을 딴 소주병을 내려놓았다. 성장기 청소년에게는 너무 과한 광경이긴 했다.

 

 

  “아무튼 그래서... 걷질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단 말이야. 그 때 하필 겨울이라 바닥은 차갑지, 술에 취해 있었다가 드잡이질 한 거라 뼈마디는 쑤시지, 난 그 때 잘 몰랐는데 이마도 긁혀서 피가 나고 있고... 그런데 말이야, 난 내가 그 새끼랑 드잡이 하고 있을 때 고 쪼그만 계집애가 도망갔을 줄 알았거든. 누가 안 그러겠어? 난 그 때 지금보다 더 덥수룩하고, 약에 취한 것 같은 외모에, 그리고 사실 안 취해도 그렇게 좋은 인상은 아니잖아. 그런데 그런 새끼가 갑자기 나타나서 눈 앞에서 싸움박질을 하는데 누가 도망을 안 가겠어? 당연히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겠지. 그게 아니면 경찰서로 가거나. 그런데... 그런데 그 계집애는, 꼬맹이는, 내 꼬마는.”

 

 

  눈 앞에 있더라고,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대릴이 비죽비죽 웃었다. 행복해보이는 얼굴이었다. 그와 제법 오래 알고 지낸 그 곳의 모든 이들도 잘 본 적이 없는 얼굴로. 멍하게 그 얼굴을 보고있던 릭은 뭐해, 목 탄다고! 하고 술잔을 흔드는 대릴의 술잔에 엉겁결에 바닥이 찰랑이는 술병의 술을 죄 따라주었다. 입술 끝이 하늘을 향해 한껏 휘도록 웃은 대릴이 다시 한 번 쭉 술을 들이켰다. 귓가는 더 울긋불긋해지고 혀 끝은 무뎌지는데 대릴의 표정만큼은 가장 행복해 보여 괜히 저마저 간지러워지는 기분이라고 릭은 생각했다.

 

 

  “걔가 그러는 거야. 어떻게 하지, 이마에서 피가 나네요, 하고. 씨발, 무슨 목소리가 그렇게... 그렇게 예쁜지. 머리는 멍하고 눈 앞은 흐릿한데 꼬맹이 얼굴만 환하게 보이는 거야. 그건 그 녀석이 나한테 몸을 기울여서 그런 거긴 하지만. 어쨌든 꼬맹이가 내 얼굴을 이리저리 보다가, 제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상처가 난 곳에다가 눌러주길래, 내가 그랬지. 안 무섭냐? 내가 홈리스에 알콜 중독자라서, 아니면 정키라서, 그 가방 다 채서 도망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아니면 내가 너한테 해꼬지라도 하면? 그럼 어떻게 하려고 하는데? 그랬더니 윤이, 어...”

  “아이고, 이 작자 진짜 큰일났네, 누가 물 좀 가져와 봐!”

  “아니야, 아니야... 마저 들으라고, 이게 포인트니까. 그 세상에서 제일 착한 계집애가, 나한테...”

 

 

  혼자 얘기하다가 몸을 못 가누고 뒤로 휘청 넘어갈 뻔한 대릴을 잡아챈 아브라함의 뒤로 타이리스가 다급하게 냉장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정작 대릴은 벌겋게 단 얼굴로 히죽이죽 웃었다. 들어봐, 들어보라니까! 하는 목소리에 맞춰 손목이 마구잡이로 휘둘러졌다.

 

 

  “나한테 그러더라고. 그런 사람이던 아니던 간에, 누군가를 구해줄 수 있다는 건 사실 정말 상냥한 사람이라는 게 아닐까요, 라고... 처음 보는 사람한테, 다들 겉만 보고 도망치는 행색의 사람한테... 사실은 모른 척 하고 가려고, 생각한 사람한테, 그렇게 꽃처럼 웃으면서.”

 

 

  그렇게 다정하게. 숨이 짤막하게 끊겼다. 숨 끝으로 따라붙는 웃음이 어린 애처럼 순진했다. 릭은 무심코 그런 대릴의 웃음을 따라 웃으며 머릿속으로 그 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벽에 기댄 허름한 차림의 대릴과, 그런 대릴의 상처를 닦아내며 다정하게 웃었을 윤을.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하고 무너질 뻔한 사람의 손을 잡아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소녀의 모습을. 웃고 있는 대릴의 얼굴은 세상 다시 없을 정도로 행복해보였다. 다정하지, 세상에서 제일 다정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중얼거리는 말 끝에서 꿀처럼 황금빛으로 방울진 애정이 뚝뚝 떨어졌다. 아브라함이 대릴의 등을 툭툭 사람 좋게 두드리며 웃었다. 다정하다고 자랑할 만 한데? 그러자 새빨간 얼굴로 대릴이 웃었다.

 

 

  “당연한 거 아니냐고... 그렇게 좋은 녀석이 내 꼬맹이라는 게 믿을 수가 없.... 어.... 잠깐 전등이... 왜.... 둘.... 아니 네... ㅅ-”

  “대릴!”

 

 

 

2.

 

 

 

 

  “세상에, 사람한테 이렇게 술을 먹이면 어떻게 해요...!”

 

 

  평균 나이 서른은 먹었을 장정들이 머쓱하게 뒷목을 긁적이는 것을 보며 윤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했다. 글렌이 문샤인 그만 마시라고 지가 술 가져왔단다, 조금만 마시고 올 테니까 매기한테라도 가 있어, 하고 나간 게 고작해야 너댓 시간 쯤 전이었는데 대릴은 거의 술독에 빠졌다가 올라온 사람처럼 술냄새를 지독하게 풍기고 있었다. 숨결에서 흐르는 독한 알콜의 향기에 그녀는 식탁과 바닥을 구르고 있는 수 많은 초록색 술병들을 바라보았다. 대릴은 차치하고서라도 다른 사람들도 내일 위장이 뒤집어질 터다.

 

 

  “릭이랑 다른 사람들 속은 괜찮아요? 어휴, 아저씨 몸에서 술냄새 나는 것 좀 봐, 내일 속 다 버리겠네...”

  “그, 미안, 윤. 대릴이 취한 모습을 워낙 못 보다 보니 다들 재미가 들려서...”

  “틴에이져들도 아니고 정말... 아저씨이, 정신 좀 차려봐요, 응? 나는 알아보겠어요?”

 

 

목덜미 안 쪽에서 웅얼웅얼, 꼬맹아,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될만큼 꼬인 발음에 윤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내일이 쉬는 날이라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당장 내일 병가를 냈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것도 숙취로. 입술 끝이 자꾸 목덜미에서 움직이며 버석거렸다. 제 덩치에 두 배는 될 법한 대릴이 자꾸 엉겨붙어 뒤로 주춤주춤 밀리는 윤이 안쓰러웠는지 아브라함과 타이리스가 대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릭이 미안하다는 얼굴로 윤의 등을 토닥였다.

 

 

  “취한 사람 데리고 가는 건 힘드니까,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어제 손님 방 치워놔서 깨끗할거야.”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오늘만 신세질게요, 릭.”

 

 

  그러니까 아저씨도 이제 일어나요, 하고 속삭이는데도 대릴은 요지부동이었다. 윤은 타이리스며 아브라함이 어깨를 잡아끌어도 귀찮다는 듯 어깨를 털어 떨쳐내곤 제게로 더 안겨드는 대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평소에 어리광 좀 부려달라고 할 때는 모르는 척 하더니 술에 취하고 나서야 이렇게 응석을 부렸다. 아저씨, 하고 부르며 제 어깨에 뺨을 부비던 대릴의 얼굴 상태라도 보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그녀는 술냄새가 가득 담긴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깨닫고 귀를 기울였다. 끝이 엉망진창으로 휘어진 취한 목소리가 귓가에 물소리를 내며 찰랑거렸다. 내 꼬맹이... 하고 속삭거리는 소리가 달았다. 내...

 

 

  “세상에서 제일.... 제일 다정한.... 내 꼬맹이....”

  “에, 푸, 크흡...”

 

 

  목이 저도 모르게 구부려졌다. 윤은 잇새 사이로 간신히 웃음을 깨물며 몸을 떨었다. 콧등이며 광대뼈며 온통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린애처럼 웅얼거리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목덜미 안 쪽에서 휘청거리는 목소리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정한 계집애, 내 다정한 꼬마, 하고 중얼거렸다. 후드득 떨어지는 웃음으로 그녀는 대릴의 등을 한가득 끌어안았다. 목 안쪽을 울려 큭큭 짤막하게 웃음 소리를 내는 그녀를 향해 릭과 다른 사람들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지만 도저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따끈하게 열이 오른 관자놀이에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며 윤은 아직도 웅얼웅얼 입술을 달싹이는 대릴을 향해 나직하게 속삭였다. 정말, 귀여워서 오늘만 봐 주는 거에요.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건 아저씨면서.”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쇄골 쪽에 폭 파묻힌 입술이 숨을 뱉으며 웃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줄 아는, 사실은 본인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남자의 귓가에 입술을 누르면서, 윤은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by. @thdekdus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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