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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밖에서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불을 켜지 않은 방은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저녁처럼 어두웠다. 고요한 집안 곳곳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마치 깊은 물속에 잠겨 있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소년은 여인에게 물었다. 내 모든 것이었지. 여인은 뜨개질거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그러나 소년이 바라는 대답은 그것이 아니었다.

 

   항상 해 주셨던 말씀이잖아요.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요.

 

   그보다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니? 삶의 모든 것이라는 말은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란다.

 

  여인은 조용히 소년을 나무랐다. 하지만 소년은 고집스럽게 여인의 앞에 서서 발로 바닥을 톡톡 두드릴 뿐이었다. 굳이 올려다보지 않아도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그 행동에 여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고 소년을 응시했다. 의미 모를 미소가 어려 있는 그 얼굴은, 하지만 사실은 소년이 아닌 어딘지 모를 먼 곳을 관조하는 듯했다.

 

   긴 이야기가 될 거야. 그래도 괜찮겠니?

 

   바라는 바예요.

 

   그렇다면 여기 앉아서 들으렴. 다리가 아플 테니까 말이다.

 

  그를 만나기 전 나는 마법사였단다. 온 오시리아 대륙에 내 이름이 자자했지. 물론 고향이었던 헤네시스를 비롯한 빅토리아 아일랜드에서도 오랜만에 영웅 못지않은 모험가가 나왔다며 떠들썩했어. 믿을 수 있겠니? 아니,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란다. 그건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니니까. 아무튼 나는 강력하고 유능한 마법사였기 때문에 메이플 연합에서도 꽤나 중요한 위치에 있었어. 물론 그만큼 유명한 모험가가 나 혼자인 건 아니었지만 말이야. 그래서 여러 가지 위험한 임무에 동원되곤 했지. 아마 연합에서는 내가 유능하긴 하지만 꼭 대체 불가능한 인재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실험적인 임무에까지 투입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래,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상한 일이었어.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차원의 문에 그렇게 많은 모험가들을 한꺼번에 들여보내다니. 하지만 나는 그때도 그 이후도, 그리고 지금도 그 일을 원망하지는 않는단다. 왜냐하면 너도 예상하겠지만, 바로 거기서 그를 만났거든.

 

  그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대번에 알아차렸단다. 이 남자를 나는 사랑하게 될 거라고. 그것은 곧 사실로 드러났어. 그가 날 발견하고 칼을 휘둘렀을 때 나는 이미 사랑에 빠져 있었으니까. 지금도 그때 일이 생생하지 뭐니. 상상해 보렴. 엄청나게 무거운 여닫이문을 겨우 밀어 열고 들어가자 보이는 옥좌와, 거기 앉아서 나와 눈을 마주치는 그를. 왜, 이상하니? 어째서 내가 사랑에 빠졌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구나. 그래,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사실 나도 잘 모른단다. 내가 어떻게 해서 그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혹자는 그의 빼어난 외모 때문이 아니었냐고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어. 그는 분명 누구나 인정할만한 미남이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명의 위기에 처한 어린 소녀가 사랑에 빠지는 것이 과연 있을 법한 일일까? 내가 그 주인공이면서도 동의하기 어렵더구나.

 

  얼마나 잘생겼었냐고? 그건 좋은 질문이야. 나는 내 얼굴보다도 외려 그의 얼굴이 익숙하거든. 언제든지 얼마든지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지. 그는 잿빛 피부에 노란 눈을 가지고 있었단다. 두 눈이 마치 동그란 호박 같았어. 호박 안에 으레 고대의 벌레가 갇혀 있는 것처럼 그의 홍채 안쪽에도 까만 동공이 콕 박혀 있었으니까. 아니, 마족과는 달랐어. 마족들은 파르스름한 피부에 붉은 눈을 하고 있지 않던? 너도 이제 어엿한 한 사람의 모험가니 그 정도 구분은 할 줄 알아야지. 하여튼 그 이질적인 색깔들은 그가 나와 다른 종족임을 알리는 증거로서, 볼 때마다 소름이 오소소 돋는 한편 무척이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이라도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을 수 있었어. 물론 그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주지 않았지만 말이야. 헌데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의 매력이 그것뿐이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란다. 눈이나 피부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지. 그는 동족들 사이에서도 대단한 미남으로 통했는데, 그것은 뿔과 꼬리 덕택이었다고 하더구나. 아무래도 너는 그를 본 적이 없으니 무슨 뜻인지 금세 납득하기는 어렵겠지만, 길고 날카로우며 적당한 굵기에 날렵하게 휘어진 그 뿔은, 본래라면 그 종족의 미의식을 이해하지 못해야 마땅한 내게조차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 그리고 꼬리는 본래 그 종족의 힘의 근원이어서 남성미의 상징 같은 거라더군. 그는 위로 쭉 뻗으면 거의 상체 전체를 가릴 정도로 길고 우람한 꼬리를 가지고 있어서 같은 남자들 사이에서도 선망의 대상이었다더구나. 게다가 활짝 펴면 순식간에 양지에 그늘을 드리울 정도로 커다란 날개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보고 있는 상대방을 압도했지. 그 위에 전투 시에만 나타나는 문양이 또 그렇게 아름다웠단다. 적을 섬멸하고 난 어느 날 석양이 따갑게 우리를 비췄을 때, 그의 뿔과 날개에 새겨진 문양이 빛을 받아 반짝이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구나. 그리고 그때 그의 도드라진 광대뼈 아래에 생겨나던 우아한 그림자까지도.

 

  허나 그는 적이 많았어. 그게 내가 그를 토벌하러 가야 했던 이유였지. 이쪽과 저쪽, 양 방향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으니 어떻게 적이 없을 수가 있었겠니. 너는 아마 내게서 그가 그리 나쁜 인간만은 아니었다는 얘기를 듣고 싶었을 테지만,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렇게는 말할 수 없단다. 그는 악인이 맞으니까. 얼마나 악인이었냐고 묻는다면, 어찌 그걸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네가 듣기를 원하니 이야기는 해 보겠다. 먼저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겠구나. 물론 나도 그의 소꿉친구가 아니었고 그는 자기의 과거에 대해 유난히 말을 아끼는 성미였어서 온전히 전부 알지는 못해. 하지만 그래도 가끔씩 들은 바가 있으니 이야기를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전투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더군. 탁월한 실력이었다지.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점점 비뚤어져 가던 그는 검술을 배우고 나서부터는 한결 정서적으로 안정되었다고 했었어. 어쩌면 천덕꾸러기였던 그에게 자기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와 친했던 어떤 소년이 종족의 수호자로 각성한 뒤 갑자기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전사가 되어 버리지 않았겠니. 그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 더군다나 그 소년의 재능은 문자 그대로 부족 전체의 힘이 대대로 내려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개인이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단다. 그때부터 그는 나날이 포악해져 갔다더구나. 정말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성인이 된 후에는 그 소년―이제는 청년이라고 해야겠지―과 동등한 실력을 갖추게 된 것이었지. 검술뿐만이 아니라 체술에 병법까지 안 배워 본 것이 없었다고. 해서 그는 완벽한 전사가 되었어. 다들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때까지는. 하지만 내가 그를 악인이라고 했으니 너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겠지. 그의 삶이 어떤 길을 걸어갔을지.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도 오냐오냐 했단다. 그도 그럴 것이 불우하게 살아오지 않았니. 그의 성정의 얼마만큼이 타고난 것이고 얼마만큼이 환경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친척집을 전전하며 눈에 띄게 난폭해져 가던 그를 돌보지 못했던 죄책감이 있었겠지. 그리고 독보적인 일인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시 최고의 전사라고 불리게 되었으니 점차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을 테고. 허나 어느 날 그가 부족의 청년을 몇 명이나 한꺼번에 때려죽이자 더 이상은 묵과할 수 없었던 거야. 그는 그렇게 평의회에 회부되어 다시는 모국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추방당했단다. 아, 그가 왜 살인을 했냐고? 죽은 청년들이 마침 그가 검을 차고 있지 않은 걸 보고 내기를 걸었다더구나. 그 종족은 상대를 죽이면 죽은 상대의 힘의 근원을 어느 정도 빼앗아 올 수 있는데, 그에게 검 없이 자기들 전부와 싸워서 이기면 자기들의 힘의 근원을 주겠다고 했다나. 아마 그가 덤비지 못할 거라고 믿고 건 장난이었겠지. 아니면 숫자로 밀어붙일 수 있다고 생각했거나. 어느 쪽이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는 것만은 틀림없었어. 그는 힘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해낼 수 있었으니까.

 

  당연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야. 그의 인생 여정은 아직 뒤가 남아있어. 생각해보렴. 열등감을 껴안은 채 추방된 그가 압도적인 힘을 얻기 위해 어떻게 했을지. 하긴 평화로운 세상에서 태어난 네게는 무리일까. 그가 젊었을 적에는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불온한 무리들이 드물지 않았단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그에게 힘을 줄 만한 이를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던 모양이야. 추방당했던 그가 지친 모습으로 다시 그의 나라에 돌아오기까지는 불과 몇 년밖에 걸리지 않았거든. 이제 대강 그림이 그려지니? 반성한 척 부족의 어른들을 구워삶아 추방령을 물리고 수도에 입성한 뒤, 그와 손잡은 어떤 자와 함께 도시를 박살을 내 버린 거야. 그자는 그쪽 세계의 초월자였다고 해. 나도 본 적은 없지만 사실이겠지. 그가 원하는 대로 어마어마한 힘을 주었을 정도니까. 수호자는 뭘 했냐고? 그야 그와 싸웠지. 하지만 그 전에 이미 그의 함정에 당한 상태여서 동등하게 겨룰 수 없었고, 심지어 그를 막기 위해 자폭을 해야 했단다. 물론 그는 성공적으로 도시를 점령했으니 실패로 돌아간 셈이야. 허나 그 역시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결국 우리 세계로 넘어와 생명을 연장할 수단을 찾아야 했지. 우리네 세계에도 세상을 멸하고자 하는 이가 있었던 것이 그에게는 행운이었어. 우리 입장에서는 악몽이었지만 말이야. 검은 마법사라고 너도 역사책에서 배운 적이 있겠지. 그는 그 사람 밑으로 들어갔어. 충성했냐고? 전혀. 그의 명령에 따라 착실히 메이플 월드 사람들을 학살하긴 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전투가 있던 날 동료의 뒤를 쳐 생명의 정수를 강탈하고는 그대로 그쪽 세계로 돌아갔다더구나. 그러고는 다시 그가 점거한 수도로 돌아가 거기서 쭉 왕 노릇을 했고 말이야. 내가 그를 만난 것은 그러니까 말하자면 모든 일이 끝난 뒤라고 할 수 있지.

 

  황당하니? 이런 남자를 사랑했다는 게.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인간 말종이니 그럴 수밖에. 내가 그의 그런 성품까지 사랑했던 건 맞아. 하지만 믿어 주렴. 그는 나에게만은 상냥했어. 물론 그가 나까지 배신했대도 나는 계속 그를 사랑했겠지만, 뜻밖에도 그는 나를 아껴 줬단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그의 곁을 떠날 수가 있었겠니. 웃어도 좋아. 바보 같다고 해도 좋아.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그를 감쌀 테지. 그런 나를 사람들은 소리 높여 비난할 테고. 그래도 나는 그가 내게만은 진솔한 사람이었다고 믿을 거란다. 온 세상이 나와 그를 배척한다고 해도 말이야.

 

  사람들은 내가 그에게 속았거나 세뇌당했다고 생각하더구나. 그가 나를 이용했다고 믿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야. 왜냐하면 내 인생에서 그만큼 날 이용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니까. 누워서 침 뱉기지 뭐니.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야말로 날 자기들 좋을 대로 이용했으니 말이다. 물론, 그래, 그들에게는 명분이 있었지. 세계가 멸망하지 않도록 막는 데에 힘을 보태라는. 나도 처음에는 동의했단다. 그러나 내가 구하고 싶었던 것은 내 스스로가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었지, 내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 따위가 아니었어. 그럼 왜 목숨 걸고 검은 마법사와 대적했냐고? 어차피 검은 마법사가 세계를 정복하면 모두 죽을 텐데 싸우다 죽으나 그때 가서 죽으나 뭐가 다르겠니. 나는 그저 죽을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고 싶었을 뿐이야. 간부진을 제외한 대부분의 연합원들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세상에 고결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다들 대놓고 말은 안 해도 비슷한 공감대가 있었다고 나는 믿는단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그렇게 위험한 임무에 자원하는 인력이 적었겠니. 난 비교적 스스로 나설 때가 많은 편이었으니 적어도 그중에서 불성실한 편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놀랍게도 나는 임무를 팽개친 채 적 편에 붙은 미친 여자가 되어 있더구나. 내가 그를 죽일 마음이 없었던 것은 맞아. 정말 그랬지.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악행에 협력한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허나 정말로 억울한 것은 그게 아니었단다. 단 한 번도 나를 자기 이기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한 적 없는 그가, 순진한 처녀를 꼬여내 꼭두각시로 만들었다는 말도 안 되는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이 너무나 슬프고 화가 났어. 마치 뱃속에서 불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여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평온하던 표정이 아주 조금, 무너져 있었다. 소년은 여인을 찌르듯이 바라보았다.

 

   너도 날 비난하려고 그러니? 마음대로 하려무나. 이제 와서 누구에게 미움받든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내 대답이 네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틀린 말이 되지는 않는단다.

 

   그에게 이용당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하죠?

 

   나를 그렇게 쏘아보면서 생각한 게 고작 그거니? 여인은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똑같구나, 그 사람들이랑.

 

   그렇다면 말씀해 주시면 되잖아요. 왜 제가 틀렸는지.

 

   그건 옳은 이야기구나. 그러면 조금만 더 들어주렴. 내 이야기를.

 

   아까 전 그가 내게는 상냥했다고 말했었지.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단다. 그는 나에게 욕설을 퍼부은 적도 있었고 나를 때린 적도 있었어. 네 표정이 지금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이유를 나도 알긴 안다만 조금만 더 기다려 보렴.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알고 난 다음에 화를 내도 늦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 분명 그가 나한테 한 짓들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어. 허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지 않겠니. 그는 악인이고 기회주의자였어. 그리고 그런 그에게 맹목적으로 애정을 바치는 여자가 나타났어.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자기에게 이로울까? 이제 내가 하려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니?

 

   맞아. 그는 내게 친절하게 대해 줄 수 있었어. 또한 그걸 바탕으로 날 속여서 자기 마음대로 끌고 다닐 수도 있었지. 만약 그가 내게 정답게 대해 주면서 사랑을 속삭였다면, 나는 그가 부탁하는 모든 걸 들어 주었을 게다. 그것이 설령 이 세계 전체를 배신하는 길일지라도. 그리고 마침내는 사용 가치가 없어졌을 때 처참하게 버려졌겠지. 어쩌면 영혼까지 빼앗겼을지도 몰라. 가엾은 그의 부하들처럼 말이야.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어. 대신 날 끊임없이 밀어내고, 닦아세우고, 상처를 주려 애를 썼지.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그가 나를 아프게 하려고 일부러 내뱉은 말들이 나를 진실로 상처 입혔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구나. 그가 하는 말들 하나하나가 그저 귀여웠을 뿐. 그가 날 때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마법사였다고 먼저 말했었지. 그러니 단순히 날 때리고 걷어차는 정도로는 간지럽지도 않은 것이 당연하지 않겠니. 온몸에 방어구와 방어 마법을 두르고 있는데 말이다. 그도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 놓고 때릴 수 있었던 거고. 그렇기에 나는 그의 폭력이 언뜻 보이는 것만큼 나쁜 짓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단다. 오히려 더 좋았지. 그가 아주 가끔씩 그 나름의 방법으로 서툰 호의를 드러냈을 때 의심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건 정말이지 너무나 사랑스러웠거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의 곁에 있는 동안 아픔이 없었다는 건 아니란다. 그는 내가 어떻게 해도 떠나지 않으니, 정말로 아무렇게나 방치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적어도 그때의 난 그렇게 믿었지. 내가 원했던 것은 그의 사랑이었어. 사랑에 빠진 인간이 가장 염원하는 것이지. 그러나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그에게서 그런 감정을 기대하다니, 누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잘 알고 있었고말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힘들었지. 사랑하면서 사랑을 바랄 수 없다는 쓰라린 슬픔이 말이야. 어떨 때에는 희망이 가장 강력한 고문이라는 말마따나, 어쩌면 그에게서 아주 약간이라도 호의를 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는지도 모르겠구나. 얼마나 괴로웠냐고? 그 질문에 차마 대답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면 답이 될까? 그리고 바로 그 괴로움이, 내 길지 않은 인생 속에서 가장 바보 같았던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지.

 

   그와 한동안 만나지 못하던 중의 어느 날, 나는 항상 그와 만나던 방에 있는 테이블 위에 이별 편지를 올려놓고 와 버렸단다. 이쯤이면 괜찮을 것 같았거든. 이렇게 오래 만나지 않고도 어떻게든 일상을 살아냈으니, 다시는 만나지 못해도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거야.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너무도 큰 착각이어서 웃음만 나오는구나. 내 사랑을 나조차도 과소평가했던 게지. 떠나온 다음에야 처절한 깨달음이 나를 덮쳐오지 않겠니. 똑같이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재회의 희망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일을 저지른 다음에야 비로소 지각하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었어. 심지어 그 선택을 되돌릴 용기마저 없는 주제에 말이야. 얼마나 많은 밤을 울며 지새웠는지 모른다. 그립고 그리워서 심장이 찢기우는 것만 같더구나. 몇 번을 차원의 문 앞까지 갔다가 도로 되돌아오고 말았어. 그러나 덜덜 떨면서도 마침내 나는 그의 성채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보고 싶어서가 아니겠니. 허나 문 앞까지 가서도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더구나. 차마 문을 두드리지도, 그렇다고 자리를 뜨지도 못하던 날 안아서 응접실까지 데리고 들어온 것은, 맞아,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어.

 

   그 뒤로 그의 태도도 조금은 달라졌냐고? 아니, 조금도. 그는 여전히 괴팍했고 몹시 난폭했단다. 그러나 나는 도리어 그 점에 안심할 수 있었지. 그런 내 마음을 알 수 있겠니? 그는 변함없이 무례했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내가 아는 너고 네가 아는 나라는 듯. 내가 항상 이 자리에 있을 테니 너는 언제고 돌아와도 된다. 그는 그렇게 말해 준 거야.

 

  ―어느새 거세진 빗줄기가 더욱 세차게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여인의 무릎에도 눈물이 방울져 내렸다.

 

   그와 처음으로 밤을 새우던 날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아니?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럽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도란도란 나누던 이야기는 끊어지지 않았단다. 그날 그는 처음으로 내게 좋아한다고 털어놓았어.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그런 의미이길 나 역시 바랐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때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단언할 수 있어. 다만 자기 옆에 있어도 좋다고 공식적으로 허락을 받았을 따름이지. 너무 소소해서 허탈하니? 하지만 그의 안에서 긍정적인 감정을 이끌어냈다는 것이 중요한 거야. 그런 인간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 조금쯤은 자랑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날더러 예쁘다고 말해 준 이도 그가 유일했지.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친구가 없었단다. 다만 미움받는 이유가 확실히 존재하는 지금과는 다르게, 그저 사교성이 부족해서였을 뿐이었다는 게 차이점이랄까. 사람들과 대화하는 법도 몰랐고 나를 화려하게 꾸밀 줄도 몰랐거든. 네게는 말한 적이 없지만 내게는 언니가 한 명 있단다. 흐르는 꿀 같은 허니 블론드에, 나처럼 모자라지 않고 완전한 푸른 눈에, 희고 고운 피부와 장밋빛 뺨을 가진 찬란한 여성이었어. 내가 바라고, 되고 싶은 여자의 모습은 바로 언니였다. 나도 그런 외모를 가지게 된다면 언니처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지.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지 않니. 외모가 문제가 아닌 것을. 그러나 당시의 난 나 자신이 너무도 싫어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었던 거야. 그렇게 이해해 주렴. 헌데 그는 내 검고 긴 머리카락이, 기이한 눈동자가 맘에 든다고 말해 줬어. 처음이었단다,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해 준 사람은.

 

   필경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였던 거야. 그 누구도 내게 그의 대신이 될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그의 곁에서 내가 떠나간대도 나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 그가 날 바라보는 눈빛, 걱정하는 몸짓, 가끔씩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말이야. 나는 그로부터 꾸밈없는 선의를 느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 나도 그렇단다. 하지만 그게 진실이니 별 수 없지 않겠니. 그가 온 세상을 상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은 맞아. 일신의 영광을 위해 동족을 아무렇지도 않게 배신했지. 그뿐인가.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을 살육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비열한 수로 부하를 늘렸어. 그만큼 악독한 이도 역사상 드물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허나 내게는 아니었어. 감추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문득 문득 드러내고 마는 그의 사랑이 얼마나 따스하고 선량했는지, 나 아닌 다른 인간들은 평생 알지 못할 게다.

 

   사랑, 그래, 계속해서 내게 선을 긋던 그의 감정이 언제부터 사랑으로 변했는지 너도 궁금하겠지. 그런데 이것만은 대답하기 어렵구나. 왜냐면 경계가 확실하지 않거든. 처음 만나자마자 사랑을 깨달은 나와는 달리 그의 안에서는 서서히 사랑이 피어났으니까 말이다. 아마 본인이 여기 있대도 시원스럽게 답해 줄 수 없을 테지. 그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생전 겪어 본 적 없는 느낌이잖니. 그러나 그렇게 난해하면서도 어찌 보면 직관적인 것이 사랑이어서, 그는 내가 언제나 논하고 있던 사랑을 조금씩 이해해 갔단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도 어렴풋이 깨달았지. 고백은 하지 못해도 그는 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한번 떠나갔다 돌아온 이후로 우리는 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게 되었어. 당연한 일일까? 그는 내 마음이 깊은 만큼 슬픔도 크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가 표현은 서툴러도 날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알았지. 그 뒤로 큰 갈등은 그다지 없었던 것 같구나. 우린 행복했어. 응, 그랬지. 너무도 행복해서, 앞으로 나쁜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었지. 적어도 나는 그랬단다. 그게 잘못이었던 걸까.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않더구나.

 

   하기는 벌써 오래 전부터 불행은 예고되어 있었는지도 몰라. 처음부터 말이지. 내가 세계를 지켜야 한다는 임무를 띠고 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왜냐하면 내가 세계를 팽개치고 그를 선택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세계의 적이잖니. 나를 제외한 모두가 그를 미워하는걸. 분명 그도 알고 있었던 거야. 언젠가의 자기의 운명을.

 

   그는 입버릇처럼 자기는 꼭 살아남아서 내가 최강임을 증명하겠다고 말하곤 했지. 절대 쉽게 죽어 주지는 않겠다고. 이미 본인의 최후를 상상하고 있었던 거야, 그는. 나도 물론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기 싫었단다. 그가 없는 미래 따위 헤아리고 싶지 않았어. 그는 계속해서 나를 밀어내려 했지. 네 갈 길을 가라고, 날 사랑하지 말라고. 그려 볼 수 있겠니? 죽음을 목전에 뒀을 때 마지막으로 떠올릴 여자에게 자길 떠나라고 말하는 그의 마음을. 하지만 나는 모르는 척했어. 그냥 그대로 그의 곁에 있으면서 행복을 믿고 싶었다. 비록 헛된 기만이었을지라도.

 

   여기까지 이야기했으니 이제는 그 이후로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너도 역사책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지. 내가 학교를 괜히 보낸 것이 아니니. 연합은 승리했고, 검은 마법사와 다르모어는 패배했다. 그는 전사했고, 나는 재판에 회부되었어. 조금 전에도 잠깐 언급했듯이 나에 대해 많은 논쟁이 오갔단다. 여론이 최악으로 치달았을 무렵에는 사형까지도 고려되었지. 끝에는 그간 내가 세운 공적이 인정되어 무기 박탈 및 마법 사용 금지형으로 결정되었지만. 어쩌다 그렇게까지 감형되었는지 모르겠구나. 나인하트나 시그너스 여제가 힘을 썼던 걸까? 레지스탕스 진영은 배신자에게 냉엄하니 오히려 엄중한 처벌을 요구하면 요구했지 감형을 청하진 않았을 것 같거든. 하지만 뭐가 어떻게 된 일이든 대관절 나와 무슨 상관이었겠니. 내 삶의 아름다운 날들은 이미 전부 사라져 버린 것을.

 

   재판 뒤의 기억은 그다지 명료하지 않단다. 식사를 하기는 했는지, 잠을 자기는 잤는지….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알겠지만, 며칠을 그렇게 보냈는지도 생각이 나질 않아. 멍하니 누워 있다가 그가 머릿속에 떠오르면 울었고, 한참을 울다가 눈물마저 마르면 그저 가만히 아파하고만 있었지. 그 외의 지성은 필요치 않았어. 다시 일어설 생각 따위 전혀 없었으니까. 헌데 그러던 어느 날 헬레나가 찾아왔단다. 모험가 전체의 수장으로서 책임감을 느껴서였을까. 그녀는 나를 보고 기겁을 하더니 부축해 병원으로 데려갔어. 나는 그런 그녀가 몹시 귀찮았지만, 뿌리칠 의욕조차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의사가 와서는 알려주더구나. 아이를 배었다고.

 

   한 번. 그것은 단 한 번이었어. 최후의 전투가 있던 전날 밤, 날 깊이 잠재워 벨데로스 편에 안전한 생가로 보내기 위한 그의 계략이었지. 나는 그날 무언가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에 잠들지 않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다르게 내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는 그를 거부할 수 없었어. 황홀감과 두려움에 감싸여 뭐가 뭔지 모르는 채로 순식간에 밤이 지나가 버렸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게 와 닿았던 그의 입술만큼은… 아직도 기억한단다.

 

―여인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한편으로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이제야 비로소 소년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그 없이도 삶을 이어가길 바랐고 종래에는 그렇게 되었어. 그가 내 곁을 떠난 후 난 단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스스로 살아갈 용기만은 잃지 않았던 거야. 그리고 그 용기는 그가 선물해 준 거였지. 그러니 그는 내게 완벽한 연인이자 구원자였단다, 그나이우스. 이걸로 대답이 되었을까?

 

매그너스, 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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