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요?”
“응? 글쎄, 유하 생일은 아닌데…”
“일부러 그러는거죠?”
그럴리가. 라비는 가늘게 뜬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유하를 향해 진정하라는 듯 손짓했다. 수련장 벽에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던 라비의 옆에 서서 유하가 상체만 숙인 채 그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과 손짓에 유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곧 시선을 돌렸다. 무슨 날이냐고 묻는다면, 뭐 그렇게 특별한 날도 아니었지만 라비의 대답을 듣자니 -오늘이 무슨 날인지 일단 제쳐두고- 그냥 넘어가기 어려웠다. 어차피 장난스런 대답일 게 뻔했는데도.
“라비가 내 생일도 알아요?”
“예전에 잠깐 얘기가 나왔거든.”
“무슨 얘기?”
“내 생일이랑 유하 생일이 같은 달이라는 얘기. 알렌 생일은 크리스마스잖아? 겸사겸사 물어봤었어.”
라비의 말에 유하는 상체를 올려 제 앞을 바라보았다. 라비도 그에 맞춰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들 앞에는 대련장에서 서로의 얼굴에 주먹이 닿은 알렌과 칸다가 있었다. 이런 곳에서 책 읽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이번에는 라비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럼 유하는 내 생일 알아?”
“…알죠.”
“어떻게 알았는데?”
분명 제 시선은 앞에 있는데. 아까보다 더 환하게 웃는 라비의 표정이 느껴져 고개를 더 빳빳히 세우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냥 생일을 알고 있을 뿐이잖아. 그런데 왜 지는 기분이 들지…? 마치 내가 라비를 너무 좋아해서 뒷조사라도 한 기분처럼… 유하는 제 손을 올리고 헛기침을 했다. 그 이상 대꾸는 하지 않았으나 엑소시스트의 정보쯤은 검은 교단에서 쉽게 얻을 수 있으니까. 라비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유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정작 유하가 제게 처음 던졌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날인데?”
“실버데이라는데… …알아요?”
실버데이. 라비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떠올렸다. 북맨이라고 전부 아는 건 아니지.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어딘가에 기록된 이야기는 아닌 듯 하고. 그럼 떠도는 이야기인가? 라비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자 유하는 그제야 몸을 낮춰 그의 옆에 앉았다. 예전부터 내려온 전통은 아니에요. 라비가 예상한대로 전통적인 날은 아닌 모양이었다. 유하는 실버데이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 이를테면 판매전략이겠죠. 연인들이 은반지를 주고받으며 미래를 약속하는 날, 반지를 팔기 딱 좋지 않나요. 나도 예전이라면 그런 수법에 넘어가지 않았을텐데. 마치 비밀 얘기를 하듯이 유하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평소라면 작아진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겠지만 대련장에서 싸우는 알렌과 칸다의 목소리가 작은 목소리에 얹어져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예전이라면, 라고 말했다는 건…
“산 거야?”
“…반지는 아니에요.”
“그럼 목걸이?”
“직접 확인해봐요.”
유하가 곧장 주먹 쥔 손을 내밀자 라비는 유하의 손 아래에 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툭하니 얹어진 건 귀걸이 한쌍이었다. 은색의 둥근 귀걸이는 라비가 주로 하는 링 귀걸이와 다른 디자인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기에 피어싱에 가깝다.- 귀걸이를 선물 받는 건 처음 아닌가. 유하는 툭하면 제게 이유없이 선물을 했었다. 유명한 책이라거나 책갈피, 꽃, 간식들까지. 그 중에 악세사리는 잘 없었다. 라비의 귀걸이는 보통 제 패션에 신경 쓰기 위해 마음에 드는 귀걸이를 직접 구매하는 일이 많았다. 라비는 제 손에 얹어진 귀걸이를 한참 살펴보았다. 근데 왜 반지는 아니야? 연인끼리 주고 받는 날인데. 반지는 번거로울 것 같고… 유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다음 말은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라비는 재촉하지 않고 고개를 까닥였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건, 자신도 듣고 싶지 않은 말인 게 당연했다.
“어쨌든 소중히 하고 다닐게.”
“…맘에 들어요?”
“당연한 거 아냐?”
“그럼 다행이긴 한데…”
제 반응이 별로였나? 눈치를 보는 유하의 모습에 라비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제 눈에 들어오는 건 옆으로 고개를 돌린 유하였다. 목을 살짝 뒤덮는 짧은 머리카락을 유지하는 유하는, 그에 맞게 귀도 잘 보이는 편이었다. 라비는 유하의 귀를 자세히 본 적은 없으나 언젠가 그녀의 귀에 검은색 귀걸이가 자리 잡은 건 알고 있었다. 귀걸이를 하고 다니는 게 얼마 안 된 일인지 검은 교단의 사람들이 놀랐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보이는 귀에도 분명 검은색 귀걸이가 있을 줄 알았으나… 예상과 다르게 얼핏 본 듯 한 귀걸이가 있었다. 라비는 다시 고개를 내려 제 손에 있는 은색 귀걸이를 바라보았다. 몇 번을 봐도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결국 라비는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봤자 알렌과 칸다의 대련 소리에 묻히는 소리였다.
“똑같은거야?”
“왜 웃어요…”
일부러 보여준 건 맞지만. 유하는 얼른 제 머리카락을 넘기며 귀걸이를 어필했던 손을 내리고 살짝 주먹 쥔 채 라비를 바라보았다. 웃으라고 한 게 아닌데…! 라비는 불만스런 말투에 곧장 미안하다며 웃음을 겨우 멈추고 유하의 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커플 반지 대신 귀걸이라…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았다. 반지를 하지 않은 이유는 짐작 가지 않으나 연인 사이에 커플 귀걸이도 어색한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귀걸이를 골라 선물해줄지 고민하는 모습부터 전해주기 위해 핑계댈 말을 고르는 모습까지, 거기에 자신도 같은 귀걸이를 했다는 어필마저 완벽했다. 제 상상을 뛰어넘었다. 자신도 사랑하는 이를 대하는데 익숙함은 없었다. 친화력은 좋으나 사랑에 대해 논하자면 입을 다물게 되었다. 제 연인도 별 차이 없겠지만… 간혹 들어오는 귀여운 행동이 결국 너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간다는 걸 아는지 모르겠다. 이왕 선물 받은 귀걸이라면 아껴서 하고 싶었는데.
“유하가 껴줄래?”
“네? 뭐를…?”
“뭐겠어. 귀걸이지.”
이리 와. 라비는 자리에 일어나 유하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들이 향하는 발걸음은 라비와 북맨이 같이 지내는 교단 내 방이었다. 방문을 열기만 해도 쏟아져나오는 종이들 사이를 라비는 익숙하게 빈 자리를 찾아가 책상에 도달했다. 유하는 라비의 방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으나 직접 들어간 건 처음과 마찬가지여서 라비의 발걸음을 기억해 따라가야만 했다. 종이가 넘쳐나는 방을 들어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짧은 생각과 함께 라비의 앞에 도달하자 원래 착용하고 있던 귀걸이를 뺀 라비가 유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유하의 손에는 그녀가 선물했던 귀걸이를 쥐어주었다.
“자, 여기.”
라비는 상체를 숙이고 유하를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제 눈높이에 맞춰 들어오는 얼굴이, 이제껏 지내며 가장 가깝게 유하는 잠시 숨을 참았다. 이게 이렇게 떨리는 일인지. 제 귀에 귀걸이를 넣을 때도 익숙하게 하지 못했는데, 유하는 작게 떨리는 손에 힘을 주고 조심스레 라비의 귀를 잡았다. 비어있는 구멍을 향해 귀걸이를 넣는 와중에도 라비의 숨결이 제게 닿는 기분이었다. 다 되었다는 말과 함께 손을 뗀 후에도 라비는 일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유하는 곧장 뒤로 물러나고 싶었으나 쌓여있는 종이를 다짜고짜 밀어낼 수도 없어 그대로 고개를 숙이는 게 전부였다.
“…반대쪽은?”
귀걸이가 제대로 들어갔는지 알기 위해 고개를 살짝 까닥이던 라비는 제 옆에서 고개를 푹 숙이는 유하를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장난스런 목소리와 함께 반대쪽에 대해 묻자 유하는 붉어진 얼굴로 라비의 팔을 툭 쳤다.
“직접 해요…!”
“아하하, 알았어. 대신 할 때까지 여기 있어줘.”
어울리는지 보고 가야하잖아. 당장이라도 도망갈 것 같은 얼굴에 변명을 늘어놓자 이유가 통했는지 유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참동안 바라보는 시선에 긴장한 건 라비 쪽이었다. 어려움없이 착용해야했던 귀걸이는 몇 번이고 손이 미끄러진 후에 제대로 할 수 있었다. 멋쩍음에 라비는 제 뒷목을 매만지며 유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자신과 똑같은 귀걸이가 익숙하게 눈에 들어왔다.
“어때, 어울려?”
그 모습이 저도 모르게 기뻐서, 라비는 좀 더 부드럽게 웃으며 유하를 바라보았다. 들려온 답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는 말이었다.
“엄청, 잘 어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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