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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사람들은 서로를 끌어안아 주는 날이 있다고 해요. 들으셨나요?”

 

몇 해 전이였다면 그런 풍류를 재잘거렸을 이는 분명 자신이었다. 시간이 흘렀고 많은 것들이 변했다. 서문지우는 이를 누구보다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아니, 솔직하게는 그런 소문을 더 제게 이야기를 해줄 만한 사람도 없었다. 어쩌면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해도 일축하고 가지 않고 그 옆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제 곁에 두는 이가 손꼽을 만큼 줄어든 탓이다.

신도당의 대제자로서 처리할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기보다는 지쳐서는 아니 되는 몸을 이끌고 푹신한 요에 기대어 술잔을 맞대어 줄 사람 없이 한 잔 흘려보내고 나서 잠드는 게 더 익숙한 나날이 아니던가. 날이 추워지는 길목이다. 서해는 눈이 이르게 오는 곳이라 눈이 내리는 것으로 겨울을 셈하지는 않았으나 확연히 입가에 입김을 달고 살 즈음이 되면 겨울이라고 그제야 인정하게 되는 법이다.

 

“그런 이야기는 또 어디서 들었니.”

“어디서 들었겠어요! 사저가 저만 다녀오라고 했던 장에서 들었지요. 사저가 오지 않아서 사람들이 어찌나 아쉬워했는지 몰라요.”

“금칠은 되었다.”

 

아쉬운 소리를 하는 소사매의 얼굴을 한번 문지르고 나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급했다. 저런 소리를 들어서가 아니라. 오늘은 며칠 되지 않는 휴일로 내가 당신을 독점할 수 있는 날이기에 잠시라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열 두 번째 달의 열 네 번째의 날. 복잡한 회의도 없고 어딘가 뻐근한 연회에 장문인을 보내놓고는 떠나버리는 불경한 대제자가 된다고 해도 하루쯤은 괜찮으리라.

소식을 먼저 전하고 싶어 당신에게 제 매를 먼저 날려 보낼까 하다가도 당신이 어딘가 놀라는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에 결국 그런 마음을 꾹꾹 억누르는 것은 제 성정이 그다지 곱지 못한 탓이다.

당신을 잃고 몇 번의 계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른다. 분명 나는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당신의 흔적을 잡고 당신이 죽었음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인정하지 못하고. 나 당신을 잃었음을 확신한 밤에는 울지도 못하다 당신이 어쩌면 어딘가에서 숨을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그조차 놓치지 못하였다. 뒤돌아보면 해낸 것은 많았으나 내 진정으로 원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없이 가난해질 뿐이었다. 손에 쥔 것은 많으나 그 혼은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나의 생을 틀어 한 번도 부족하거나 모자란 것 없었으나 당신이 내게 유독 그랬다.

마지막 달이다. 한 해를 매듭짓기에는 이르기도 하고, 지금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얼기설기 매듭을 마무리 짓고는 새로운 시작을 맞이해야 한다고 누군가는 설파할 시기다. 허나 이번 해가 고작해야 열흘 그리고 그 반, 그보다 하루 정도만 더 남았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매듭을 짓는 일이 아니라 한해의 말미에 당신을 더욱 채워 넣는 일이다. 자명한 사실에 서문지우는 바람을 딛는 걸음을 조금 더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언젠가 내게 말해준 곳이 있었다. 당신의 형제들과 당신이 시간을 보내는 곳이 있다고. 그때 내가 무엇이라 말했더라. 나는 당신의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기에 내가 그곳으로 찾아가는 일은 없으리라고 그렇게 오만하게 말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묻느냐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말에 불과하고 생각에 불과하다. 나는 당신이 필요하고. 당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베어 물고 싶다. 나 역시 나의 가장 여린 살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으니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네가 먼저 내게 잘못을 했다고. 울음기 없는 목소리로 네 옷자락을 잡고 그렇게 말했다. 너 또한 그에 동의했다. 네가 살아 돌아왔기에 더 이상의 탓을 하지 않을 뿐이다. 군자로 살기에는 틀렸다. 강호에 나와 목숨을 내어놓고 사는 주제에 네 목숨. 내게 달라 우기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없기에 나 역시도 그것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우겼을 뿐이다. 그렇다면 네 가장 깊은 곳에 나를 담으라고. 나 역시도 그리하겠다고.

그 이후 나는 네 공간에 발을 들였다.

어깨 위 무거운 갑주도 내리고 날카로운 장갑도 그 옆에 나란히 두고 먼 길 함께 달려온 랴오위의 앞에 어느새 이 안채에 마련되어 있는 물그릇을 내어주면서 묶었던 머리카락을 풀어내리고 손끝으로 흩트리며 걸었다. 집 안을 맨발로 돌아다니고 있으면 발바닥에 서늘한 기운이 도는 어스름한 아침이다.

세월의 흔적 탓인지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도는 창틀이라던가 아니면 그 위에서 홍엽만이 아니라 여러 그림을 그려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책상 위 물감 자국이 가득한 탁상의 자국을 손끝으로 따라가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언젠가 나는 이 흔적처럼 늙어가겠구나. 아니. 그런 순간이 내게 오기는 할까? 내 목숨 하나 네게 쥐여주지 못하는데.

 

“그러다가 감기에 걸리지.”

 

등 뒤를 안아오는 온기에 힘이 풀린다. 다른 이라면 닿기도 전에 손이 먼저 나갔을 텐데. 그저 기다렸다는 듯이 온몸에 힘을 풀어버릴 뿐이다. 몸을 빙글 돌려 팔을 뻗어 그 목을 끌어안는다. 옅은 취심화의 향이 본디 당신이 가진 향 사이로 섞여들었나. 달라진 향취에 그저 눈을 감은 채로 당신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살살 머리카락을 빗어 내린다.

뭇 사람들은 서로를 당겨 끌어안고 둘만이 세상에 있는 것처럼 구는 날이 있다고 했던가. 뭇 사람처럼 당신을 끌어안는다. 내 목숨 덜어내어 당신에게 쥐여주고 당신의 목숨을 제가 가져올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인 것처럼.

 

“당신이 있는데 내가?”

“온다 말도 없이.”

“당신 바쁜 거 알아서. 기다리려 했지.”

“내가 오지 않으면 어쩌려 그랬나.”

“오지 않았나.”

 

이마를 마주 대고는 청회색의 눈동자에 시선을 맞춘다. 밤에 달빛을 섞은 듯했던 눈동자가 언제 밤바다에 일렁이는 물비늘이 비추는 눈동자로 변했나. 나 역시도 이렇게 변했을까. 묻지 않은 채 품 안에서 숨을 내쉰다. 살아있다고 말하는 듯이 따듯한 온기가 온몸을 빈틈없게 감싼다. 아아. 부정할 수 없다. 당신은 내 생의 유일한 정인이리라.

 

제 몸보다 사랑해 버렸으니. 물러설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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