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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메, 네가 표현하고 싶은 것이 뭔지 제대로 생각해보는 게 좋겠구나.

 

 

나릿하게 흘러내리는 노을의 주홍빛 아래, 일렁이는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나츠메 타카시는 그것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제 손에 들린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도 없는 방과 후의 운동장에는 물러앉는 고요 위로 쌀쌀함을 담은 바람이 불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방금 전 들은 말을 곱씹으며 천천히 카메라를 들어보였다. 흐릿하던 초점이 늦여름의 한 장면에 선명하게 맞춰지다 금세 다시 흔들린다. 결국 셔터를 누르는 소리는 울리지 않은 채, 정적 속에 불안한 호흡만이 맴돌았다. 그는 살풋 인상을 쓰며 이게 아닌데, 라고 중얼거렸다.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사진을 좋아한다는 막연한 마음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있으리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들을 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답답함을 마주하는 순간이 온다면 분명 지금이라고, 나츠메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타카시, 뭐해?”

 

 

아늑한 곳에서부터 울려오는 것은, 초록의 풍경 소리. 갑작스런 소리에 흠칫 놀랐다가도, 뒤를 돌아보는 나츠메의 얼굴에 묘한 기쁨이 번져갔다. 이 계절의 끝에서 맞이하는 여름에게서는 이질적일 정도로 싱그러운 향기가 풍긴다. 린, 왔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하즈키 린은 햇살을 반사해내는 제 눈동자를 움직인다. 그 시선이 멈추는 곳이 자신의 손에 들린 카메라인 것을 확인하고, 나츠메는 조금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사진이 잘 안 찍혀서…. 끝말을 흐리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하즈키는 슬 미소 지어 보인다.

 

 

“우리 데이트 할까?”

 

 

무어라 답을 내놓기도 전에, 하즈키는 그의 손을 붙잡아 끌어당긴다. 그 난데없는 행동에 긴장한 듯 살짝 몸을 굳혔다가도, 나츠메는 맞닿은 체온에 표정을 풀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방금 전보다 진해진 노을은 주홍색이기보다는 붉은색에 가까웠고, 분명 그 빛살은 열이 오른 얼굴을 감춰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선명했다.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츠메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린, 어디로 갈 건데?”

“글쎄, 네가 가고 싶은 곳? 아, 그 전에 어디 한 군데만 들리자.”

 

나츠메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그녀를 따랐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들었던 번잡한 것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녀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어느새 제 곁에서 나란히 걷는 이를 응시하며 웃을 뿐이었다.

그 언젠가의 계절에 만난, 늦여름의 녹음과도 같은 사람. 하즈키 린은 그런 존재였다. 새하얀 악보들이 바람에 살랑이고, 부드러운 선율이 허공을 부유하는 그 오래된 음악실에서, 어쩌다 마주친 찬연함을 도저히 잊지 못할 것이었다. 호흡이 막힐 듯 뜨거웠던 공기와 시끄러워진 심장 박동 소리가 여전히 뚜렷한 감각으로 다가오곤 했다. 그 순간을 사진으로 담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자신은 그것을 평생 기억할 것이니 상관없다는 모순된 생각이 엇갈린다. 그는 저도 모르게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즈키는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묘한 기류 속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자, 그럼 타카시 군. 카메라를 주세요!”

“에, 내 카메라? 뭐할 건데?”

 

 

나츠메의 질문에도 아무 대답 없이, 하즈키는 그저 받아든 카메라와 제 손에 들려있던 바이올린 케이스를 라커에 집어넣었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울린 후에야 그녀는 몸을 돌리며 그를 바라본다. 그녀는 양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장난스런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오늘은 사진 촬영 금지! 나한테 집중해, 타카시.”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 나츠메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쯤은 사진에서 벗어나보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즈키와 가볍게 이마를 맞대었다. 고마워. 그 인사와 함께 난 항상 너한테 집중하고 있지만, 이라 덧붙인 그의 뒷말에 하즈키는 배시시 미소 짓는다. 그 얼굴이 붉어진 것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채, 둘은 걸음을 옮겼다. 짙어지는 계절의 찬란이 손끝에서부터 아릿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

 

 

 

“벌써 10시가 다 되어가네. 우리 진짜 열심히 놀았다, 그렇지?”

“응, 먹는 것도 열심히 먹었고.”

 

 

나츠메는 웃음을 흘리며 하즈키의 입가에 묻은 것을 닦아주었다. 다정한 애정이 담긴 그의 행동이 역시 아직은 쑥스러운지 그녀는 일순 몸을 움츠리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붉게 물든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고, 다시 돌아온 보관함에서 카메라를 꺼내주었다. 나츠메는 이상하리만치 낯설어진 감각을 받아들이느라 한참을 오도카니 서서는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다시 카메라를 켜며 들어 보이는 그였지만 말이다. 그는 하즈키에게 초점을 맞추며 조심스레 셔터를 눌렀다. 고요 속에 찰칵이는 소리가 울리며, 카메라에 비춰지던 장면이 온전히 멈추었다. 하즈키는 작은 웃음을 흘리고 자신의 짐을 마저 꺼내었다.

 

 

“타카시, 너무 나만 찍는 거 아니야?”

“하지만, 역시 너의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싶으니까.”

 

 

사람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잖아. 9월 14일, 오늘의 날짜가 확연하게 찍힌 사진을 확인하며, 나츠메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 하즈키는 들리지 않을 말을 중얼거리고서는 나츠메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마지막으로 뭐 하나만 보고 갈래? 그 의도를 알아차리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을 터다. 실없는 얘기를 나누며, 둘은 근처의 공원으로 향했다. 늦은 시각, 아무도 다니지 않는 그 조용한 곳에는 가로등의 불빛만이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처럼, 하즈키는 그 아래 서서는 제 바이올린을 꺼내들었다. 그녀의 샛노란 여름빛의 눈동자는 전과 다름없이 완전한 색을 빛내고 있었다.

 

 

“듣고 싶은 곡 있어?”

“아무거나. 린 네가 연주해 주는 거라면 뭐든 좋으니까.”

 

 

어두운 밤하늘 위로, 아주 천천히 음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적막한 공기를 감싸고, 흐릿한 별빛에 닿았다가 종국에는 나츠메 타카시에게 다다른다. 마치 그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처럼. 문득 이 모든 풍경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연주가 끝날 때까지 그가 카메라를 드는 일은 없었다.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것은, 생각보다 불확실하고 쉬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랴. 그것이 여름밤의 환상과도 같은 장면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얼마큼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금 정적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마치 정말로 공연이라도 한 듯이, 하즈키는 허리를 숙여 인사까지 건네었다. 잘 했어? 진지했던 얼굴은 순식간에 지워지고,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나츠메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겨주고, 나츠메는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응, 멋있었어. 제 말에 뿌듯한 표정을 하는 그녀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올리고, 그는 깍지를 끼며 손을 붙잡았다.

 

 

“린, 나랑 같이 사진 찍을래?”

 

 

생각해보니까 우리가 같이 찍은 건 많이 없는 것 같아서. 나츠메의 말에 하즈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폭 안겼다. 제 품에 쏙 들어오는 그녀를 보며 웃고서, 나츠메는 조심스레 하즈키를 끌어안았다. 아주 선연하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있지, 나는 앞으로 여름의 풍경을 담을 거야.”

 

 

싱그럽고, 아름다운 나만의 늦은 여름에게 끝나지 않을 사랑을 얘기하면서. 아마 이 결심은 앞으로도 평생 변하지 않겠지. 하즈키는 그의 말에 조용히 미소 지으며 응. 이라는 작은 대답을 남겼다. 아득한 곳에서부터, 초여름의 바람이 불어온다. 변하지 않을 감정을, 빛바래지 않을 기억을, 그리고 지금의 모든 순간을 아주 분명하게 담아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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