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15.png

시린 계절, 내뱉은 하얀 숨이 허공에서 흩어져 사라진다. 하늘을 바라보며 그것을 몇 번 반복하다, 이내 재미가 없어졌는지 하즈키 린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는 아무도 오지 않는 고요한 신사, 그리고 아주 오래 전에는 신이라고 불리며 사람들의 경외를 받았을지도 모를 이름 없는 요괴. 그 조합이 참으로 쓸쓸하고 조용하기만 해서, 이곳에만 오면 오묘한 감각에 휩싸이곤 했다. 하지만 그것을 느끼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내일, 다른 곳으로 갈 거예요.”

 

 

요괴는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꽤나 부드럽게 웃고 있어서,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차가운 호흡을 이어가던 요괴는 지금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더 가까이 오라는 듯 작은 손짓을 하였다. 마치 눈이 살랑이듯, 요괴의 하얀 기모노의 소매가 흔들리고 있었다. 하즈키는 잠시 머뭇대다 그에게로 다가갔다. 쭈뼛거리는 작은 아이를 보며, 요괴는 웃음을 흘리고 그녀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그 행동에 놀란 듯 몸을 굳혔다가도, 자신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 생각한 하즈키는 금세 긴장을 풀었다. 그녀는 온기 하나 전해지지 않는 요괴의 손이, 자신의 등을 아주 조심스레 토닥여주는 이 순간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이야, 이 마을은 어땠니?”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하즈키는 시린 품에 안겨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회색빛의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사 온 마을에서 만난, 대단할 것 하나 없는 인연이었다. 하즈키 린에게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이 필요했고, 어쩌다 찾은 이곳이 마음에 든 것뿐이었다. 이름 없는 요괴가 말을 걸기 전까지, 그녀는 혼자서 책을 읽거나 멍하니 마을을 내려다보고는 했다. 그녀의 곁에는 언제나 아무도 없었기에, 그 주변을 채우고 있는 것이라고는 나이에 맞지 않는 정적과 고독함이었다. 그것이 한 번 흔들리고 나면, 원래대로는 되돌아 올 수 없음이 분명했다. 이미 벌어진 틈으로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이 빠져나올 뿐이니까.

하즈키는 요괴와 대화하는 것을 즐겁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덤덤하기만 하던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날도 있었다. 그녀는 답답하기만 한 집에서 벗어나 대부분의 날들을 신사에서 보내곤 했다. 언젠가 찾아올 날이 아득하게 먼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겨우 만난 작은 봄이 겨울의 바람에 휩쓸려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지쳐있었고, 기대하고 실망하는 일은 그만두고 싶었다. 그 작은 희망조차도 지켜지지 않을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애초에 정도 붙이지 않았을 터였다.

 

 

“···이 마을도 다른 곳과 똑같았죠, 뭐.”

 

 

쓴웃음을 짓고, 하즈키는 고개를 돌려 마을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딛고 서있지만 속해 있지는 않은 곳, 이제 곧 자신과는 상관이 없어질 장소. 아쉽다거나 쓸쓸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은 언제쯤이면 온전하고 불안하지 않은 일상을 누군가와 함께 보낼 수 있을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어린아이가 포기하는 법부터 배우면 안 되지.”

“···어린 애 아니에요.”

 

 

누군가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받는 것은 낯설다. 그것에 동정과 연민이 섞여있다면 더더욱. 하즈키는 요괴의 품에서 벗어났다.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도 그저 변덕이었을 뿐이리라. 퇴치사가 요괴와 친분을 쌓는다는 것도 어찌 보면 웃긴 일이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신사의 계단에 앉아서는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는 요괴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맺는 인연은 가볍고 쉬운 것들뿐이라, 헤어짐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하즈키 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추위 탓에 새빨개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널고 걸음을 옮겼다. 신사가 멀어질수록 요괴에게 전하고 싶던 말이 하나 둘 떠올랐지만, 그녀는 돌아가지 않았다. 이별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이 아직 무서웠던, 어린 아이의 선택이었다.

 

 

***

하즈키 린이 떠난 이후에도, 요괴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한순간에 찾아와 한순간에 떠나가 버린 여름 같은 작은 아이. 샛노란 여름빛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이 사랑스러웠다고 얘기해 줄 걸 그랬나. 요괴는 그러한 생각들을 하며, 계절들을 흘려보냈다. 어쩌다 만나게 되었던 그 아이의 모습을 곱씹으며, 영원을 사는 자신에게는 그리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시간을 그렇게 버리고 있었다. 돌고 또 돌고, 몇 번이나 돌아왔을지 모를 햇살이 뜨거운 계절에 익숙한 그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몇 살 때 살았는데요?”

“살았다고 해야 하나? 겨우 한두 달 밖에 안 있어서···. 11살 때였어요.”

“왠지 린의 어렸을 때는 상상이 잘 안가요.”

 

 

나는 타카시 군 어렸을 때 사진 봤는데! 조금 장난스런 목소리, 바람에 살랑이는 검은빛의 머리카락. 요괴는 아주, 아주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사실은 쓸쓸하다며,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던 작은 아이는, 자신과 닮아 여름을 닮은 이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안녕, 오랜만이에요.”

 

 

아늑한 후우링 소리가 울려오던 여름, 그 짙은 계절에.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