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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우스 드라코니아X아이렌X듀스 스페이드
보름달의 밝은 빛을 투영하는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천국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것처럼 아름답다.
듀스는 성화를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를 앞두고, 뒤로는 제가 지켜야 할 사람을 둔 채 세례 받은 제 무기를 몇 번이고 만지작거렸다.
“저기, 듀스.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아무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해도,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어서 마음이 아프다. 해가 진 이후부터 계속해서 기도를 하고 있는 동료를 본 아이렌은 측은한 마음에 제 앞에 있는 듬직한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무슨 소리야 아이렌. 너, 잘못하면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고.”
“괜찮아. 별 일 없을 거야. 대사제님도, 트레이 선배도, 케이터 선배도, 에이스도…. 전부 다 같이 나를 지키고 있는 거잖아. 애초에 듀스의 차례가 오기는 할까? 다들 밖에서 열심히 활약하고 날 지키는 역인 너만 활약 못했다고 나중에 투덜거려도, 나는 모른다고?”
제 목숨이 걸려있는 문제라는 걸 분명 알 텐데, 아이렌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침착하고 유머러스하다. 정말로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듯 너무나도 침착한 상대의 반응에 듀스는 조금 긴장이 풀렸지만, 그렇다고 정말 어깨에 힘을 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눈앞의 이 소녀, 아이렌은, 태어났을 때부터 남들과는 전혀 다른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성(聖)과 함께한다면 어디까지고 성스러워 질 수 있지만, 악(惡)과 함께한다면 어디까지고 타락할 수 있는. 다른 색을 가까이 하면 쉽게 물들어 버리는 순백의 천 조각 같은 영혼.
그의 탄생을 천사의 계시로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하는 전(前) 대사제는 아이렌이 젖을 뗄 무렵 곧바로 교회로 그를 데려왔고, 그렇게 몇 십 년 간 성수를 뿌리고 신의 상징으로 온 몸을 장식하며, 불쌍한 이 어린양을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훌륭한 사제로 키워놓았다.
하지만 그의 탄생을, 과연 천사들만이 알고 있었을까. 그럴 리가 없었지, 모든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말았다.
‘그 아이가 18살이 되는 해, 가장 큰 보름달이 뜬 자정. 천국에서 쫓겨난 불경한 자가 순백의 영혼을 집어삼키러 올 것이다.’ 천사의 계시를 받은 현(現) 대사제 리들 로즈하트는 조용히 아이렌의 나이를 손꼽아보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정확하게 계시를 받은 지 1년 후에, 아이렌은 18살이 된다.
준비기간은 겨우 1년. 하지만 책임감이 강한 그는, 대사제로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 무기를 쥐어서라도 악을 저지하기로 했다.
그래, 오늘은 바로 아이렌의 18번째 생일 하루 전 날. 약 30분 후엔, 그는 18살이 되고 계시에 따라 악이 이곳으로 찾아올 것이다.
‘정말 나 혼자 지켜도 괜찮은 걸까?’ 듀스는 한 손에는 검을, 한 손에는 아이렌의 손을 잡은 채 마른침을 삼켰다. 리들 대사제는 사원의 입구에서 결계를 치고 있고, 에이스는 기도실 밖에서 문을 지키고 있다. 선배인 케이터와 트레이는 옥상에서 주변을 순찰하며 수상한 것이 있으면 바로 공격할 수 있도록 대기를 하고 있다지만…. 정작 지켜야 할 사람 옆에, 자신 혼자만 있어도 되는 것일까.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역시 대사제의 결계에 악마들이 물러나거나, 선배 사제들이 침입자들을 물리치는 것이겠지만… 사악한 이들이 겨우 그 정도로 패배를 인정할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그 다음으로 이상적인 경우는, 나름 퇴마에 일가견이 있는 동기인 에이스가 기도실 앞에서 악마를 퇴치하는 것이었지만, 그 경우마저 실패하면….
‘내가 아이렌을 지켜야 해.’
제 목숨과 바꾸는 한이 있어도 이 사람을 지켜야 한다. 모두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아이렌은 그 특이체질인 점을 빼고 보더라도 제게는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사람 중 하나이기에.
“아이렌,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만약 내가 위험해 지면 날 두고서라도 도망가야 해. 절대 악마가 네게 닿지 못하도록….”
간절한 말은 끝나지도 않았는데,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뎅. 뎅. 뎅….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리는 맑은 소리에 듀스는 덜컥 겁을 먹고 아이렌의 손을 잡았지만, 그는, 그래서는 안됐었다.
“─이런, 번견이 또 있었군.”
처음 듣는 낮은 톤의 목소리가, 아무것도 없어야 할 허공에서 울려 퍼진다.
아아. 공기가 무거워지고 숨이 막혀온다. 듀스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자신을 내려다보는 존재가 있다는 걸 눈치 채 버렸고, 동시에 온 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것들, 어째서 무의미한 저항을 하는 거지?”
커다란 날개가 펄럭이는 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위협적이다. 마치 박쥐를 닮은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커다란 그림자는, 뱀의 것과 같은 밝은 녹색의 눈으로 듀스와 아이렌을 번갈아 보고 웃었다.
“작별인사는 마쳤느냐? 인간의 아이들이여.”
“당, 신은.”
아이렌의 손을 잡은 채로는 제대로 싸울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 손을 놓았다가 저 악마가 아이렌을 낚아채 간다면?
딜레마 속에 갇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사이, 그림자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두 사람에게로 가다왔다.
한 걸음, 두 걸음. 악마가 발을 움직일 때 마다 기도실의 촛불들이 동시에 춤춘다.
흔들리는 그림자, 불안정한 조명 아래에서 불길함을 내뿜는 늠름한 날개와 검고 날카로운 뿔까지.
누가 보아도 악마 그 자체인 상대의 모습에, 아직 스물도 되지 못한 두 사제는 호흡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다, 다른 사람들은….”
“응? 아아…. 바깥의 번견들 말인가. 다른 이들이 상대해 주고 있지, 직접 사냥해 먹어도 된다고 했거든. 릴리아가 어찌나 기뻐하던지.”
악마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듀스는 기도실의 유일한 출입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듣고 보니, 바깥이 지나치게 조용한 것 같다. 보통은 싸우는 소리라도 들려야 하는 것 같은데, 비정상적으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다.
설마, 이미 모두 잡아먹혔다면. 이제 아이렌을 지킬 수 있는 사제가 자신뿐이라면.
“걱정 말거라, 교단의 번견이여. 나는 네 혼 따위엔 조금도 관심이 없어.”
공포에 질린 듀스를 향해 손짓한 악마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야말로, 정신을 쏙 빼놓는 아름다운 얼굴. 분명 뿔과 악마만 없었다면 천사가 아닐까 착각 할 정도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진 악은 달콤한 목소리로 거래를 제안했다.
“나의 것을 두고 얌전히 사라진다면 죽이지는 않겠다. 바깥의 내 종자들에게도 명해두지. 도망치는 개를 쫓지 말라고. 무조건적인 신앙을 요구하고 제 마음이 내킬 때만 소원을 들어주는 이기적인 신과 달리, 나는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거든.”
‘악마란 그런 것이지.’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그는 딱 한 걸음 정도의 거리만 남긴 채 멈춰 섰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목을 조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저런 말을 해온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은 역시 거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진다. 악마는 그리 생각해 제안해 온 것이겠지만 안타깝게도 듀스는, 사제 듀스 스페이드는…. 신앙과 사랑에 눈이 먼, ‘바보’였다.
“듀, 듀스. 나는, 그냥 두고….”
“젠장. 웃기지 마! 널 팔아넘겨서, 악마랑 거래해서 살아남을 바에는, 영광스럽게 신의 곁으로 가겠어!”
죽는 것은 싫다. 하지만 신앙을 저버리고 동료를 팔아넘겨 살아남는 것은 죽는 것 이상의 수치였다. 듀스는 온 몸을 덜덜 떨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강하게 피력했고, 그걸 본 검은 뿔의 악마는….
“풋.”
마치 아주 재미있는 촌극이라도 본 듯, 소리 내어 폭소했다.
“하하, 하하하…!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니었던 걸 지키려고,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차다니! 신앙에 눈이 멀었구나, 인간의 아이야.”
“내 것도 아니지만, 당신 것도 아냐. 아이렌은, 자기 자신의 것이니까.”
“과연 어떨까? 물건은 결국, 마지막에 손에 넣는 자의 것이 되는 법이지. 그리고 이 말레우스 드라코니아는, 가지고 싶은 건 가지고야 마는 성미다.”
그러니 직접 받아가도록 할까.
창백한 입술이 소리 없이 속삭이자, 수십 개의 촛불들이 일제히 꺼지며 어둠이 기도실 가득 차올랐다.
“…자. 비명을 내질러 보거라. 신의 광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