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서와!"
미나가 발랄한 소리로 현관문을 열자 복도 밖에서 그를 맞이해주는 건 세피로스 혼자뿐이다. 세피로스는 오직 미나에게만 익숙하기 그지없는 다정한 미소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제네시스와 앤질이 동행했을 거라 기대했건만 정작 둘의 모습은 보이지 않자, 미나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세피로스, 혼자 온 거야? 앤질이랑 제네시스는?"
"둘은 다른 볼일이 있다고 나만 보냈어."
설령 다른 일이 없었더라도 그네들이 같이 올 일은 없었을 테지만. 마냥 깨가 쏟아지는 연인 사이에 일부러 끼고 싶어 할 정도로 눈치 없는 이들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제네시스와 앤질이 싱겁게 모임을 사양하자, 세피로스는 살짝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긴 했었으나 순전히 예의상 그러는 것뿐이었다. 아마 속으로는 두 사람이 응당 그리해줄 거라 믿었던 게 틀림이 없었다. 영악한 영웅님 같으니라고. 제네시스는 얄밉다는 듯 흘겨보고, 앤질은 곤란한 얼굴로 장난스레 흉을 보았던 것 같다. 두 사람에게서 핀잔을 받는 거야 늘 익숙했으니 세피로스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미나가 자못 섭섭해하며 몸을 비켜주자 세피로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집안에선 미나의 품에서 맡곤 했던 낯익은 달달한 향내가 느껴졌다. 세피로스에게 기분 좋은 안정을 가져다주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래? 바쁘다면 어쩔 수 없지. 솔저들한테 휴일은 꼭 보장해달라고 신신당부했었는데, 정말이지."
미나가 속이 상한 투로 투덜거렸다. 등급이 낮은 솔저만 하더라도 신체 능력이 일반인의 범주를 훨씬 벗어나고 있었으니, 장정 여럿이 달려들어도 해내기 어려운 일을 단 한 명의 솔저가 너끈히 해내는 격이었다. 하물며 퍼스트 솔저들이라면 어떻겠는가. 군비 영역에선 솔저들에게 사활을 걸고 있는 회사였으니 매번 과중한 업무를 떠밀기 일쑤였고, 그 사이에서 중재역을 맡은 미나가 상부와 끊임없이 다툼하고 있었던 것이다. 솔저들의 비상식적인 업무량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 매번 그들을 걱정하게 되는 건 오롯이 미나의 몫이었다. 본래 미드갈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 입장에서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곳 인간들의 시선에서 미나는 어디까지나 이단아에 불과했다. 체계적으로 개조된 신체 능력 탓에 병기나 괴물 취급이라면 모를까 누구도 솔저를 인간적으로 생각해주진 않았으니까. 하물며 당사자인 세피로스마저 처음엔 그를 별종이라 여기지 않았던가.
물론 지금은 전처럼 매정하게 여길 리가 없었다. 미나가 타고난 성품은 어느 누구에게서도 찾기 어려운 귀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으니 말이다. 회사 입장에선 애물단지였을지 몰라도 그 생소하고 섬세한 이타심 때문에 세피로스에겐 너무나 사랑스럽고, 다정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미나가 걱정하는 만큼 무리하는 녀석들은 아니니까 괜찮을 거야."
"응, 제네시스 혼자서라면 모를까 앤질이 같이 있다면야."
미나가 헤헤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미나는 잔정이 많은 사람이라 예전부터 성급한 성격의 제네시스를 훨씬 걱정하는 편이었다. 어떤 때는 애송이 신병 솔저를 대할 때보다도 더. 아마도 제네시스와는 가까운 친구 사이이기도 하니까 그랬을 테지. 위급 상황에서 미나가 제네시스를 감쌌던 적도 있었으니까. 일부러 의식하는 것도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건 알지만, 이따금씩은 세피로스도 조금씩 질투를 느낄 정도로 신경을 써주고 있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유치한 불만이 샘솟아 허리를 숙여선 반쯤은 심술궂게 미나의 따스한 귓불에 입 맞춰준다. 당연히 예고라곤 없었다. "엄마야!" 미나가 귀여운 소리를 내며 반사적으로 흠칫 몸을 떠는 걸 지켜봤다. 시커먼 속내와는 정반대로 누구보다도 자상하게 웃는 수려한 얼굴이 미나의 시선을 붙잡았다.
"오늘은 내가 같이 있어 줄게. 영화 보고 싶다고 했지? 뭐가 보고 싶었는데?"
미나의 말로는 오늘이 영화 보는 날로 정해져 있다던데, 세피로스는 그런 기념일은 들어본 적이 없어 의아해했다. 알고 보니 미나가 살던 곳에서는 그랬다고 했던가. 미나는 본인의 출신지에 관해선 얘기해주는 일이 드물었지만, 간혹 힌트처럼 조금씩 던져주면 아주 흥미롭게 느껴졌다. 세피로스는 그 이름도 모르는 곳이 미드갈에서 얼마만큼 멀리 떨어진 곳일지 혼자서 상상해보곤 했다. 언젠가 둘이서 같이 가볼 수도 있을까.
"으, 으응....! 이번에도 공포영화...."
우물쭈물 수줍게 답하는 미나를 보며 세피로스가 저도 모르게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귀신은 잘 못 보면서 또 고른 거야?"
"그치만 공포영화는 좋아해! 점프 스케어 못 보는 거랑은 다른 문제야. 게다가 나 혼자서는 무섭지만, 네가 있으니까."
저 기분 나쁜 호조 박사 앞에서조차 지지 않고 바락바락 대들 정도로 겁 없는 미나도 세피로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약점을 드러낼 수 있다. 이유는 별 것 아니었을지 몰라도 의지하고 있다는 듯한 대답이 못내 사랑스러웠다.
세피로스는 녹을 듯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미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미나에 비해 훨씬 큰 체격 때문에 그 작은 몸이 검은 날개 속에 온전히 뒤덮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미나가 무섭지 않게, 영화 보는 동안 지금처럼 안고 있어 줄게."
놀리기는커녕 그저 상냥하기만 한 목소리 탓에 배시시 웃음 짓는 미나가 들뜬 소리로 답한다. 그도 세피로스의 등으로 손을 뻗어선 다정하게 꼬옥 끌어안았다. 처음 만났을 적엔 저와 비슷하게 컸던 것 같은데, 앳되었던 영웅은 벌써 이만큼 훌쩍 커버려선 수호천사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기뻐라, 실은 너한테 손잡아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깃털처럼 내려앉는 세피로스의 입술이 이마에 닿는 걸 느끼며 미나는 기꺼이 행복해했다.
새삼 떠오른 생각이지만, 뒤늦게서야 제네시스와 앤질이 왜 오늘 약속을 고사했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미나는 자리에 없는 제네시스와 앤질 생각에 조금 민망해져 버렸다. 눈치도 없이 세피로스와 함께 초대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아직 현관 앞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이미 원하는 것을 다 가진 양 저를 끌어안은 채 연신 입 맞춰주기 바쁜 세피로스를 보니 그는 처음부터 영화 따위엔 조금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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