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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소달기의 양아들은 귀신같은 자였다. 궁녀의 신분으로 들어와 황제를 유혹하고, 이윽고 황후의 자리에 앉아 이 나라의 실권을 잡은 여인이 직접 골라 기른 아이답게. 그 남자는 잔인하고도 총명했다. ‘피도 섞이지 않았다는데 어쩜 황후를 쏙 닮았을까!’ 궐 안의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수군거렸지만, 그들이 말하는 ‘닮았다’에는 외적인 것은 별로 포함되지 않았다. 머리색도, 눈매도, 눈동자도, 심지어 발가락 하나도 닮지 않은 두 사람이 닮은 것은 모두 내적인 것들 뿐.

비정상적으로 비상한 머리와, 사람을 이해하고 다루는 재주. 그리고 비정함….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런 것들만이, 황후와 황태자가 모자관계인 것을 느끼게 해주곤 했다.

 

“폐하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제 자식도 아닌 아이가 황태자가 되었는데, 위기감도 없으신 거 같고.”

“글쎄다, 아무 생각이 없으시니까 황후마마에게 모든 걸 넘기신 게 아닐까.”

“뭐, 생각해 보면 황후마마가 더 나랏일을 잘 보긴 해. 실제로 황태자님도 황후마마가 눈여겨보다가 양자로 들이셨다는 말이 맞는지 일은 잘 하시고.”

“두 분다, 성격이 장난이 아니긴 하지만…. 황태자 님, 요 며칠 전에 업무에 실수한 하급관료를 그 자리에서 직접 베어버리셨다고….”

“쉿. 목소리 낮춰. 누가 들었다간 목이 달아나.”

 

궁녀들의 잡담이 시끄럽다. 분명 작게 속닥거리는 목소리일 텐데도, 이야기의 당사자가 되는 이의 귀에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으니 문제였지. 시큰둥한 얼굴로 서적을 뒤지던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린 채 문 밖을 보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인데. 입조심 할 줄을 모르는 것들 같으니라고. 결코 성격이 좋진 않은 그는 저들이 원하는 대로 잡담한 이들 모두의 목이라도 쳐줄까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많은 탓에 억지로 귀를 닫았다.

 

‘왕천아~! 이 어미가 부탁 하나만 해도 되는 거지? 변방에 있는 새로운 개척지에 식량문제가 아직 해결이 안 되었다지 뭐니? 어마마마는 중앙의 일로 바쁘니까, 아들이 이 정도는 해결해 줄 수 있지?’

 

‘아무리 주워서 길러준 은혜가 있다지만, 이렇게 까지 부려먹다니.’ 아침 문안 때 황후가 내린 명령 아닌 명령을 떠올린 그는 혀를 찼다.

황후는 제게 평생의 은인이었다. 그는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제대로 된 보호자도 없이 관노로 살던 자신을 총명하다는 이유만으로 아들로 삼아 궁까지 데려와 준 사람이었으니까. 죽기 싫어 죽이고, 잃기 싫어 훔치고 속이며 살아온 자신에게 ‘왕천군’이라는 이름을 주고 사람을 다스리는 법까지 가르쳐 준 어미 같은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그것, 이것은 이것이었다. 왕천군은 달기는 지배자로서는 훌륭할지 몰라도 상사로서는 최악이라 욕하며, 둘러보았던 책들 중 몇 권을 꺼내 들었다.

 

“나에겐 이딴 일이나 시켜놓고, 본인은 연회에나 가고….”

 

물론 제가 연회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으니 연회에 가지 못한 걸 유감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은 일하고 상대는 먹고 마신다는 거였지. 윗사람이 일하지 않는데, 어찌 아랫것이 일하는 맛이 난단 말인가. 왕천군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간다는 듯이 이를 갈다가 성큼성큼 서고 밖으로 나갔다.

 

“앗, 나오셨습니까. 황태자님?”

“뭐야, 가라니까 왜 기다리고 있었어?”

 

밖으로 나오자마자 자신에게 들러붙는 것은 관노시절부터 함께 지낸 동무이자, 지금은 제 밑에서 일하고 있는 관료인 원천군이었다.

 

“책이 무거우실 것 같아, 들어드리려고 기다렸습니다.”

“…….”

“…저, 정말입니다!”

“아, 그래.”

 

사실은 아닌 걸 안다. 분명, 얼굴이나 한 번 더 보자고 따라붙은 거겠지. 하지만 왕천군은 굳이 모른 척을 해주었다. 그건 귀신같다 불리는 그가 보여주는, 몇 안 되는 다정함이었다.

살기 위해서라면 시체의 뱃속도 뒤질 수 있고 형제같이 자라온 동무를 희생시킬 수도 있는 자신과 달리, 원천군은 바깥 인간들에게는 잔혹해도 제 사람이라 여기는 이에게는 정을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제가 황후의 양아들이 되면서 자신도 같이 데리고 나와 준 게 고마워 이리 정성을 쏟는 거겠지. 왕천군은 그 충성심이 순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차갑게 내치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태어났을 때부터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던 그에겐 ‘진심으로 제 편이 되어주는 이들’은 모두 귀했기에.

무심하게 들고 있는 책을 넘긴 왕천군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제 뒤를 따라오는 원천군에게 물었다.

 

“학자들은?”

“전부 모여 있습니다. 황태자님만 가면 됩니다.”

“그래? 다들 죽기 싫어서 헐레벌떡 왔나보군. 기강을 잡아놓길 잘 했어. 목 5개짜리 기강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다만.”

 

‘뭐, 헤이해지면 다시 두 명 쯤 더 목을 칠까.’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를 소리를 하는 왕천군이 웃자, 원천군도 조용히 따라서 미소 짓는다. 그야말로 따스한 봄날과는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대화였지만, 어쩌겠는가. 처절하게 살아온 그들에겐 이 정도의 살벌함은 전혀 싸늘하지 않았는데.

 

“아, 얼른 이놈의 일 끝내고….”

 

‘뒷산에 꿩이라도 잡으러 갈까.’ 흩날리는 매화 꽃잎들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던 왕천군은 꽃바람이 불어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음? 황태자님?”

 

앞서나가는 이가 멈춰서는 것과 거의 동시에 멈춰선 원천군은 상대가 바라보는 곳을 같이 바라보고, 이내 탄식했다.

왕궁에서 가장 큰 연못 너머, 매화꽃이 줄지어 핀 정원에서는 악기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황제 없이 앉아 여러 여인들의 잔을 받고 있는 것은 이 나라의 황후. 그리고 그 황후의 주변에 앉아있는 이들은 모두 이 나라의 고위 관료들의 처와 여식들이었다.

‘과연, 오늘의 연회는 여인들만의 시간이라 하더니. 궁중악사들 외에는 남자가 한 명도 앉아있지 않는 걸 보아 황후의 말이 사실이긴 하였구나.’ 원천군은 금남의 연회와 황태자를 번갈아 보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께서 오늘 연회는 꼭 가야 한다고 하더니, 여인들끼리 시간을 보내고 싶으셨나 봅니다. 아마 다른 연회였다면, 분명 업무를 떠넘기시진….”

“저 여자.”

“네?”

“저기. 황후마마의 왼쪽 세 번째 자리에 앉은 여자. 누구인지 아나?”

 

기분이 상한 것 같은 왕천군을 위로해 주려던 원천군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황태자가 갑자기 여자에 대해 물어 오니 어쩌겠는가! 이건 아마 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라도 당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피가 파란색이 아닐까 의심받는 이 황태자는 술과 사냥은 좋아해도 여인에는 관심이 없다는 걸 궐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었기에.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지만 제 당혹감은 시답잖은 문제일 뿐, 하늘이 무너져도 물어본 것엔 제대로 대답을 해야 했다. 원천군은 고개를 쭉 빼내어 문제의 여인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이내 웃어보였다.

 

“아아, 문 태사네 여식이군요. 전에 본 적이 있어 알고 있습니다!”

“…태사의 딸이라고? 그 인간, 일만 하느라 처도 없지 않나?”

“네. 듣자하니 수양딸이라고 하더군요. 역병으로 몰락한 친우의 딸이라던가? 가문끼리 친했던 사이라 도무지 두고 볼 수 없어 거두었다고 했던 것 같기도….”

“어쩐지. 하나도 안 닮았다 싶었어.”

 

물론 피 한 방울 안 섞인 양어머니 밑에서 큰 자신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우습겠지. 그렇지만 왕천군은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말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태사의 여식은 눈에 띄는 얼굴이었기에.

 

“…흐음.”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앓는 소리를 하며 한참 먼 곳만 바라보던 왕천군이, 이윽고, 연회에서 연주되던 곡이 바뀔 즈음 입을 열었다.

 

“이봐.”

“네, 황태자님!”

“오늘 업무, 해가 지기 전까지 마무리할 테니 저 여자를 내 방으로 데려와.”

“예. 명 받들… 네??”

 

제가 환청을 들었나. 아니면, 오늘 아침 식사대신으로 마신 죽에 머리가 이상해지는 독이라도 들어있었나.

불경하다 할지 몰라도, 원천군은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아까 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너무나도 현실성이 없어서.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멍하니 서있는 원천군과 달리, 황태자는 단호한 태도로 명령을 이어갔다.

 

“데려오라고, 태사네 딸. 어차피 황후의 연회는 석반(夕飯)까지 아닌가? 식사 끝나고 빼내오면 되겠네. 내가 불렀다고 해.”

 

아아. 저 아랫것들을 마음대로 부려먹는 뻔뻔한 태도하고는. 당사자는 부정하겠지만, 이런 점 또한 황후랑 똑 닮았다.

상대가 화를 낼만한 진실을 애써 목구멍 너머로 삼킨 원천군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순응했다.

 

“아,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 빌어먹을 일 부터 마무리 지을까.”

 

황태자가 마음을 저리 먹는다면, 이 일은 정말 석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끝날 것이다. 원래도 영민한 그인데, 의욕까지 있다면 얼마나 더 일을 잘하겠는가? 결과적으로는 잘 된 일 같지만, 원천군은 한숨을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이 과연 태사의 딸을 데려올 수 있을까.’ ‘문태사는 고지식하고 성질이 호랑이 같은 자라, 천자인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든 황후와 그의 사람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는데.’ ‘게다가, 딸을 꽤나 어여삐 여긴다던데.’ 이런저런 걱정을 머릿속에서만 가둬둔 그는, 아까 전보다 훨씬 표정이 좋아진 황태자를 반만 뜬 눈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황태자의 업무는 노을이 지기 전 끝이 났다. 학자를 여럿이나 불러 온 것이 민망할 정도로 현명하고 실용적인 의견을 낸 황태자는 이 의견을 어떻게 구체화 시키면 좋을지에 대한 계획을 완벽하게 세운 채 회의를 끝마쳤고, 곧바로 방으로 돌아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아. 대체 뭘 준비하고 있기에 이러는 것인가. 원천군은 황태자의 방을 들락날락하는 궁녀들을 보면서 혀를 찼다. 그냥 술상이나 차려놓은 거라면 매우 다행이겠지만, 귀신이니 뭐니 하는 황태자께서 어디 그렇게 전통적인 유혹을 하겠는가.

‘부디 사고만 안 치면 좋을 텐데.’ 오래 왕천군을 알아왔다지만 그의 비정한 면모를 두려워하는 원천군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한숨 쉬며 연회장소로 향했다.

 

‘어디 보자.’

 

만찬이 계속되고 있는 연회장소는 향긋한 술과 흥겨운 음악으로 소란스러웠다. 비록 정신이 어지러워 머리가 지끈거리긴 해도, 누구 하나 몰래 빠져나간다고 해서 별로 눈에 띌 거 같지 않은 점은 다행이라고 해도 되는 걸까. 조심스럽게 목표물을 향해 다가간 원천군은 옆에 앉은 다른 참석자와 이야기 중인 문태사의 딸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

 

깜짝 놀라 뒤돌아 본 여성들은 다행스럽게도 비명을 지르거나 요란스러운 행동을 보이진 않았지만, 확실하게 경계하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해왔다. 원천군은 생각보다 침착한 상대편의 반응에 안심했지만, 그 안심은 어디까지나 잠깐일 뿐이었지.

‘허어.’ 자신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을 쉰 원천군은 제 두 눈을 손등으로 훔쳤다. 멀리서 보았을 때도 눈에 띄는 미인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태사의 딸은 절로 감탄이 나오는 절색이었다.

석류를 닮은 짙고 붉은 눈동자는 맑고 컸으며, 결이 좋은 머리카락은 마치 백매화의 꽃잎과 같다. 게다가 달같이 희고 선이 가는 얼굴은 또 어떠한가. 이래서야 아무리 여자에 관심이 없던 사내라도 궁금증이 생길만하다고, 그리 납득하고 마는 원천군이었다.

 

“누구십니까?”

 

그렇게 원천군이 얼빠져 있는 사이, 그에게 먼저 대꾸를 해온 것은 태사의 여식이 아닌 그 옆의 여인이었다. 문태사의 딸 만큼은 아니지만 만만찮게 미색인 여인은, 추측하건데 아마 문태사를 따르는 신하 중 누군가의 처인 모양이었다.

 

“아,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원천군. 황태자님 아래에서 잡무를 보고 있는 관료입니다.”

“…황태자의?”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린 여인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아가씨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 황태자님이 뵙고 싶어 합니다만.”

“예?”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에 선명한 불안이 스친다. 그래, 비록 능력은 있어도 성격 하나는 최악이라고 평해지는 황태자의 이유 모를 부름이니 불안할 만도 하지. 원천군은 그 공포를 충분히 이해했지만, 그들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태사님께 누가 되지 않게 정중히 모시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시기를.”

“…알겠습니다.”

“담운 아가씨?”

“괜찮아요, 훤원. 금방 다녀올게요.”

 

범도 무서워하는 그 문태사의 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본래 천성이 대담한 것일까. 오래 고민하지도 않은 그는 자신을 걱정하는 이를 다정하게 달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라도 황후에게 들키면 다시 앉으라고 명받을지 모르니,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빠르게 빠져나가야 한다. 미리 준비한 겉옷으로 상대를 가려준 원천군은 미리 보아둔 으슥한 길로 문태사의 여식과 함께 이동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얼마나 이동했을까. 어두운 길을 몇 번 지나쳤을 뿐인데, 두 사람은 어느새 황태자의 처소에 도착해 있었다.

상대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세워 제 입에 가져다 댄 원천군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속삭였다.

 

“데려왔습니다, 황태자님.”

“들라 해.”

“네.”

 

‘후우.’ 심호흡 하듯 한숨 쉰 원천군은 태사의 딸에게 눈짓하고, 방문을 열어둔 채 뒷걸음질로 물러난다.

상대가 걸쳐주었던 겉옷을 벗어 고이 개어놓은 그는 정중하게 허리 숙여 감사함을 표하고, 자신을 부른 이가 기다리고 있을 문 안으로 들어섰다.

 

“저….”

 

잔뜩 긴장한 채 안으로 들어선 그는 방 안 가득 차오른 은은한 향기에 멈춰서고 말았다.

아아. 여길 보아도 꽃, 저길 보아도 꽃이다. 궐의 뜰에서도 본 적 없는 귀한 꽃부터, 길가 어디에서나 피어있는 들꽃 까지.

화려한 꽃들의 모임에 넋이 나가있는 것도 잠시, 문태사의 여식은 어느새 제 앞으로 다가와 있는 낯선 사내를 보고 어깨를 움츠렸다.

이 남자가 소문으로만 듣던 황태자. 제 어미처럼 총명하지만 잔인하고 비정한. 궐 안의 귀신….

 

“…이름.”

“예?”

“이름. 네가 누구인지는 알아. 이름만 말해.”

 

황태자는 코가 마주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서, 낮게 읊조렸다. 그 목소리에는 어디에도 위협하는 느낌이나 겁주려는 기색이 없어서, 여식은 제가 들은 소문이 모두 헛것이 아니었나 의심하고 말았다.

 

“담운이라 하옵니다.”

“흐음.”

 

자신을 소개한 담운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왕천군은, 대뜸 그의 팔을 낚아채선 의자에 앉히더니 주변의 꽃들을 하나하나씩 그 얼굴 옆에 가져갔다.

 

“저, 저어. 황태자님?”

 

갑자기 무엇을 하는 걸까. 우두커니 앉아 제 옆을 머물렀다 떠나는 꽃들을 눈길로 쫓던 담운은 이내 무의미한 술래잡기를 관두고 눈앞의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피가 이어져있지 않기 때문인지, 황태자는 황후와는 하나도 닮지 않았었다. 복사꽃을 떠올리게 하는 황후의 머리카락과 달리 황태자는 짙은 초목의 색이 깃든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바삐 움직이는 눈동자도 황후의 것과는 달리 색채가 없어 보일 정도로 짙은 흑색으로 빛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황후와 똑 닮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형용하기 힘든 서늘한 아름다움이었다.

마치 얼음으로 만든 꽃과 같은, 싸늘하지만 아름다운 얼굴. 손을 데었다가는 동상을 입어버릴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 단정하고도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정말로 숨 막히게 아름다워서….

 

“태사가 딸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왜 그리 함구하고 살았는지 알 것 같군.”

“예?”

“어떤 꽃도 이 얼굴 앞에서는 그냥 잡초같이 보이니 말이야.”

 

그리 말하는 황태자의 핏기 없는 입술이, 희미한 호를 그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덧없고 희미한 미소. 담운은 그 웃는 얼굴에 홀린 듯 숨을 삼켰다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두 손을 꼭 마주 잡았다.

 

“…내가 무섭나?”

 

야무지게 맞잡은 고운 손을 본 왕천군은, 얼굴과 얼굴 사이의 거리를 벌이며 그리 물었다.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 천자는 내가 아니라 내 어미지.”

“그래도 언젠가는 그 자리에 오르실 분이지 않습니까.”

 

침착하게 대답하는 두 눈에는 두려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눈동자 안에는 제가 보아온 어떠한 신하들이나 장수들보다도 굳센 의지가 보여, 문태사가 딸을 어떻게 길러 놓은 지에 대한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지.

소리죽여 웃은 왕천군은 담운의 옆에 앉더니, 근처에 아무렇게나 놓아두었던 흰 모란꽃을 꽃 부분만 남도록 꺾어 들었다.

 

“올해로 몇 살이지?”

“열여섯입니다.”

“그래? 혼약자는?”

“없사옵니다.”

 

‘그거 잘 되었네.’ 들으라는 듯 중얼거린 그는, 방금 꺾은 모란을 여전히 긴장해서 얼어있는 상대의 옷깃에 꽂아주고 물었다.

 

“너, 황후 한 번 해 볼 테냐?”

“예?”

“싫으면 말고. 한 번 뿐인 생, 귀신같은 지아비를 들이고 싶지는 않을 테니.”

“아니, 그것이 아니오라….”

 

당황한 담운은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눈동자를 굴리며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분명 제가 알기로는, 황태자는 여색에는 관심이 없고 천자가 될 때 까지는 처를 들일 생각도 없어 보인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오늘 처음 만난 자신에게 이런 소릴 하는 걸까.

 

“진심, 이옵니까?”

“내가 왜 이런 걸로 농을 칠거라 생각하지?”

“그렇지만, 그, 소녀의 어디가 마음에 드셔서 이리 복에 겨운 제안을 하시는 건지 도무지….”

 

황후라는 것은, 천자의 비가 되는 것과 동시에 궐에서 남부럽지 않은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지금의 황후는, 황제보다도 영향력이 세었으니 실질적인 1인자나 다름없다고 해도 좋았지.

그런데, 그런 지금의 황후 밑에서 큰 황태자가. 제 비가 되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황후를 하겠느냐’고 권유하다니. 담운은 지나치게 좋은 조건에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지만, 황태자는 그가 도망가게 두지 않았다.

 

“너 같은 여자는 두 번은 못 볼 거 같아서.”

 

왕천군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다시 서로의 거리를 좁혀온다. 피부와 피부가 마주 닿고, 서로의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 하지만 결코 실제로 살결이 마주 닿는 일은 없는 미묘한 간격을 유지한 채, 그가 나직하게 말을 이어갔다.

 

“나는 말이야, 귀한 것도 값진 것도 좋아하거든. 세상에서 하나 뿐인 거라면 더욱 좋아하지. 지금이야 뭐든 가질 수 있는 몸이 됐지만, 태생부터 그러진 않았던 터라 말이야.”

“…….”

“아까 널 보고 그리 판단했어. 내 곁에 두고 싶다고. 저 여자가 다른 사내의 처가 되면 아쉬울 것 같다고 말이지. 이기적인 판단이라 생각할 테지만, 이게 내 진심이야.”

 

할 말을 마친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거리를 두고, 사뭇 정중하게 담운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어떤가? 나를 지아비로 두는 게.”

“저, 이런 건 제가 아니라 아버님과 이야기를 하셔야….”

“태사는 내가 설득하던 납득시키던 할 테니, 네 의사만 알면 돼.”

 

과연. 이런 점도 황후랑 쏙 닮았구나. 의외의 공통점을 계속해서 찾아내던 담운은, 어쩐지 그와 황후의 관계가 자신과 제 수양아버지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웃어버리고 말았다.

 

“…저는, 좋습니다.”

“그럼 됐어. 좋아. 돌아가. 내일 태사와 이야기하고 결론짓도록 하지.”

 

아마 귀신이라 불리는 황태자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 아비를 설득할 것이다. 조금은 과격한 방식을 쓰는 한이 있어도, 크고 작은 반대에 부딪히더라고, 반드시 제가 황실로 시집을 가게 만들겠지.

어째서일까, 다른 이들이라면 분명 황태자의 그런 점을 무섭다 느꼈을 텐데. 자신은 왜 그런 감정이 들지 않는 걸까.

왕천군에게서 받은 꽃을 소중히 품고 방 밖으로 나온 담운은, 기절할 듯 놀랄 아버지에게는 죄송한 일이었지만 도무지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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